질주하듯 달리는 우리 삶의 속도는 얼마나 될까. 때로는 거침없이 달리는 가속도의 페달에서 발을 뗄 줄 알아야 행복의 속도를 지킬 수 있다. 과속은 언제나 불안정을 동반한다. 천천히 달리는 것, 가다가 멈추는 것, 속도를 늦추고 때로 기꺼이 멈춰 서면 본질이 들여다보이고 행복해진다.
북유럽 사람들은 느리게 산다. 수채화처럼 그려진 대자연의 풍경과 여유로운 생활상이 삶의 이상향이라면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는 북유럽은 그 이상향이 실현되어지는 유토피아 같은 곳이다. 그들을 닮아보려고 살인적 더위에 시달리는 찜통 같은 서울을 벗어나 북유럽 네 나라와 발트 세 나라 중 첫 번째로 덴마크의 코펜하겐을 찾는다. 이곳은 ‘여행은 정신을 다시 젊어지게 하는 샘이다.’라고 말한 안데르센의 도시이기도 하다.
4백 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바이킹의 나라 덴마크 왕국은 9세기 경 독립 국가를 이루어 13, 14세기에는 북유럽 전역을 지배하는 대국이었으나,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독립해 나가고, 계속되는 전쟁에서 패전하여 국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지역을 잃으면서 국력이 급속히 약화된다.
땅에는 햄릿, 푸른 대양에는 인어공주. 덴마크의 코펜하겐은 발트 해의 관문을 지키는 상인의 항구라는 뜻을 지닌 덴마크의 수도로 스칸디나비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옛 부터 정치, 문화, 상업의 중심지였고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북유럽의 중심 도시로 성장했다. 코펜하겐은 세계 1위의 행복지수를 자랑하는 곳이다. 시내에는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 많고, 예술 분야에서도 인정받는 학회의 본부가 이곳에 있어서 건축, 교통, 예술, 철강 공업 등 모든 분야에서 유명한 대도시이다.
코펜하겐 최고의 관광 랜드마크는 단연 니하운(nyhaun) 운하 투어다. 1시간 동안 진행되는 운하 투어를 통해 코펜하겐의 심장부를 관통하면서 두루두루 시내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코펜하겐의 니하운은 새로운 항구(new harbor)라는 뜻으로, 여왕 마르그레테 2세가 사는 아밀리엔보르 궁전에서 기차역 쪽으로 오는 길에 있는 '왕의 광장'의 오른쪽 지역에 있다. 건축가 헨리 바론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운하를 벤치마킹하여 1669년부터 1673년까지 4년간 스웨덴군 전쟁 포로들의 노동력을 빌어 뉴토르 광장과 바다를 연결한 인공 운하다.
좀처럼 더위를 경험할 수 없었던 북유럽도 세계적인 무더위 기승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지 7월말 까지 30도 이상의 폭염이 찾아와 에어컨이 원래 없는 시내 호텔에 비상이 걸렸단다. 다행히 기자가 도착한 8월 초는 더위가 물러간 초가을 날씨다.
오늘 따라 날씨가 너무 좋다. 새하얀 솜털 같은 뭉게구름을 머리에 인 코발트색 하늘 아래로 깨끗한 보석 같은 물 위를 우리를 태운 유람선이 유유히 지나간다.
오늘도 세계 각 지역에서 온 수많은 관광객들을 싣고 유람선들이 줄지어 운항하고 있다. 운하 주변에는 각종 요트와 범선의 정박지가 있고, 옛 선원들의 거리였던 이곳에는 주점들과 카페들이 밀집되어 있다.
코펜하겐 시내 뿐 아니라 이곳 운하 양쪽으로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덴마크는 전체 국민의 35%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할 정도니 자전거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니하운 운하는 평균 수심이 13m로 깊고 물이 아주 깨끗하다. 니하운을 따라 이어진 거리를 안데르센 동화의 거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재즈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 덴마크 국민들이 즐겨 찾는데, 특히 요즘은 백야를 즐기는 덴마크 젊은이들이 많이 모인다고 한다.
북유럽 사람들은 생업보다 소명에 대한 고민이 많다. ‘무엇을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보다 ‘무엇을 해야 즐거운가, 행복한가, 의미 있는가?’ 소명에 가까운 일은 활력이 넘치고 풍성한 영감을 얻고 즐겁고 공감대의 폭이 크다. 자신의 삶에서 차지하는 가치나 의미가 워낙 크기 때문이다. 물론 국가에서 기본 소득, 사회복지 보장 등의 사회적 안전망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생업에서 소명으로의 전환이 가능하겠지만. 여하튼 북유럽 이야기만 나오면 이 점이 제일 부러운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좁은 운하를 빠져 나오면 채도 높은 코발트색의 잔잔하고 넓은 바다가 나오는데, 바닷가에는 오페라 하우스와 덴마크 국립극장, 디자인 센터, 왕립 도서관 같은 덴마크가 자랑하는 첨단의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바닷가 초록 빛깔 잔디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을 이불 삼아 누워있는 젊은 연인들 모습이 많이 보인다.
덴마크 왕립도서관은 밤이 되면 건물 중간 부분 아트리움의 유리벽을 통해 나오는 황금색 불빛이 운하의 물에 드리워지고 다이아몬드는 진한 검은 색을 띠면서 신비로움을 더한다.
덴마크 여왕인 마르그레테 2세는 1972년 즉위하여 현재까지 재위하고 있는데, 올 2월 작고한 남편 헨리크 공이 자신이 죽으면 부인 곁에 묻히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유언을 남기는 바람에 부부가 왕가 무덤에 함께 묻히는 수백 년에 걸친 왕실 전통도 깨지게 된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인간이 되었을까. 애절한 그 몸짓은 무엇을 그리워함인가. 소녀 인어가 인간 왕자를 사랑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토록 바라던 인간이 된 인어공주 조각상 뒤로 갈매기가 무리지어 지나간다.
1801년 덴마크 왕은 지금은 덴마크 국립갤러리 소속인 왕실 석고상 컬렉션 전시관 8층 ‘왕의 방’에서 영국의 명장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함대에 의해 덴마크 함대가 패배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자신의 앞바다에서 자신의 부대가 패전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하는 왕의 심경은 어떠했을까?
덴마크 왕은 과거 왕궁이었던 크리스티안보르 궁이 불이 나서 임시로 아멜리온보르 궁으로 옮겨가는데, 새 궁이 지어졌는데도 돌아가지 않았고, 현재는 여왕이 기거하고 있다. 여왕이 궁에 있으면 왼쪽 여왕 집무실의 지붕에 국기가 게양된다.
코펜하겐은 안데르센에게 애증이 점철된 도시였다. 그가 배우이자 극작가로서 처절한 실패를 맛보게 했던 도시이자, 동화를 위한 무한한 상상력과 모티브를 준 도시 이기도 했다. 8월 4일은 아동문학의 걸작을 남긴 최고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이 사망한 날이다. "내가 어려서 늘 못생겼다고 놀림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미운 오리 새끼'를 쓸 수 있었다. 내가 어려서 너무 가난했기 때문에 나는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 있었다. 나에게 역경은 건강한 축복이었다." 진정으로 가슴을 울리는 말이다.
운하 투어 내내 주황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 주황색 뾰족탑 지붕을 가진 건축물이 많은 곳, 바로 이곳이 덴마크임을 실감나게 한다.
북유럽 사람들은 오늘이 행복하지 못하면 내일 행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세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여행을 즐긴다. 그러다 보니 저축을 많이 하지 못한다. 우리는 내일의 행복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과감하게 희생한다. 그 내일은 영원한 내일일 수 있다.
구세주 교회는 크리스티안 4세에 의해 지어진 고딕 양식의 교회다. 교회 건물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뭐니 뭐니 해도 95m 높이의 나선형 첨탑이다. 전해 오는 이야기로 이 탑을 설계한 사람은 탑이 다 지어지고 나서야 내부의 나선형 계단이 거꾸로 설계된 것을 깨닫고 탑 꼭대기에서 뛰어 내렸다고 한다.
보르센 구 증권거래소 건물은 17세기 건축 왕 크리스티안 4세가 건축했는데, 4 마리 용이 꼬리를 꼬아서 56m 높이의 첨탑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압권이다.
크리스티안보르 궁은 12세기 코펜하겐의 창설자 압살론 주교가 성터 위에 건설했는데, 18세기 말까지 왕실의 주거 공간으로 사용되다가 불타버려 새로 지었지만 아메리엔보르 궁으로 거처를 옮긴 프레드릭 6세는 결국 이 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같은 건물에 있다.
안데르센의 도시 코펜하겐, 한 장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을 유람선 따라 즐기면서 내 마음도 물결 따라 흐른다. 투어를 마치고 유람선에서 내려 배에서 뒤통수만 본 인어공주를 보러 가다 들른 카스텔레트 요새는 완벽한 별 모양의 성이다. 주변을 해자로 둘러싼 방어형 요새인데, 산이 아예 없는 코펜하겐의 방어를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 보여진다. 1801년 코펜하겐 전투와 1940년 독일과의 전투에서 적의 침략을 효율적으로 막아낸다.
코펜하겐의 명물 인어공주 상은 약 80㎝의 작은 동상이지만 코펜하겐을 찾는 모든 관광객들이 꼭 들르는 관광 명소다. 몇 차례에 걸쳐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으나 계속 복원돼 왔으며, 카스텔레트 요새에서 약 300m정도 떨어진 해안가에 위치해 있다. 세계 3대 황당 관광이라는 게 있는데 썰렁하기만 한 독일 로렐라이 언덕, 너무 초라해 기가 막히는 벨기에 오줌싸개 동상,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인어공주 조각상이다. 그래도 기념 촬영 하려는 사람들로 주변은 북새통이다.
아말리엔보그 궁전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게피온 분수대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게피온과 황소로 변신한 4명의 아들들이 분수에서 물을 뿜고 있다. 예전에 스웨덴 왕이 한 번씩 신분을 속이고 마을로 내려가서 백성들 사는 모습을 살폈는데, 어느 날 묘령의 여인을 만나 하룻밤을 같이 지내게 된다. 매력 넘치는 여인에게 반한 왕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그대가 나를 즐겁게 해 주었으니 내일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그대가 그은 땅을 모두 주겠소.’라고 제안한다. 사실 이 여인은 여신 게피온이었고, 다음날 황소로 변신한 그의 아들 넷이 나타나서 하루 종일 어마어마한 땅을 갈아엎은 후 그 땅을 떼서 바다로 가져가 버렸는데 그 땅이 바로 코펜하겐이 있는 이 섬이라고 한다.
이제 코펜하겐을 뒤로 하고 빙하와 피요르드의 나라 노르웨이로 가는 DFDS seaways 크루즈선을 타기 위해 크루즈 전용선 부두로 이동한다. 일상을 떠나 새로운 풍경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일처럼 행복한 일도 없다. 또 여행지에서 새로운 풍경에 얽힌 숨은 보석 같은 이야기를 발견할 때 우리는 더욱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제 저녁 4시 반에 출항하면 내일 아침 9시 반에 노르웨이 오슬로 항에 도착한다. 그 때 까지 코펜하겐에서 감동했던 순간의 느낌을 메모하고 정리하는 일은 또 다른 여행의 시작이기도 하다.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말을 떠올리면서 내 인생도 한번 뒤돌아볼 요량이다.
“Life is a Journey, Not a Destination.”
“인생은 결과가 아닌 여정(旅程)이다.”
여계봉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