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운명에 얽매이지 말자

김도훈




인생을 걷다 보면 누구나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잘못된 선택은 마치 미로처럼 끝이 보이지 않을 것이고, 제일 나은 선택은 한 번뿐인 삶에 있어서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하나의 출구를 찾는다고 선택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생은 BD 사이의 C”라고 프랑스의 철학자 폴 사르트르가 했던 말을 상기해보자. 여기서 BBirth(탄생), DDeath(죽음), CChoice(선택)을 각각 의미한다. 이걸 해석하면 인생은 삶과 죽음 사이의 무한한 선택의 연속임을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니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며 그래야 지혜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뜻이다.


위의 이야기와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아무튼 수능이라는 큰 벽을 눈앞에 둔 고등학생 시절을 넘어서도 선택의 연속은 마찬가지로 이어진다. 대학교에 오면 진짜 어른이 되었다는 생각에 해보고 싶은 걸 전부 할 수 있으리라는 기쁨과 자유를 느낄 것이고 풋풋한 연애를 해볼 기대를 하면서 설렘을 느낄 테지만, 막상 마주한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이토록 애석한 일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인가. 소위 말하는 행복에 겨운 캠퍼스 생활은 모두 다 누릴 수 있는 선택 하면 되는 전체의 행복이 아닌 선택을 누릴 수 있는 소수만 누릴 수 있는 행복이었던 것일 줄이야.

내 대학교 1학년 시절은 경제적으로 무척 힘들던 시기였다. 아르바이트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거라곤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밥이나 먹고 살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그 외에 다른 건 그야말로 사치일 뿐. 옷을 사고 싶어도 사면 당장 학식만 먹어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이었다. 그런 총체적 난국 속에서 무작정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공과 사를 구별 못 하듯이 학생의 본분을 지키지 못했다. 지나친 아르바이트로 다른 모든 시간을 빼앗긴 나로선 학업에 전념은커녕 기본적인 출석조차 버거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던 중 내가 좋으니까 자주 만나자고 했던 여자인 친구가 있었지만, 예상대로 아르바이트와 과제, 지친 심신을 위한 무조건적인 휴식을 취하느라 만나기는커녕 제대로 연락마저 못 하기 일쑤였다. 그것 말고도 다른 여자인 친구들 역시 비슷한 처지로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지금에서야 돌이켜보면 왜 그랬을까 싶은 후회하는 과거 중 하나다.


이쯤에서 곽백수만화가가 했던 말을 하나 보자. “의심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온 행운까지 의심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때의 내가 딱 저랬다. 수도 없이 넘치던 행운을 믿지 못하고 저버리고 만 행위를 쭉 반복했으니. 그 중 대표적인 일례가 아까 말한 거다. 나를 위해 헌신하던 그녀를 다른 의도가 있나 싶어서 의심하게 되었고, 이윽고 그녀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넝쿨째 굴러온 호박을 차버려서 박살을 내버린 격이지 않나.

가만 보면 사람들은 선택에 앞서 운명이란 단어를 만들어 거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그렇게 해서 본인의 선택으로 인해 수반되는 여러 감정을 이겨내려고 한다. 흔히 죄책감, 좌절, 실망, 후회, 아쉬움, 실패감 등의 심적인 고통을 덜어내는 데 자주 쓰인다. 애초에 이런 운명이니까 괴롭거나 정신적인 아픔을 느낄 필요 없어. 운명이 이런데, 어떡해? 이건 운명이야, 후회하지 말자. 운명 앞에 사람은 어쩔 수 없어, 그러니까 너무 실망스러워하지 마! 등이 있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이런 핑계야말로 운명과 후회를 맞바꾸는 희대의 어리석음이 아닐까?’라고 말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경우의 가장 큰 문제는 운명이 희망을 집어삼키고 만다는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운명에 집착하고 의존하다 보면, 작은 행운마저도 몽땅 운명으로 취급하게 된다. 그렇게 만에 하나라도 큰 행운이 찾아오면 그것은 운명이라는 이름의 농간으로 떠받들어지고 만다. 바로 그 순간, 희망은 그 가치를 잃고 상실하게 된다. 우선순위도 그렇고 그 크기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운명이 희망을 압도하기 시작한 채 시간이 더 지나게 되면, 그땐 어마어마한 차이로 손쓸 겨를도 없이 그 간격이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그때의 내가 미련하게도 원래부터 이럴 운명이었다는 식으로 안타까운 위로의 말을 남긴 기억이 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니 어차피 만날 수 없는 인연이었다고 단정 짓게 되지만,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그때의 나 역시 모르진 않았다.

불과 몇 세대 전만 해도, 우리 사회는 평생을 함께할 천생연분의 결혼 상대를 부모가 정해주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나를 포함한 요즘 젊은 사람들이 들으면 기절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매우 바람직하고 흔한 일이었다. 자기 인생의 오롯한 주인이 내가 아니었던 시절의 이야기랄까. 지금도 우리가 흔히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선택 장애라고 말하는 선택의 어려움을 앓고 있는 건 그 전통사회의 잔해가 아직도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래도 미약하게나마 그 영향이 어느 정도 남아 있진 않을까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찌 됐든, 그때의 나처럼 쓸데없이 운명 타령이나 하면 사람의 마음속에서 의구심은 점점 자라나고 나중엔 증세가 심해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운명이었다고 억지로 핑계 대면 결과는 안 봐도 뻔하다. 결국 그 말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게 없고, 나아가 본인이 본인을 믿지 않으면 그땐 다음 순서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본인이 자기 자신부터 믿어야 비로소 다음 바통이 전해질 수 있는 법이다.

! 어차피 세상 모든 청춘은 누구나 힘든 법이다. 그러니 차라리 희망을 품어서 힘내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다. 또 약간 외람된 말일 수 있으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누군가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면 지금의 힘겨운 삶이 제일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거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야말로 단언컨대 가장 어려운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청년을 포함해서, 물론 나도 그렇겠지만 타인의 마음은커녕 본인의 마음조차 완전히 얻지 못한다고 봐야 한다. 여러분은 그 진솔한 내면의 목소리를 의심해선 결코 안 된다. 그러니 운명에 집어 삼켜지지 말자. 그리고 당당하게 운명을 선택하자. 그 운명이 비록 삶을 취한 눈에 보이는 어설픈 희망일지언정.


끝으로 현대 사회는 갈수록 혼탁해지고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는 게 안타깝게도 눈앞에 보이는 진짜배기 현실이다.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이른바 가족 구성에 필요한 통상적인 세 단계를 포기한 신조어)와 사포세대(삼포세대에서 인간관계까지 포기해 총 네 가지를 포기한다는 20·30세대를 일컫는 신조어)란 말을 거쳐서 꿈과 희망, 모든 삶의 가치마저도 포기하는 세대를 뜻하는 다포세대란 말이 나오는 지금, 인생의 전반기를 어찌어찌 운 좋게 잘 넘긴다 한들 후반기도 그렇게 잘 넘긴단 보장은 절대 없다. 100세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우리의 인생 후반기에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사회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현명한 선택과 지혜로운 모습을 보여주어 끝까지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모든 게 최소한 부질없진 않아도 무척 고단한 일이 되겠지만, 적어도 그 고단함을 이겨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운명에 지거나 갇혀선 안 된다. 우리는 개개인의 삶 속에서 온갖 상호작용을 통해 사회를 살아가는 존재임을 잊지 말자.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우리네 인생에서 이리저리 얽매이는 것만 해도 충분하니까, 그러니 제발! 지금이라도 그만 운명에 얽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5.03 10:48 수정 2020.05.03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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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