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세동무


우리의 근대역사는 19108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로부터 찌그러진 양철 터널 속에 깔린 비포장 비탈길을 더듬는다. 내 땅 위를 걸어 다니면서 일본인들의 눈총을 맞아야 했다. 처음 10년은 왜인들이 옆구리에 차고 다니는 긴 칼(日本刀)을 곁눈질 하면서 움츠렸고, 10년은 문화통치라는 모호함 속에서 혼돈을 거쳤다. 그 다음 10년이 시작되는 1930년에 이 노래가 불렸다. 저들의 대륙진출 음흉을 폭거(暴擧)한 만주사변(1931.9.18)을 일으키기 1년 전 2. 일제는 이 시기 조선민족문화말살을 기도하고 있었다. 음반취재규칙·조선어사용금지·신사참배·창씨개명·조선인육군징집령 등으로 이어지는 거칠거칠한 세월.

 

 

지나간 그 옛날에 푸른 잔디에 / 꿈을 꾸던 그 시절이 언제이던가 / 서녘하늘 해지고 날은 저물어 / 나그네의 갈 길이 아득하여요 // 장미 같은 내 마음에 가시가 도처 / 이다지도 어린 넋 시들어졌네 / 사랑과 굳은 맹세 사라진 자취 / 다시 두 번 피지 못 할 고운 내 모양 // 즐거웁던 그날에도 설은 눈물도 / 저 바다의 물결에 지워버리고 / 옛날의 푸른 잔디 다시 그리워 / 황혼의 길이나마 돌아 가오리


▶ 세동무 https://youtu.be/kv44DJulhXo

 

 

이 노래는 1928년 처음 삼걸인(三乞人)이라는 제목으로 창작된, 문수일 작사 김서정 작곡의 영화주제가로 채동원이 불렀다. 영화는 김영환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을 하면서 스스로 변사로도 출연했다. 작곡가 김서과와 김영환을 같은 인물, 정풍송과 정욱이 동일인임과 유사하다. 이 이름은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세동무>로 이름표를 바꿔단다. 1932년 채동원이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아리랑과 같이 양면으로 출반할 때도 같은 이름으로 세상에 나온다.

 

 

노래를 들으면 노랫말과 곡조가 햇볕에 녹아내린 엿가락처럼 흐느적거리면서 이 가락 저 소절이 척척 휘감긴다. 오뉴월 땡볕 담장 위의 휘늘어진 호박잎 같고, 예고 없이 서둘러 찾아 온 무서리를 맞은 국화 꽃잎 같다. 필시 이 노래는 영화 속에서 귀신의 곡성(哭聲)처럼 들리기도 했으리라. 정지상이 산사에서 공부를 하던 밤, 휘영청 달을 휘감은 구름 덩어리에서 귀성(鬼聲)을 들은 것처럼.

 

 

그 시절은 무성영화 시대. 홑이불 포장 같은 스크린에 영화 장면이 흑백 슬라이드로 넘겨지는 동안 극장무대에서는 악단 반주에 맞추어 가수가 주제가를 직접 불렀고, 변사는 생으로 나레이션을 하였다. 이 생목소리 주인공 김영환은 1898년 진주에서 기생 아들로 출생하여 한양에서 공부를 한 후 영화감독·시나리오작가·무성영화 변사를 지내다가 1936년에 사망한 예술인이다. 서울 출생설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그는 휘문의숙을 졸업하였으며, 1924년 단성사 제작장화홍련전감독으로 데뷔하였다. 그는 1928년부터는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무성영화 변사를 했는데, 장안에 이름난 변사로 꼽혔다.

 

 

금강·서광영화사가 합작한 <세동무>1928년 단성사에서 개봉하였으며, 김연실 이원용 복혜숙이 열연을 한다. 줄거리는, 원한을 품고 죽은 거지 셋이 살아생전의 원한을 풀기 위해서 밤마다 귀신으로 나타나서 원수들을 저주하고 괴롭히는 전형적인 공포영화다. 귀신을 화자로 등장시켜서 유산층(有産層)에 대한 저항을 조장하는 영화였단다. 일종의 민족저항을 은유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총독부가 영화의 이름도 바꾸게 하고, 필름도 상당부분을 절단했다고 하니 또 분기(憤氣)가 꿈실거린다.

 

 

채동원과 채규엽은 같은 사람,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다. 한국대중가요앨범에 그의 정체가 밝혀져 있다. 매일신보 193223일자, 채규엽의 글. 채동원이 처음 10곡 정도 레코드 취입을 했는데, 이때 동원(東園)이란 이름으로 아리랑을 취입했다고 썼단다. 그 이전에는 두 이름을 오기(誤記)로 보거나, 다른 사람이라는 설이 있었단다. 이를 근거로 하여 채규엽의 데뷔곡도 봄 노래 부르자유랑인의 노래가 아니라 채동원으로 녹음한 아리랑세동무로 정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세동무1930년 김연실, 1932년에는 강석연이 다시 음반을 발매하였지만 광복 이후에는 다시 부른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기고 : 유차영 시인, 한국콜마 상무이사

 


정명 기자
작성 2018.08.24 16:34 수정 2018.11.14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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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