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신경림은 그의 책 ‘시인을 찾아서'에서 정지용을 “동족상잔의 진흙 밭에서 뒹굴기엔 너무 고고하고 도도한 시인이었다.”라고 회고한다. 정지용은 한국전쟁 중 갑자기 행방불명되었고 그 후 정부는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해 그의 모든 작품을 판금시키고 학문적 접근조차도 금지시켰다.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1988년에서야 그의 작품은 해금 되어 다시 우리곁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해금조치 직후 정지용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용회'를 만들어 모임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듬해 정지용 생가는 비로소 복원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기에 이른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를 통해 우리민족의 이상적 공간을 그렸던 정지용. 우리 역사의 질곡은 그에게 또 다른 ‘고향’을 노래하게 하였다. 일제 강점기는 그에게 ‘친일시인이라는 누명’을 씌우기도 했으며 해방 후 좌우익 대립의 혼돈은 그를 방황케 했다. ‘동족상잔의 비극 6.25’는 아예 그를 ‘월북 시인’으로 낙인 찍어 그와 그의 문학을 묻어버렸다. 어쩌면 그렇게 지용의 생애는 우리 민족의 역사를 꼭 닮았을까. 1988년 제24회 하계 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리던 해, 그 해는 세계인이 한국을 주목하던 시절이었으며, 시인 정지용이 다시 우리에게 돌아왔던 해였다. 1988년 4월 1일, 시인 정지용을 흠모해 왔던 이 나라의 문인 예술인들과 그의 제자들이 모여 ‘지용회’를 발족하기에 이르고 그의 고향 옥천에서는 그해 5월부터 ‘제1회 지용제’를 시작으로 매년 5월이면 ‘지용제’를 열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지용 생가는 방문을 항상 열어 두어 찾는 이에게 그의 아버지가 한약방을 하였음을 가구家具 배치를 통하여 알리고 있다. 시선 가는 곳 마다 정지용의 시를 걸어 놓아 시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려해 놓았다. “질화로에 재가 식어 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향수'의 시어 따라 방안에 배치된 소품 질화로와 등잔은 자연스럽게 ‘향수'를 다시금 음미하게 한다. 정지용 생가에는 두개의 사립문이 있다. 하나면 족할 것을 두개씩이나 문을 낸 것은 방문객의 동선을 고려했나 보다.
정지용문학관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시인 정지용의 삶과 문학, 현대시사(現代詩史)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자연스럽게 쌓게 된다. 정지용 생가와 문학관이 위치하고 있는 곳은 옥천 구읍이다. 옥천역이 생기기 전에는 옥천의 중심지였으나 옥천역이 들어서고 나서 그 주변이 옥천의 중심지로 발전되니 구읍의 경제는 세월의 변천에 따라 쇠락하고 조그만 마을로 변해버렸다. 구읍은 이제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고 그의 문학의 향기를 음미할 수 있는 명소가 되었다. 오히려 다행한 일이다. 옥천의 구읍은 옛날의 영화를 말하듯, 일제 강점기 건물과 미국식 교회당, 개량민가 등 근대 건축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으며 문화유산도 곳곳에 있다.
정지용 생가 인근의 교동리에는 300년도 더 된 느티나무가 있는 정자가 하나 있고 그 곁에는 푸른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다. 실로 얼마 만에 보는 보리밭인가. 저 보리밭 어드메쯤 정지용이 함부로 쏜 화살이 함초롬히 이슬을 맞고 박혀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옥천은 정지용 만큼이나 정다운 풍경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좋다.
이해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