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해석에 반대한다

김선호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다. 해석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 이는 세계를 이 세계로 번역하는 것이다.”

해석에 반대한다

 

수전 손택은 해석은 지식인이 세계에 가하는 복수라고 말하며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해석이라는 작업 자체가 하나의 해석으로 읽힌다는 사실을 비판하면서 본연의 마음으로 돌아갈 것을 종용한다. 이것은 해석 작업 자체가 하나의 권력으로 여겨지는 실태를 고발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버려지는 세계의 파편을 안타깝게 여김에서 우러나온 지적이다. 그래서 수잔 손택은 글의 끝을 다음과 같은 말로 마무리 짓는다. “해석학 대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술의 성애학이다.”라고 말이다.


나는 이것이 수전 손택이 했던 말 중에 가장 큰 파급력을 지닌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 글에서 그녀는 영화가 대중예술의 영역에 몸을 걸치기에 지식인들의 해석 작업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있다고 말하는데, 그러면서도 영화가 막 해석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한다. (또는 그렇게 보인다.) 요컨대 이 부분은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그토록 노력해왔다는 점을 떠오르게 한다. 예를 들어 예술이라는 게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던 우리의 과거를 떠올려본다면,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은 그(영화)가 지식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는 말이나 다름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영화에 대한 지식인의 무관심은 지식인 이전의 무엇에 해당하는 영화의 모습을 외면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 따르면,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은 시기와 지식인의 전유물로 인정받은 시기가 대중에게 열린 영화로 전환되는 시점을 설명하지 못하게 된다. 대체 언제부터 영화는 대중에게 열린 텍스트가 되었을까? 우리의 의문은 바로 이것이다.

수전 손택은 영화가 대중 예술이기에 지식인들의 손이 닿지 않았다고만 언급했다. 달리 말하면 그녀가 상세히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영화에 지식인의 손이 닿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녀가 잘 몰랐기에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는 정말로 명확하지 않은 사실이기에 언급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여튼 영화가 해석에 있어 잃어버린 고리를 지니고 있다는 점은 명확하다. 따라서 우리가 알 수 없는 사실에 몰두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물음 자체에는 오늘날의 영화를 설명할 수 있는 기원이 담겨있다. 오늘날에도 그런 물음은 여전히 던져지고 또한 풀리지도 않을 예정이다.

 

1.

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들이 보통은 재미가 없다고 말하는 뉴스 인터뷰를 보면서, 무엇이 예술적이고 무엇이 상업적인지를 되물어보았다. 그러한 인터뷰에 따르면. 봉준호의 <기생충>이 어느 때의 관객 수를 늘려나가고 있지만, 칸에서 수상한 영화라는 꼬리가 붙어버린 이상 그런 흥행은 몹시 이상한 일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상업성과 예술성 둘 다 잡았다고 표현하지만, 이 표현에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애초에 영화가 두 갈래로 나뉜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이다. 산업의 측면으로만 본다면 이 표현은 이의를 달 것이 없다. 불특정 다수에게 어필하기 위해 재미있게 만든다는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이 재미라는 단어를 개인으로 한정하는 순간 이 말에는 틈새가 생겨버린다. 영화를 보는 재미는 개인마다 다르다. 다시 말해서, 영화에서 느껴지는 재미는 아리스토텔레스식의 고전적인 수사법만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이때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이 인터넷 등지에서 자신이 본 것을 타인과 공유하고 그것을 대조해보는 추상-조합게임이 수면으로 떠오른다. 유행하는 영화를 보고 나서 친구들과 대화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일상이 되었으며, 스포일러 금지라는 명령은 보통 이러한 맥락에서 시행되곤 한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를 보고 나서 물음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물음을 던지기 위해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타당하지 않거나 잘못된 일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것이 영화에는 애초에 성질이 없었다.’는 점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보고 나서 물음을 던지든 물음을 던지기 위해 영화를 보든 간에 영화는 항상 그곳에 존재한다. 따라서 그 두 가지 사안은 전적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예컨대 영화를 볼 때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태도이다. 그런 흐름으로 이것을 우리뿐만 아니라 영화에도 동일하게 돌려줄 수 있다. 영화가 말하려는 게 텍스트에만 한정될 이유는 없다. 영화는 태도 또한 보여줄 수 있다. 문제는 영화에서 텍스트를 발견하는 행위가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영화 본인이든 관객인 우리든 간에 텍스트로만 한정되는 영화는 그 자신의 태도를 잃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태도라는 말이 예절이라는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무례를 범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무례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곧 해석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영화가 상업적인지 예술적인지를 따지기 이전에,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시절의 이야기는 그것이 단지 텍스트였을 뿐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동굴 벽에 그려진 그림이 원시인들의 광기라는 점이 알려지기 전에는 그것이 단지 낙서라는 이름의 텍스트에 불과했듯이, 태초의 영화는 세계에서 잘려 나온 조각-텍스트에 불과했었다. 다르게 말하면 세계에서 존재자를 인식하는 방법이 깨어있는 소수 지식인에게만 열려있던 것을 대중에게도 열어준 게 바로 사진-영화이다. 그것들은 변화하는 세계에서 흐름을 포착해 먹기 좋게 평면 위에 올려두었다. 어떤 표현으로는 일상(Slice of life)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인간의 수명에 대응한다는 점에서, 영화란 삶의 일부를 잘라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묻지 않을 이유는 없다. 과연 우리의 일상에 상업적이거나 예술적이거나 하는 판단이 개입할 지점이 있을까. 이러한 맥락으로 영화와 우리를 동기화하면, 해석의 문제란 곧 삶의 태도와 연관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삶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태도이다. 그리고 이 삶에는 재미라고 할 만한 것이 딱히 없다. 재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재미라고 지칭할 수 있는 것의 개념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냉장고에서 푸딩을 꺼내어 먹는 게 재미일 수도 있고, 횡단보도에서 아무도 목격하지 않은 떨어진 지폐를 줍는 게 행복일 수도 있다. 어찌 됐든 이 모든 것이 결국에는 인식의 문제와 연관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즉 우리는 우리 삶의 지식인이다. 말 그대로 우리는 우리라는 세계-삶에 질문을 던지고 진리를 얻어내려 하는 지식인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와 영화가 연결되는 지점이 생겨난다. 잘살아보자고 말하는 몇몇 사람들의 강연을 곱씹으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세상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자 하는 욕구가 앞서게 된다. 이 욕구는 우리로 하여금 세계에서 행복을 창출해내라고 명령한다. 그 욕구는, 행복은 항상 있었고 단지 지나쳤을 뿐이라고 우리의 귀에 속삭인다. 그 달콤한 속삭임에 넘어간 우리는 삶의 모든 면을 잘라내어 텍스트로 만들고, 그것을 행복으로 만들려는 추상-조합게임을 시도하게 된다. 그런 시도를 통해 우리는 삶에서 행복을 새로이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삶을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삶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든다. 그렇게 우리의 세계는 이질적인 것이 되고, 그런 이질성을 다시금 받아들임으로써 세계는 완성된다.

문제는 영화가 삶에 직접 대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세계를 잘라낸 것에 불과하다. 즉 우리의 삶은 늘 변화하지만, 영화는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정지된 공간이다. 이 결정적인 차이점은 우리가 영화를 삶으로 여기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닌, 영화를 해석하는 방식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와 다르다는 점을 알려준다. 영화 속 세계가 우리 세계의 일부라는 점은, 그곳이 우리와 닮았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곳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예를 들면 우리는 우리 세계에서 살아가는 주체이자, 그곳을 해석하는 지식인이라는 이름의 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삶에서 해석의 문제란 곧 지배와 피지배라는 두 가지 영역에 발을 걸친 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해석의 문제란, 지배되는 것이면서도 지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런 지배의 주체가 단지 우리이기만 한 게 아니다. 쉽게 말해 영화는 우리의 타자인 동시에 우리의 일부이기도 하다.

 

2.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라는 세계에 우리를 이입시키는 것이자, 우리라는 세계에 영화를 편입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대목에 수전 손택의 말이 들어오게 된다. 나는 그런 수전 손택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그 말이 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전 손택은 지식인들이 영화라는 세계를 이 세계쯤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냐고 유머를 던졌지만, 이 유머는 사실 진담이다. 영화는 분명 이 세계다. 영화는 하나의 꿈으로서, 꿈 안에 있는 우리를 두고 이것이 꿈이라고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꿈이라는 게 곧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우리이면서도 우리가 아닌 어떤 세계이다. , 수전 손택의 말처럼 그것이 해석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게 해석된다는 말이 이세계로 번역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수전 손택의 실수는 해당 발언을 영화가 아닌, 세계에 해석의 문제를 적용했다는 점에 있다. 영화를 우리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볼 때 그녀의 발언은 타당하다. 허나, 영화와 우리를 동등한 자리에 놓을 때 그 발언은 성립되지 않는다. 영화와 우리는 세계 안에서 흘러가는 만물 중 일부이자 전부이다.

수전 손택이 스스로 공언한 것처럼, 그녀는 여러 분야에 재능이 많았지만 어느 한 자리에 머무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마 수전 손택의 발언은 그런 부분에서 기인했을 듯하다. 그녀는 영화를 인간 세계 안에 존재하는 예술의 후보자 중 하나로만 여겼다. (엄밀히 말해 그 글 자체가 영화만을 논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는 노자의 말이 동양적 사고를 잘 드러낸다고 가정할 때, 지식인들의 해석 작업이 세계를 이질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는 손택의 사고는 지식인이 아닌 인간 중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 삶의 지식인이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영화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서양에서 들어온 학문을 익힌 우리의 사고 때문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따지고 보면 이질적인 것은 텍스트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사실, 인간 중심으로 짜인 서양에서 손택의 그러한 한계는 딱히 이상할 것도 없다. 손택이 스스로 말했던 것 중에는 자신이 서양 사회에 속했다는 점 또한 있었다. 그러나 이건 손택만의 문제는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서양에서 기원한 학문을 받아들인 우리에게는 (서양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서양식의 사고를 하게 될 만한 이유가 있고, 그게 인간 중심의 사고라는 점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기서 인간 중심의 사고라 함은, 인간이 자연을 발굴해냈다는 식의 논리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연을 발굴해낸 게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이 논리는 우리가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 곧 삶을 대하는 태도와 같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 우리는 우리로서 우리를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사실 손택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은 지식인이 영화에 개입하게 된 시점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가 우리 삶에 개입하게 된 시점을 의미한다. 언제부터 영화는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을까. 다시 말해서, 영화가 담론의 형태로 재생산되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시점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추상적으로 말해보면 우리가 영화에 예의를 갖추기 시작할 때부터 일테다. 지식인이냐 대중이냐를 혹은 예술적이냐 상업적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영화를 담론의 영역으로 들여놓는 것은 그것이 텍스트가 아닌 삶의 일부일 수 있다고 여기는 태도의 전환이다. 수전 손택이 글의 말머리에 해석학이 아닌 성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바로 그 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영화를 대하는 태도는 타자가 아닌,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 말 그대로, 오직 사랑하는 자들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

이 대목이 시사 하는 바는 곧, 영화를 봄에 있어 해석하기 위해 영화를 보거나 영화를 보고 해석에 몰두하거나 하는 것은 그다지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에는 애초에 성질이 없기에 어떻게 다루든 개인의 자유다. 따라서 근래에 영화를 두고 벌어지는 여러 추상-조합 게임의 양태들은 영화의 무색무취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가 예술인지 상업인지에 관해서는, 그 누가 부여하고 정립한 개념도 아니다. 그것은 단지 세계의 파편일 뿐이다. 그리고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이다. 영화를 보면서 무언가를 느꼈다면 그 의미는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고, 영화를 보면서 법칙을 발견하고 싶어졌다면 그 해석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한 논설이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을 알고 싶어 한다. 그게 곧 서양사의 기둥이었다.


해당 문장에 지식인이라는 주어 대신 예술이라는 단어를 넣어야 한다. 이 방법을 따르면 이렇게 된다. “해석은 예술이 영화에 가하는 복수다.” 즉 영화가 예술이어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강박한 결과가 바로 그것이라는 말이다. 영화가 예술로 인정받는다는 게 곧 예술이라는 이름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지니기 위함이 아니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영화가 상업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 콤플렉스로 작용하여 예술로서의 인정욕을 갈구했던 건 아닐지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반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언제까지 우리는 태어난 곳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인가. 이 대목에서 수전의 방식대로 첨언하자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의미라는 그림자 세계를 세우기 위해 세계를 무력화시키고 고갈시키는 짓이다

이러한 결론은 양쪽 모두에 대한 비판이다. 예술은 의미라는 단어와 동의어가 아니다.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는 게 예술임을 증명하지도 않고, 의미를 찾아냈다고 해서 예술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만약 이게 해석이라면 그것은 우리의 한계를 보여주는 증표가 되어버린다. 말하자면, 영화를 보는 우리는 영화라는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라는 세계 안으로 회귀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취득해야 한다. 의미의 흐름이 아니라 바라보는 자신에게서 세상을 찾아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영화는 삶이 될 수 있다. 다르게 말하면 그런 삶을 타인과 비교하며 답을 맞혀보는 행위에는 별문제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그런 행위가 자기 위로의 도구로만 사용되는 행태에 비판을 가해야 한다. 영화를 해석한다는 게 자신을 해석하는 말과 동의어가 되는 이 시점에서, 그러한 해석이 자기 위로의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은 곧 나르시시즘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5.11 09:01 수정 2020.05.1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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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