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본다는 것의 의미

김선호




제의적 행위로서의 영화관람

 

본다는 것의 의미가 가벼워진 요즘에, 영화를 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손이 닿는 곳에 영화가 있다라는 말만 들으면 영화를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지만, 사실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렇다. 영화 한 편을 데이터 파일 형태로 저장해 두는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문득 그것들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파일 형태의 그것이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다른 이미지들이 우리 앞에 달려와 열렬히 구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아날로그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방법이 영화를 추억하기에는 더 적합해 보인다. 길을 가다가 문득 들린 영화관에서 발견한 영화의 새로움은, 인터넷에서 다운받은 영화를 발굴해내는 것보다 더한 기쁨을 준다. 회사에서 돌아와 소파에 앉던 와중 시선이 닿은 장식장 안의 DVD 자켓 하나는, 컴퓨터를 하려고 켜두었던 인터넷 속의 어느 파일보다 더 큰 지명성을 지닌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일차적으로 몸담은 곳이 아날로그 세상이기에, 디지털 세상은 언제나 2순위로 밀려나게 된다. (적어도 내 또래인 Z세대에서는 그렇다.) 결국 영화를 본다는 것에 있어 디지털 방식이 훨씬 편할지는 몰라도, 그 지명의 척도만큼은 아날로그를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영화관을 애용한다. 사람들은 영화가 데이터 파일화 되어 인터넷을 떠돈다는 점을 경계하지만, 오히려 영화는 여전히 극장 안을 떠돌고 있다. 넷플릭스와 같은 구독형 서비스가 눈앞에 영화를 데려다 놓더라도, VOD와 같은 저장형 서비스가 영화를 언제든 준비해 놓더라도,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방문하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이 대목에서 영화관에서만 최신 영화가 개봉하기 때문이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지만 전부 맞는 건 아니다. 오늘날의 영화관은 단지 영화라는 것을 보기위해서만 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화관이라는 공간을 체험하려고 영화관을 방문한다. 어두컴컴하고 넓은 암실이 집중하기에 편해서일 수도 있고, 사운드 시설이 잘되어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라는 영혼이 자리 잡을 곳이 영화가 상영되는 시공간 속이라는 이유가 크다. 즉 이것은 현장이라는 이름의 육신을 의미한다. 누구와 영화를 보러 가든 간에 그때 그 시간 그곳에서 영화를 보았다는 것, 영화를 보기 위해 떠나야 했던 이유와 영화를 보고 난 후에 받은 인상, 그것이 바로 영혼을 담은 영화의 육신이다.

영화에는 육신이 있다. 영화뿐만이 아니라 모든 매체에는 육신이 있다. 육신이 없다면 매체는 기억되지 않는다. 영혼이 몸담을 곳이 없다면 그 영혼은 하늘로 흩어져버리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화를 본 후에 대화를 나누는 건 영혼을 추모하는 행위이다. 더 나아가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영혼에 육신을 부여하는 창조적 행위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적 행위는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모니터 안으로만 이루어지는 디지털 행위의 종착지가 아날로그적 행위가 되지 않는다면, 쏟아지는 이미지의 향연 속에서 우리는 기억을 잃게 된다. 결국 이미지를 지명하는 것은 언제나 아날로그이다. 구체적인 시공간을 지니고 우리 곁으로 다가오는 그것들에 몸담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또한 아날로그적 행위이다.

그런 면에서 오늘날의 영화 관람이란 제의적 행위에 가깝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모습을 촬영하여 기록으로 남기고, 그것을 친구들과 공유한다. 이때 도드라지는 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았다는 현장감, 영화를 막 만날 예정이거나 만나고 난 후라는 현장감이다. 요컨대 이것은 벤야민의 아우라 개념과도 유사한 면이 있다. 벤야민은 미술관에 걸린 미술작품을 예시로 들면서,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모여 저 멀리 벽에 걸린 원본을 보는 시공간의 향취가 곧 아우라라고 말한 바가 있다. , 우리가 그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게 그런 아우라를 담으려는 시도이듯이, 영화관에서 사진을 찍는다는 건 영화의 아우라를 담으려는 시도인 것이다.

아우라라는 말이 성인들의 뒤에 비치는 후광에서 유래했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그 의미는 더 커지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영화관을 간다는 건 영화에서 유래한 후광을 포착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콘서트장에 가서 환희에 가득찬 열기에 몸을 태우듯이, 우리가 영화관에 가서 어둠 속 한 줄기 빛에 동화되는 것은 그런 신화로의 진입을 의미한다. 따라서 영화관에 간다는 것은, 아우라를 통해 구원받으려는 시도일 수도 있다.


이때 그 구원이란 두 가지 방향으로 작동한다. 우리가 영화를 구원할 수도 있고, 영화를 통해 구원받는 것일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말 그대로 우상 숭배로서의 영화다. 우리는 영혼의 상태로서 세상에 존재하던 영화가 가시화되는 것을 목격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영화관이라는 제단에 기도를 올리면, 영화는 스크린 위에 재림하게 된다. 우리가 스크린 위에 재림한 영화를 보면서 감정을 받거나 담론을 투입하는 것은, 세상을 떠돌던 신의 형상에 자신의 무의식을 투영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가 보는 이에 따라 무궁무진한 의미를 품을 수 있는 건, 구원이 필요한 순간에 재림하는 신의 존재와도 같다. 요컨대 구원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만 찾아온다. 영혼계를 떠돌던 구원을 현세로 불러내는 것이 영화관이라는 장소이다.

반면 디지털 시대에는 전자의 경우가 도드라진다. 우리는 영화를 구원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흔히 말하는 발견하는 기쁨이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우리 앞으로 도달하는 숱한 이미지 사이에서 벗어나 먼저 손을 내밀어야만 영화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이다. ‘손이 닿는 곳에 영화가 있지만, 그런 파도 사이에서 손을 허우적대야만 비로소 원하는 아우라를 붙잡을 수 있다. 그런 맥락으로 보면 영화를 본다는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디지털 시대의 우리에게 본다는 것은 곧 응시, 과거와는 달리 영화로부터 목격당하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먼저 시선을 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요컨대, 과거에 우리가 스크린 안에서 자신을 발견했다면, 요즘의 우리는 자신 안에서 스크린을 발견한다.


전통적인 영화 이론이 바뀌어 가는 과정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과거에는 영화 스크린을 거울에 비유하면서 관객이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는 장소가 곧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상상계라고 말했었다. 이 과정에서 영화관이라는 시공간은 실재계에 대응하게 된다. 하지만 현대에는 그런 식의 스크린 이론이 무너지면서 욕망의 주체를 스크린으로부터 관객의 내면으로 돌려놓게 된다. 즉 영화 관람의 주체가 비로소 관객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다르게 말하면, 영화를 보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현 상황에 울고 웃음을 교차할 수도 있다. 이미지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영화의 아우라를 붙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막연하게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종교적으로 보면 우리는 니체의 말대로 신의 죽음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우라를 풍기는 영화라는 신은 죽었다. 정확하게는 그 신의 육신이 죽어버렸고, 그런데 사실은 영화의 영혼이 이 세상에 여기저기 퍼져 있다는 게 니체의 맥락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가장 잔혹무도한 영화 살해자인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하고 우리는 묻게 된다. 물론 여기서 신 살해는 우리가 원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이미지라는 이름의 종교가 넘실대는 디지털 시대에는 이미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생겨나고 나누어지는 것들이 많다. 문제는 이때 우리가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된다는 점이다. 만연하는 이미지 속에서 우리는 본다는 행위가 사라졌다고 여기게 되고,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가 모니터 안에서 보는 것들은 죽은 채로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에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다. 영화관에 가는 행위는 그런 사실의 실질적인 실천에 해당한다.

 

규정되지 않는 자유와 불안

 

인류의 역사 이래로, 어딘가를 응시한다는 맥락에서의 보는 행위가 이토록 넘쳐나던 시기는 없었다. 요즘은 어디를 가도 피응시 대상으로 존재하는 이미지들의 군집을 목격하게 된다. 쉽게 말해 눈만 돌리면 이미지가 있다. 반대로 그런 이미지로부터 도망가기도 쉽지가 않다. 언제부턴가 이미지는 이미 우리의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존재하는 것이 매체의 층위라고 가정할 때, 우리 자신이 하나의 매체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세상은 매체 자체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보아달라고 유혹하는 듯한 그 이미지들이 상업적인 의도 (혹은 산업적인 의도)로 발원했다고 착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아니다. 단지 이미지는 주체에 조금 더 다가서고 싶어 할 뿐이다.


디지털이라면 아날로그를 선행으로 요구한다. 영혼이라면 육신에 깃들고 싶어한다. 현대 사회의 이미지에 기호가 깃들어 있는 것은 그런 점에 연유한다. 롤랑 바르트가 예시로 든 판자니 파스타 광고에서부터, 에디 에덤스가 촬영한 <사이공식 처형>까지, 허공을 떠도는 영혼은 늘 육신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걸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기의는 기표를 찾아 헤맨다고, 그렇다면 그런 영혼과 육신의 조합은 곧 기호가 됨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기호가 다시금 기의가 깃들 수 있는 육신이 되어 이미지의 중첩은 이어지게 된다. 물론 이미지가 한 곳으로만 응집되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다. 영화의 영혼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하나의 기호가 될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은 곧 이미지 혹은 이미지의 재생산을 담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곧 이미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곧 매체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영화를 본다는 행위가 꼭 영화관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이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신이 받아들인 신의 형상을 타인에게 전파하는 것과도 같다. 즉 우리가 스크린을 떠도는 영화를 구원하는 과정에서 그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빚어낸 형상으로 변모한다. 어떤 면에서 이것은 우리 자신이 곧 신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미지가 범람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신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창조해낼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런 흐름 속에서 공공연하게 저항할 능력을 획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우리는 영화관이라는 동굴로의 모험을 떠나 스크린이라는 이름의 스틱스 강을 건너게 되는 셈이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이미지 시대에서 불멸할 방법을 찾는다고도 볼 수 있겠다.


디지털 시대라는 것을 왼쪽에 두고, 영화를 본다는 것을 오른쪽에 둔다면, 우리는 굳이 볼 것도 많은데 영화를 보아야 할 이유에 대해 묻게 된다. 정확하게는 영화관을 방문하는 작업이다. 눈만 돌리면 이미지가 소환되는 시대, 손만 까딱하면 이미지가 오는 시대에서 영화관을 방문한다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제의적인 의미 밖에는 남지 않은 듯 보인다. 하지만 오히려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영화를 보아야 할 이유는 그것에 있다. 플라톤의 동굴이 이미지를 신화화하는 작업은 더는 우리를 종속시키지 못한다. 이 대목에서 이데아의 성스러움은 사실상 해체 순서를 밟는다. 디지털 시대에 이미지라는 것은 진리라는 이름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이미지는 곧 매체이며, 매체는 곧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인생은 영화다(la vita e bella)’라는 공식은 그런 흐름으로 성립된다. , 우리는 우리 자신을 향해 기도한다.


여기서 기도라는 것의 뜻을 굳이 어렵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말 그대로의 기도가 행해지고 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이 두 가지 관계가 현실과 영화에 대입된다고 가정하면 구원의 대상은 어느 한쪽에만 치중되지 않는다. 예컨대, 현실을 말하는 영화와 영화 같은 현실이 있다면 그 주어와 술어의 관계는 얼기설기 얽혀 버리게 된다. 그리고 분명, 이 논리적 흐름 자체에 사람들이 품는 불만이나 우려는 지극히 당연한 것들이다. 말도 안 되는 현상이 어느 쪽에나 벌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때 사람들은 대체로 이미지에서 현실 세계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이미지의 문제가 곧 현실 세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경우도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런 양자의 경우 모두가 속 시원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실마리가 동아줄의 형태로 남아있기만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고 믿고, 그래서 분노하는 모습은 이제는 흔한 것이 되어 버렸다.


규정되지 않는 형태에 대한 물음은, 자유가 아닌 끝없는 불안만을 자아낸다. 말 그대로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는 것이다. 그 결과로 우리는 이미지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이미지로 넘쳐나는 세상이 이미지로 이루어진 세상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이미지의 기시감은 우리를 피로하게 한다. 이 기시감은 형태 없이 맥락으로 이어지는 것들에 대한 목격담이다. 즉 이데아가 사라진 세상에는 영혼의 형태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버렸고, 육체를 잃은 영혼들이 육체를 탈환하기 위해 가하는 맹렬한 것들이 우리를 상처 입힌다. 왜냐하면 현대 사회의 이미지가 모든 면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 또한 그 범주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그런 영혼의 모습에 동정을 보내며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할 수도 있다. 이데아를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그건 이미 예술이 아니고, 이 경우에는 오히려 우리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들도 우리에 가까워졌고, 우리도 그들에 가까워진 게 그 이유이다.

그래서 이제는, 영화를 통해 우리 자신을 보는 게 아니다. 우리가 곧 영화가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허나 이것은 융합이 아니다. 변환이라는 표현도 합당치 않다. 이미지의 시대에 떠도는 영혼이 여러 육신을 거친다고 보아야 한다. 그 영혼들이 육신에 머무는 순간 그들이 머물던 육신에는 모든 동기화가 이루어진다. 이 동기화는 공감이나 이해보다는 더 근원적인 부분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영혼의 끌림이라는 것은 그런 점을 의미한다. 지금의 우리가 같은 줄기를 보고 있다는 믿음이 육체 없음의 불안감을 상쇄하고 강한 믿음을 끌어낸다. 이런 흐름은 면--점의 형태로 분쇄되는 현대 사회의 불안감 속에서도 우리가 점조직의 형태로 그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증명한다. 그림의 혁명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고 볼 수 있을 테다. 디지털 시대의 그림, 그런 것들을 본다는 건 지금의 우리를 전통적인 것들에게서 벗어나 이미지의 바다로 뛰어들 수 있게 해준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5.16 11:26 수정 2020.05.16 11:34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편집부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