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요행(僥倖)의 요술(妖術)

이태상

 



요즘 코로나바이러스 팬데믹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안감에서일까, 우리 모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한 가지 개념에 매달리게 되는가 보다. 이 개념을 대표하는 것으로 요행(僥倖), 영어로는 세런디피티(serendipity)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몇 년 전 런던에서 시행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영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단어로 serendipit가 뽑혔다. 예수와 돈이라는 단어는 공동 10위였다.

 

19년 전(2001) 개봉한 미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 세렌디피티 (Serendipity)’는 피터 첼섬(Peter Chelsom) 감독, 존 쿠삭(John Cusack), 케이트 베킨세일(Kate Beckinsale) 주연으로 뉴욕에 있는 고급 백화점 블루밍데일에서 크리스마스 선물 쇼핑 중 필연인지 우연인지 간의 요행으로 만난 두 남녀의 운명적인 로맨스 러브스토리이다. 두 사람은 각기 이미 애인이 있는 처지였는데.

 

, 그럼, 이 단어의 뜻과 그 유래를 좀 살펴보리라.

 

세런딮의 세 공주(Three Princesses of Serendip)’에 나오는 이야기로 저 인도양에 있는 섬나라 실론(Ceylon, 1972Sri Lanka로 개칭됨)으로부터 세 공주가 이상한 나라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낙타를 찾고 있는 남자를 만났다.

 

오는 길에 낙타를 보진 못했지만 그들은 낙타의 주인 남자에게 물었다. 찾고 있는 낙타가 한쪽 눈이 멀지 않았느냐고, 이가 하나 빠져있지 않느냐고, 다리를 절지 않느냐고. 놀랍게도 대답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다 사실이라고. 그러자 그 낙타가 등 한쪽에는 버터를, 다른 한쪽에는 꿀을 짊어지고 있을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한 여인이 그 낙타를 타고 있는데 그 여인은 애를 밴 상태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확히 알아맞히는 것을 보고 낙타 주인이 이 공주들을 자기 낙타를 훔친 도둑으로 몰자 자신들은 단지 길을 주시하면서 길 양옆으로 고르지 않게 풀을 뜯어먹은 흔적과 풀을 씹다가 흘린 장소며 낙타의 발자국 모양과 불편한 자세로 낙타를 타고 내린 동작이며 개미와 파리 떼들이 몰린 방향을 감지했을 뿐이라고 그들은 대답했다.

 

이 민속동화에서 하나의 대단한 개념이 싹텄다고 미국 프린스톤 대 출판부에서 2004년 출간된 로버트 킹 머튼(Robert King Merton)과 엘리노 바버(Elinor G Barber) 공저의 세런디피티의 여정과 모험(The Travels and Adventures of Serendipity: A Study in Sociological Semantics and the Sociology of Science)’은 밝히고 있다.

 

실론의 고대 이름이 세런딮(Serendip)이고 앞에 언급된 동화 세런딮의 세 공주(Three Princesses of Serendip)’가 영국의 문인 호레이스 월포울(Horace Walpole 1717-1797)에 의해 서구사회에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가 1754년 이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세런디피티 (serendipity)’라는 대단히 의미심장한 단어를 만들어 쓰게 되었노라고 적었다. 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이 말의 뜻은 동화 속의 공주들이 찾지도 않았던 사실을 우연히 발견한 방법을 의미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 세런디피티란 영리(怜俐)한 우연이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이 단어의 오해, 무시, 부활, 왜곡, 찬사, 논쟁 등으로 점철된 전설 같은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이 책의 저자는 흥미진진하고 재치 있게 많은 사례를 들어가면서 세런디피티의 유래를 추적하고 그 미래를 점치고 있다.

 

우연한 발견이 과학에 있어서도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물리학자 빌핼름 뢴트겐 (Wilhelm Ro”ntgen 1845-1923)은 우연히 사진판에 나타난 현상을 보고 X-rays를 발견했고, 알렉산더 플레밍(Alexander Fleming1881-1955)은 배양된 곰팡이를 보고 페니실린(Penicillin)을 발명하게 되었다고. 그러니 실험실이나 제약회사 등도 우연한 발견을 위해 많은 여지를 남겨둘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것이 어디 과학에 한해서뿐이랴. 우리 삶 전반에 걸쳐 이 요행이란 요소는 예외적이라기보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필수, 필연적인 것으로 순간순간 우리가 발견, 감사히 누릴 수밖에 없는 것이리라.

 

우리가 흔히 요행(僥倖)’이라 하면 막연히 바라거나 뜻밖에 얻는 행복을 말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찾지 않던 행운을 우연히 발견하는 요술(妖術)을 우리가 개발할 수 없을까. 벌써 몇 십년 째 이런 의문을 품고 그 답을 찾아 연구해온 학자가 있다.

 

크로아티아(Croatia) 출신 미국 시몬즈 대학(Simmons University)의 정보 과학자 샌다 에르델레즈(Sanda Erdelez, Ph.D, the Director of the Simmons School of Library and Information Science)박사이다.

 

그녀는 1980년대 풀부라이트(Fulbright U.S. Scholar Program) 장학생으로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세런디피티(serendipity)’란 영어 단어를 접했다. 크로아티어에는 이처럼 기대하지 않았던 예상 밖의 행운을 발견하는 스릴을 표현할 말이 없다고 한다.

 

1754년 처음 사용되기 시작한 이 단어는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듯 우연히 굴러떨어진 행운이란 뜻이 아니고 하나의 특별한 재주나 기술 또는 기능을 의미했다는 걸 알게 된 그녀에게는 그럼 우리가 어떻게 이 재능을 계발할 수 있을까가 지대한 관심사가 되었다. 이 세런디피티는 의식하든 안 하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일이라고 보고, 그녀는 1990년대부터 연구 대상으로 100명을 선별해서 어떻게 그들이 자신의 세런디피티를 만드는데 성공했는지 아니면 실패했는지를 연구 조사해 왔다.

 

그녀가 관찰한 바로는 조사 대상자들이 세 그룹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는 비접촉자들(non-encounterers)’로 어떤 정보를 찾아 수집할 때 자신들의 조사 목록에만 주목하고 난외 여백으로 전혀 눈을 돌리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 그룹은 때때로 세런디피티를 접하게 되는 수시접촉자들(occasional encounterers)’ 이며, 세 번째 그룹은 남이 거들떠보지 않는 곳에서 보물을 찾는 사람들로 매사에 열린 눈과 머리 그리고 마음을 갖고 호기심에 찬 사람들인데, 이런 사람들을 그녀는 초접촉자들(super-encounterers)’이라고 부른다. 이런 초접촉자들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개의 안테나를 가진 것처럼 남들이 못 보는 걸 발견할 수 있는 특별한 감지력과 인지능력의 소유자들이란다.

 

인류 역사를 통해 발견된 수많은 진리와 발명품들이 우연한 행운이 가져다준 게 아니고 인간정신 과 인간혼의 산물이라고 많은 과학자들이 동의한다. 사람들이 미지의 세계를 탐색할 때 극히 창조적인 작업을 하게 되고, 한 발명가가 발견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란 말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자유 재즈(free jazz)’ 방식을 선호한다. 예술이든 학문이든 어떤 기존의 방식과 틀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그때그때 즉석에서 즉흥적으로 대응하고 임한다는 얘기다.

 

유럽의 특허권 소지자 발명가들을 조사한 서베이(survey)를 보면, 특허품 50%가 일종의 세런디피티 적인 과정 (serendipitous process)을 통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노벨상 수상자들도 수많은 우연과 접촉의 연결고리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에 바를 규칙 정도도 올바른 길 정도(正道)도 없으려니와 오로지 자신의 요행(僥倖)을 만들어 찾는 요술(妖術)을 익혀야 하리라.

 

나 자신을 포함해 우주 만물이 모두 다 요행의 산물이 아닌가. 이 세상에 태어나 존재한다는 것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순간순간이 요행이 아니고 무엇이랴.

 

몇 년 전부터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된 헬조선이란 단어가 자신들이 태어나 살고있는 대한민국이 지옥과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그 후로 이번 생은 망했다의 줄임말인 이생망이 유행이라고 한다.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휘청거렸던 한국 경제, 60년대 많은 국민이 겪은 보릿고개, 6.25로 잿더미가 되었던 50년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와 일제의 수탈, 그리고 18, 19세기에 탐관오리의 학정에 시달려야 했던 우리 조상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휴전선 바로 위에 있는 진짜 헬조선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주민들인 우리 북한 동포들을 잠시라도 생각해 본다면 어찌 이토록 자포자기하는 절망적 발상의 망발이 있을 수 있을까.

 

얼마 전부터 미국에선 디자인 사고(design thinking)’란 단어가 조명을 받아오고 있다. 과학자들의 연구 조사로 판명된 바로는 수많은 신제품과 성공적인 기업들이 디자인 사고의 결과물이란 것이다.

 

스탠포드대학의 저명한 엔지니어링 교수로 성취 습성(The Achievement Habit: Stop Wishing, Start Doing, and Take Command of Your Life, 2015)’의 저자인 버나드 로스(Bernard Roth, Ph.D)박사는 이 디자인 사고가 무엇이든 어떤 문제도 풀고, 어떤 목적도 달성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역설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면 현재의 자신과 전혀 다른 새로운 너(a Whole New You)’를 이 디자인 사고로 개발할 수 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이것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아닌가. 정말 참으로 말이 씨가 되는 법이다. 우리 젊은이들이 말부터 바로 잡아 써야 할 것이다. ‘(Hell)’헤븐(Heaven)’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그런 긍정적인 도전정신이 나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긍정의 힘은 부정의 힘보다 훨씬 크고 아름답기때문에 흥분과 기쁨과 스릴을 맛볼 수 있을 테니까. 현실을 어떻게 보고 대응하는가에 따라 똑같은 현실이 ()’가 되기도 하고, ‘()’이 되기도 하지 않던가.

 

그 한 예로,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마쓰시다 고노스께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세 가지 유리한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 첫째는 집안이 가난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많은 돈을 벌었다. 둘째는 학교를 다니지 못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됐다. 셋째는 몸이 약해 부지런히 운동해야 했고 그 결과 몸도 건강해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창궐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곧 진정되고 끝나더라도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고 불확실성이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내다보면서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지만, 이 불확실성이 언제 어디서나 삶의 정석이 아니었던가.

 

이 예측불허야말로 삶의 묘미가 아니랴.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소설책을 읽거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할 때도 우리가 그 스토리나 경기의 결과를 미리 안다면 그 무슨 재미가 있겠으며, 김이 팍 새는 일 아니랴.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기독교 신학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예정설이 있는데, 이는 인간 개개인의 구원은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신()의 의지로 미리 정해져 있다는 교리다. 그런 신학적(神學的)인 교리는 그렇다고 논외로 하고, 우리 순전히 인학적(人學的)’으로 좀 살펴보자.

 

해마다 신년 연초가 되면 사람들이 토정비결이나 일 년 신수를 보며 평생 사주팔자가 궁금해 역술가나 점쟁이를 찾지만, 내일 일을 모르게 망정이지 사전에 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얼마나 싱겁고 지겹고 지루한 일이겠는가. 내일을 모르는 것이 긴장감 있게 스릴만점으로 행복한 게 아니랴.

 

오늘에 충실하고 내일이라는 여백을 남겨두는 편이 훨씬 더 살 맛과 살 멋이 있으리라. 어디 또 그뿐이랴. 사람도 세상도 애초부터 완전무결하다면, ()처럼 완벽하고 천국처럼 더 바랄 게 없는 지경이라면, 그야말로 무미건조하고 매력이라곤 털끝만 치도 없는 로봇 같은 인간일 테고, 그런 천국이 바로 생지옥이 아닐까.

 

부족함이 있기에 채움이, 내리막이 있기에 오르막이, 어둠이 있기에 빛이, 죽음이 있기에 삶이, 배설을 할 수 있기에 먹을 수 있고, 숨을 내쉴 수 있기에 들이쉴 수 있으며, 줘야 받을 수 있고, 떨어져야 그리움이 싹트며, 떠나와야 고향이 생기지 않던가. 그러니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생망은 이번 생은 흥했다는 이생흥이 되지 않겠는가.

 

최근 미국에서 삶을 막살기 시작할 나이 37세에 폐암으로 사망한 신경외과 전문의 폴 카라니티(Dr. Paul Kalanithi 1977-2015)22개월 동안 투병 중에 힘들게 집필한 원고가 그의 사후에 숨이 공기로 변할 때(When Breath Becomes Air, 2016)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구도자의 집념으로 스탠퍼드 대학에서 두 개의 학사와 문학 석사 학위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철학 석사를 받은 후 예일 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해 유능한 신경외과 전문의가 된 20135월 그는 불치의 시한부 암 선고를 받게 된다. 칼라니티 박사의 스토리가 너무도 안타깝고 애처로운 것은 일편단심 신경외과 전문의의 경력을 추구하는 동안 그는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배우는 일을 미루어 왔는데, 그의 목표를 달성하는 순간, 그는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워야 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대단한 인기를 끈 노래가 백세인생이었다. 이 히트곡은 김종완이 가사와 멜로디를 직접 써 25년 동안 무명으로 살았던 트로트 가수 이애란의 인생을 바꿔놨다고 했다. 한 인터뷰에서 백세인생뒤 그가 내놓을 신곡은 어떤 곡일까라는 물음에 김종완은 이렇게 대답했다.

 

사람들이 백세인생150세가 돼선 죽는걸로 해석하는데 노랫말 속 극락세계는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란 뜻도 있다. 그래서 저승으로 넘어갔다 다시 이승으로 건너오는 환생의 이야기를 다뤄볼까 생각 중이라며 그는 웃었단다.

 

어제가 전생이고 오늘이 이승이며 내일이 저승이라면, 우리는 오늘을 어찌 살아야 할까. 어제의 꿈이 오늘의 현실이고 오늘의 삶이 내일의 환생이라면, 작곡가 김종완 씨 말대로 오늘의 삶을 인생의 최고의 순간으로 만들어 순간순간 극락세계를 누려 보리라.

 

바라건대, 김종완 씨가 백세인생에 이어 내놓을 신곡은 모름지기 환생했다 전해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몸 안에서도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나 환생이 평생토록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계속해서 헌 세포는 없어지고 새 세포가 생기는 일 말이다. 그러니 상상이 현실이 되게 하려면 한시바삐 꿈꾸기를 멈추고 모험적인 행동의 삶을 살기 시작하는 수밖에 없으리.

 

이것이 다름 아닌 요행(僥倖)의 요술(妖術)’이 되리라.

요행 만세! 요행의 요술 만만세를 부르리!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5.21 08:27 수정 2020.05.22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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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