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연인산 평원 느티나무 아래에 서면 연인의 속삭임이 들린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5.22 11:38 수정 2020.05.22 11:54


연둣빛 신록이 가득한 계절의 여왕 5, 완연한 초록으로 물들어가는 이토록 싱그럽고 푸르른 계절에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지 않은가. 이왕이면 우리나라에서 산 이름이 가장 예쁜 가평의 연인산을 향해 길을 나선다. 초록빛깔 머금은 향기로운 잣나무 숲길에서 영화 연인의 여주인공 제인 마치를 닮은 가련하고도 청초한 진분홍빛 철쭉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연인산은 어디에서 출발해도 잣나무 숲을 지나야 능선에 오를 수 있다.



연인산은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2시간 이내 거리이면서 아름다운 비경과 명소들을 품고 있는 산이다. 특히 철쭉이 만개하는 4월 말에서 5월 사이에 등산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다. 이 산은 원래 명지산 가운데 우목봉으로 불리던 잘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였는데, 가평군이 지명을 공모하여 1999년에 "사랑이 이루어지는 곳" 이란 의미로 산 이름을 연인산(戀人山)으로 바꾸게 되면서 이 산은 단연 유명세를 타게 된다.


산오름은 주능선 동쪽의 백둔리와 승안리, 서쪽의 상판리와 마일리에서 오르내리는 코스가 있다. 이 중에서 주능선 동쪽의 백둔리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해 소망능선을 거쳐 정상에 올랐다가 장수능선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가장 많이 선호한다. 개인 차량으로 이동하는 경우 백둔리 주차장이 넓고 무료인데다 정상까지 3.2km로 다른 코스에 비해 가장 짧을 뿐 아니라 원점회귀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산행 들머리 백둔리는 명지산과 연인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고, 자연체험학교와 펜션들이 들어서 있는 정겨운 오지마을이다. 동리이름 백둔(栢屯)잣나무가 많은 계곡이라는 뜻으로 이곳 사람들은 잣둔이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백둔리에는 잣나무가 많다.

 

백둔리 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산 쪽으로 난 소망능선 등산로를 따라 산오름을 시작한다. 어느 곳에서 산행을 시작하든 만만치 않은 오르막이 초반부터 가쁜 숨을 몰아쉬게 하고 잡념조차 사라지게 만든다. 빼곡한 잣나무 사이로 난 숲길은 오롯이 능선으로 향하고 참나무, 잣나무 군락지가 편안한 느낌을 준다. 육산이라 발을 내디딜 때마다 푹신푹신한 길의 촉감이 발바닥을 타고 전해오고, 잣나무 향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며 초반과 달리 이제는 주위도 둘러보면서 산행을 계속한다.


원시림 사이 작은 오솔길은 이리저리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다.

 


산 중턱에 이르자 잣나무와 신갈나무, 구상나무가 번갈아 만들어 내는 숲길에 운무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진초록 이끼를 두른 참나무 고목들이 더러는 가지를 뒤틀고 더러는 누워서 자라고 있는 원시림에 밀려든 운무는 초록 숲의 농도를 더 짙게 만든다. 백둔리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이 지나서야 안개 자욱한 소망능선에 올라선다.

 

소망능선과 장수능선, 정상으로 갈라지는 능선의 분기점

 


 

정상을 향해 능선을 따라 이어진 길섶은 촉촉한 습기와 이끼로 가득하고 물기를 머금은 청량한 야생화들은 고개를 들어 산객을 반긴다. 여기서 정상까지는 30분 남짓의 촉촉한 숲길. 그 길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걷는다. 운무로 가득한 숲속의 대기는 더없이 상쾌하고, 진초록 이끼를 두르고 활개를 치듯 서있는 아름드리 잣나무와 가지를 사방으로 거침없이 뻗치고 있는 구상나무는 숲을 고상하고 신령스럽게 만든다.


정상가는 숲길의 구상나무 군락지에서는 금방이라도 숲의 정령(精靈)이 나타날 것 같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완만한 내리막을 따라 널따란 초원지대가 있는 '아홉마지기'로 내려선다. 얼레지와 철쭉 군락지로 유명한 이곳은 숯을 굽는 청년 길수와 참판댁 여종 소정의 애틋한 사랑이 서려 있는 곳이다. 이 두 사람의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이 봄마다 연분홍 철쭉과 얼레지 꽃으로 피어나서 아홉 마지기 넓은 평원을 진분홍빛으로 물들여 무릉도원의 선경을 연출하지만 오늘 아홉마지기 평원은 말 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안개가 내려앉은 한적한 초원의 벤치에 앉아 귀 기울이면 바람소리와 새소리에 실려 두 연인의 속삭임도 들려온다.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 앉으면

그리움을 키우는 속삭임이 들리어온다

 

못다 이룬 연인의 슬픈 사랑은

5월의 아홉마지기에 단아한 철쭉꽃으로 피어난다

 


아홉마지기 평원의 느티나무 아래 벤치에 앉으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아홉마지기에서 정상을 향해 오른다. 그런데 거짓말 같이 안개와 비구름이 걷히면서 산정이 맑아진다. 연인산 하늘은 바다보다 더 파랗다. 이어서 가슴 설레는 풍경이 펼쳐진다.


아홉마지기에서 정상 오르는 길

 


산 정상의 4방위를 표시한 반석 위에 올라서자 사방의 조망이 막힘없이 시원한 파노라마 경치가 펼쳐진다. 북으로 아재비 고개위로 이 산의 모산인 명지산이 귀목봉과 함께 시야에 와 닿고 명지산에서 오른쪽으로는 백둔봉 뒤로 화악산, 동으로는 장수능선과 노적봉, 남으로는 칼봉과 용추구곡, 남쪽으로 운악산이, 서쪽 아래로는 조종천이 흐르는 상판리 건너 청계산 줄기가 성곽처럼 마주 보인다. 싱그러운 하늘은 더 없이 푸르러 저 멀리 보이는 산들은 마치 바다 위에 뜬 섬 같다.


옛날 정상석은 "사랑과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 이라는 문구가 새겨진 하트 모양이었는데, 새 것은 몸집만 크다.

 

연인산이 여성스런 부드러운 산세라면 앞에 보이는 명지산은 남성적인 힘의 산이다.



경기도 알프스인 가평군 북면 일대에는 명산들이 군웅할거하고 있다. 연인산에서 뻗은 각 능선에는 우정, 연인, 소망, 장수, 청풍 등의 예쁜 이름을 붙였다. 실제로 아재비고개를 경계로 명지산과 마주보고 있는 연인산은 마치 명지산의 연인같고 산세 또한 여인의 속살처럼 부드러워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연인산 아래에는 10의 장쾌하고도 멋진 계곡인 용추구곡이 있는데,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며 아홉구비의 그림 같은 경치를 수놓았다는 유래를 간직한 이 계곡을 부드럽고 완만한 연인산의 지능선들이 감싸고 있다.


우정능선 오른쪽으로 운악산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정상 주위에는 점점이 울긋불긋 피어있는 철쭉의 모습이 자주 보이기 시작한다. 며칠 전에 내린 비와 철쭉이 지기 시작하는 시기가 맞물려 군락을 이룬 화려한 자태는 볼 수 없지만, 정상에서 장수능선으로 이어지는 임도처럼 넓은 초원길 주위에는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듯 마지막 아름다움을 불사르고 있다. 이른 봄에서 가을까지 이 능선을 따라 걷노라면 형형색색의 야생화를 만나볼 수 있다.


정상에서 소망능선으로 내려서는 초록 숲길은 녹음방초(綠陰芳草)의 세상이 가까이 있음을 예고한다.



숲속은 고사리 같은 양치류들이 그득하다. 서어나무, 층층나무, 까치박달, 가래나무, 물푸레나무.... 만나는 나무들과 눈을 맞추면서 걷다보니 신갈나무가 점령한 숲이 나타나 시선이 닿는 저 끝까지 뻗어 있다. 이런 고목들은 강원도 백두대간 구간에서도 만나기 쉽지 않다. 소망능선을 지나 장수능선에 들어서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등로 주위의 만개한 철쭉은 우중에서 화려함이 더 빛나고, 잎새마다 푸르름으로 더해가는 신록 숲은 산길을 걷는 이에게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와 생동감을 준다.


'사랑의 기쁨'이 꽃말인 철쭉은 산 이름과 너무 어울리는 꽃이다.



장수봉을 지나 장수능선이 끝나가는 능선에 백둔리 주차장과 장수고개로 분기되는 이정표가 나온다. 원래는 장수고개로 가서 임도를 따라 잣나무 군락지를 들렀다가 백둔리 주차장으로 올라가기로 하였으나 빗줄기가 더 세어져 백둔리 주차장으로 바로 하산하기로 한다. 이 길은 짧지만 험한 것이 흠이다.

 

장수능선에서 장수고개와 백둔리로 갈라지는 지능선. 비 때문에 신록 이파리의 색감이 너무 강렬해져서 눈이 시릴 정도다.

 

 

능선에서 내려서자 똑바르게 선 거대한 잣나무 숲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태고의 순수함이 그대로 살아있는 잣나무 숲은 정적에 잠겨있고 거짓말처럼 시간이 멈춰있다. 도인처럼 명상에 잠긴 숲 가운데는 마치 다른 시공간에 온 듯 깊고 진중한 평화가 감돈다. 장시간 산행으로 땀과 비에 젖은 몸의 열기가 가라앉고 지친 마음은 이내 차분해진다. 이 숲에서 잠들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것 같은 가벼운 두려움이 밀려온다. 로프를 잡고 조심조심 한참을 내려오니 드디어 숲이 끝난다. 숲이 끝나자 길이 순해지면서 비도 그친다. 짧게 누린 깊은 평화가 끝나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 부드러운 산길 끝에 만나는 백둔리의 작은 계곡 물소리에 산행의 노곤함은 금새 사라진다.



부드러운 흙길 끝에 만난 백둔 계곡 물소리가 봄기운 알려준다.

 


운무 가득한 숲속의 능선을 헤치고 올라서니 가을 하늘처럼 맑고 청명했던 산정, 하산 길 깊은 숲속을 드세게 파고들던 빗줄기. 오늘 약 7km 산길을 4시간 동안 걸으면서 기상의 변화무쌍함을 피부로 실감한 하루였다. 그러나 육산의 부드러움이 발바닥을 통해 기분 좋은 감촉으로 전해오는 호젓한 잣나무 숲을 지나서 조팝나무, 피나물, 붓꽃, 노랑제비꽃, 얼레지, 현호색, 금낭화, 둥굴레, 홀아비바람꽃, 질경이 등 형형색색 야생화로 치장한 능선 길이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속을 아릿하게 만드는지 걸어본 사람만이 안다.


봄 속에 있어도 봄을 찾지 않는 이에게는 봄은 내내 오지 않는 계절일 뿐이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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