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임진왜란 전적지 답사

팔천고혼이 잠든 탄금대

출처 = 위키백과



​임진왜란 개전초 조선과 일본의 정규군이 최대규모로 맞붙은 전투가 충주 탄금대 전투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1만 8천 700명은 부산진성과 동래성, 대대포성을 함락하고, 밀양과 대구 상주를 거쳐 4월 28일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의 단월역(현 건국대 캠퍼스)까지 진출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내려보냈으나 상주전투에서 패했고, 이어서 신립을 도순변사로 임명하여 8천여 명의 병력을 모아 4월 26일 충주로 내려보냈다. 신립은 북변에서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진압한 조선 최고의 명장이었다. 현장에 도착한 신립은 종사관 김여물이 험한 관문인 조령을 지키자고 제안했지만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장기인 기병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넓은 개활지를 찾았다.


신립은 말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으로 고니시의 보병 부대를 전격적으로 쓸어버린다는 계획으로 남한강 지류인 달천과 충주천 사이의 달천평야에 학익진을 펼쳤다. 고니시 부대는 이미 조령을 넘어 선봉을 내세워 신립의 기병부대를 향하여 진격해 오고 있었다. 


고니시는 즉시 군을 나누어 자신의 본대는 중앙을 맡아 계속 진군하였고, 소 요시토시의 좌군은 달천 강변을 따라 서쪽으로, 마츠우라 시게노부의 우군은 산자락을 타고 동쪽의 충주천 쪽으로 조심스럽게 이동시켰다. 또한 아리마 하루노부 등이 이끄는 예비대를 편성해 뒤따르게 했다.


28일 신립은 기병 1천명으로 1차 돌격을 감행하여 적 선봉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고 적은 단월역 쪽으로 일시 물러나는 듯 했다. 전열을 정비한 신립의 기병부대가 적진으로 2차 돌격을 감행하자 좌우에서 나타난 조총부대가 장창밀집부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3조 연속사격 방식으로 공격해 왔다. 상당한 피해를 입고 남한강변의 탄금대 쪽으로 밀려난 신립 부대는 3차돌격을 감행했으나 지세가 좁고 전날 비가 내려 논밭의 구렁텅이에 빠진 말들이 기동하기 어려워 점차 궤멸되기 시작했다. 

 

이때 여차하면 충주성으로 후퇴하여 성 안에서 방어전을 펼칠 수도 있었는데, 3차 돌격을 감행할 즈음 적 예비대가 충주성을 손쉽게 접수해버린 상황이었다. 이때 성 안에는 조선군은 없었고 일반 백성들만 희생되었다.




신립은 탄금대로 후퇴하여 종사관 김여물 등과 함께 끝까지 싸웠으나 남한강 배수진의 퇴로가 없는 상황에서 중과부적으로 8,000명 전원이 전사했다. 신립과 김여물은 마지막 순간까지 적과 싸우다가 남한강에 투신 자결했다. 믿었던 신립이 탄금대에서 패했다는 소식에 조선 조정은 충격과 공포에 휩하여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몽진 길에 올랐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짚어볼 것이 있다. 왜 신립은 천혜의 요새인 조령을 지키지 않고 남한강변의 달천평야를 택했을까. 혹자는 말한다. 만약 조령을 막았다 해도 왜군은 이화령이나 죽령을 넘어왔을 것이라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명나라 이여송이 이후 문경새재와 고모산성 일대를 둘러보고 이곳을 지키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신립과 고니시가 맞붙은 것은 전형적인 기병부대와 보병부대의 일전이었다. 기병은 요즘으로 치면 기갑부대에 해당한다. 기병부대가 힘을 발휘하려면 넓은 개활지가 있어야 하고 보병과 함께 합동작전을 펼쳐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신립이 택한 달천평야는 달천과 충주천 사이의 협소한 곳으로 마음놓고 기병부대를 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거기에다 후속 지원 보병이 따라주지 못하여 기병은 힘을 쓸 수 없었다.


반면에 고니시 부대는 신립 기병부대를 깊숙히 끌어들여 좌우 측방에 매복해 둔 조총병들로 포위공격을 펼쳤다. 궁기병 위주의 신립부대가 활로써 조총을 대적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고, 말을 타고 조총부대를 돌파하려고 해도 장창밀집부대의 방어벽을 뚫을 수 없었다.


전투에서 후방에 배치하는 예비대의 역할은 지극히 중요하다. 전방이 뚫리면 즉시 투입하여 막아내야 하고, 우회 공격해 오는 적도 대비해도 한다. 고니시 군은 예비대를 적절하게 운용하여 본대를 지원하고 충주성을  점령했지만, 신립은 보병 예비대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여 충주성이 적에게 점령당한 것이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했다.


탄금대 뒤 남한강



신립의 리더십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함경도에서 여진족 니탕개의 난을 평정한 조선 최고의 장수였지만, 성격이 불과 같았고 안하무인이었다. 선조의 넷째 아들인 신성군의 장인이 된 후 권세도 하늘을 찌를 듯하여 쉽게 다른 사람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종사관 김여물이 문경 새재를 지키자는 건의를 했을 때 그 말을 귀담아 들었어야 했다.


손자병법의 측면에서 탄금대전투를 조명해자. 신립은 '한 사람의 사내가 지키면 족히 천 명의 적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逕 足懼千夫)'는 문경 새재를 지키지 않은 것이 큰 실책으로 평가된다.


지휘관은 적과 아군의 세력을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해야 함에도(知彼知己 百戰不殆), 신립은 왜군 조총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열세의 병력으로 무리한 기병 돌격전술을 구사했다. 열세일 때는 공격 보다는 방어를 택하는 것이 맞다.


신립은 전방 정찰대를 적절히 운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투 개시 전에 은밀하게 정찰조를 내보냈다면, 매복한 적을 발견하고 무리하게 돌격을 감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립 기병부대의 소학익진은 고니시 부대의 복병이 친 대학익진에 갇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달천평야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도 실책으로 보인다. 좌우로 충주천과 달천이 있어 기병이 자유롭게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이 좁고, 주변이 대부분 논밭이고 비가 내려 진훍탕이 되어 말이 빠져 쉽게 기동할 수 없는 공간에 진을 친 것은 현장 점검을 소홀히 한 지휘관의 책임이 크다. 천문과 지리를 알면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는 '지천지지 승내가전(知天知地 勝乃可全)'을 무시한 결과는 참담했다.


탄금대에서는 해마다 음력 4월 28일이 되면 '8천 고혼 위령제'를 지낸다.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했으나  왜군의 조총 앞에 중과부적으로 전사한 외로운 영혼들을 달래는 제사를 올리는 행사다.




 
























이봉수 기자
작성 2020.05.26 10:39 수정 2020.05.27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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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