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 홍천 가리산에 들다

여계봉 선임기자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6월이 되면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청산도에 딱 맞아 떨어지는 산이 하나 떠오른다. 산 높고 골 깊은 강원도 백두대간 서쪽 자락에 너브내홍천(洪川)이 있다. 홍천 땅이 넓으니 오대산, 계방산, 응복산, 가칠봉 등 1,000m 이상의 고산준령이 줄을 잇고, 골마다 철철 흘러내린 물길이 굽이굽이 돌 때마다 몸을 섞어 넓은 내를 이룬다.

 

6월이 시작되는 첫날, 홍천 두촌면과 춘천 동면 사이에 솟은 가리산을 찾는다. 국내 ‘100대 명산의 하나인 가리산은 홍천 9중 제2경이다. 멀리서 보면, 고원처럼 평탄한 산줄기 위에 뾰족한 바위 봉우리 세 개가 모여 솟아있다. 이 모습이 마치 수확한 볏단 등을 엮어 쌓은 낟가리처럼 보이는 데서 산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낟가리 닮은 가리산 정상 바위 봉우리. 휴양림주차장에서는 두 봉우리만 보인다.



산행 들머리는 큰평내마을의 가리산자연휴양림이다. 휴양림에서 계곡을 올라 합수곡에서 가삽고개를 거쳐 정상에 오른 후 샘터를 들렀다가 무쇠말재를 지나 다시 합수곡에서 휴양림으로 내려오는 코스(4시간 30, 7.2)가 전형적인 코스다. 산길은 여느 육산처럼 평이하지만 정상의 봉우리들은 밧줄과 쇠난간을 잡고 오르내려야 하므로 바짝 긴장해야 한다.

 

산행코스: 가리산휴양림주차장-합수곡-가십고개-3봉-2봉-1봉(1,051m)-무쇠말재—합수곡-휴양림주차장(총 8km, 4시간)

 


코로나19 여파로 휴양림은 아직도 폐쇄 중이지만 등산로는 열흘 전부터 개방되어 평일인데도 등산객들이 제법 눈에 뛴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등산로 왼쪽의 계곡 물소리는 힘차고 시원하다. 말끔히 갠 하늘에서 불어오는 청량한 바람으로 골짜기는 시원하다. 휴양림 산막을 지나 단풍나무 가로수를 따라 올라가면 계곡을 사이에 두고 무쇠말재와 가삽고개 양쪽으로 산길이 갈라지는 합수곡이 나온다. 여기서 가삽고개 가는 오른쪽으로 난 숲으로 들어선다. 완만한 오르막의 S자로 이어지는 숲길의 널찍한 산자락에는 빽빽하게 우거진 키다리 낙엽송들이 짙푸르게 우거져 하늘을 찌르고 있다. 울울창창 낙엽송들이 6월초의 따가운 볕을 가려준 덕분에 나무 그늘만 밟으며 산오름을 즐긴다. 60년대 말까지 가리산에는 골짜기마다 화전민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들을 모두 이주시키고 집터와 농경지에 낙엽송과 잣나무들을 심었다고 한다. 가삽고개 아래에는 화전민이 경작했던 계단식 밭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다. 여기가 앞서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이고 활동 무대였다고 생각하니 깊은 산속이지만 애잔하고 정겹다.

 

고즈넉하기만 한 낙엽송 숲은 옛날에는 화전민들의 치열한 삶의 터전이었다.

 


몇 년 전 이 숲을 지날 때 한국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 탐사 작업이 한창이었다. 가리산 주변은 한국전쟁 때 미 2사단과 중공군, 우리나라 해병대와 북한군 사이에 밀고 밀리는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민족 상흔의 전쟁이 시작된 6월에 이 산을 오르니 감회가 깊다. 이윽고 능선에 있는 가삽고개에 올라선다. 고개 오른쪽은 등골산, 왼쪽은 가리산 정상 방향이다.

 

가삽고개에서 정상 봉우리까지 약 1km 되는 숲길은 신갈나무와 참나무 군락지다. 안온하기 그지없는 숲길은 걷다보면 소양댐 물로리 마을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예전에는 홍천 쪽 44번 국도변의 천현리는 가리산 들머리로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춘천 소양댐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물로리를 경유해 가리산 정상에 오른 다음, 다시 물로리로 내려와 소양댐 선착장으로 돌아가는 원점회귀 산행이 대세였다. 그런데 1995년 천현리 골짜기에 가리산자연휴양림이 조성되면서 교통이 편리해지는 바람에 천현리의 휴양림으로 들머리가 바뀌게 된다.

 

참나무숲과 낙엽송군락지를 지나는 편안한 능선 길에 산바람이 분다.



삼거리에서 소양댐 방향으로 내려가면 산 중턱에 한천자 부친 묘라고 전해오는 무덤이 있다. 옛날 한 씨 성을 가진 사람이 집에 찾아온 스님의 말을 엿듣고 부친의 묘를 산 중턱에 쓴 뒤 중국 한나라로 가 천자에 올랐다는 전설 때문에 가리산은 조상 묘 쓰려는 후손들 극성으로 몸살을 앓게 된다.

 

편안한 숲길이 끝나는 곳에 가파른 암벽이 나타난다. 암벽 옆에 설치된 보조물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건넌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길을 10여분 허위허위 오르자 탁 트인 푸른 하늘이 펼쳐지며 우뚝 솟은 세봉우리가 반겨준다. 고산준령 아래 짙푸른 소양강과 연초록 숲이 조화를 이루고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푸른 산그리메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정면으로 1봉이, 오른쪽으로 2봉과 3봉이 보인다. 등산 순서는 먼저 2봉과 3봉을 올랐다가 다시 돌아와 최고봉인 1봉으로 오른 후 샘터 방향으로 하산하는 것이 좋다. 1봉에서는 주로 휴양림이 보이는 남쪽 전망을, 2봉에서는 남쪽 전망과 함께 소양호 물줄기 일부를, 3봉에서는 소양호 물길 등 북쪽 전망을 감상할 수 있다.

 

정상의 봉우리들을 오르는 암릉 길은 거의 유격 훈련장과 흡사하다.

 

 

협곡을 사이에 두고 우뚝 솟은 세봉우리 중에서도 2봉의 큰바위 얼굴'이 유독 소문이 많이 나있다. 조선 영조 때 과거에 급제한 이 지역 출신 선비의 얼굴을 닮았다는 전설을 가진 이 바위는 '수능대박'을 꿈꾸는 수험생 학부모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고산준령과 소양호를 응시하고 있는 큰바위 얼굴은 가리산의 랜드마크다.


 

1봉을 오르면서 정면에서 바라본 큰바위 얼굴. 우직하지만 정겨운 표정이다.

 

 

동으로는 가리산자연휴양림을 품고 있는 천현리와 그 너머로 용소계곡과 함께 춘천지맥을 들어 올린 소뿔산, 가마봉, 백암산이 펼쳐진다. 백암산에서 오른쪽으로는 응봉산 줄기 뒤로 계방산과 오대산이 백두대간과 함께 광활하게 펼쳐진다. 남동으로는 청량봉에서 이어지는 한강기맥 주변 흥정상, 태기산, 운무산, 수리봉, 발교산 등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공작산 오른쪽으로는 오음산과 매화산, 그리고 피라미드처럼 뾰족하게 솟은 봉화산이 눈에 들어온다. 남서쪽으로는 연엽산과 구절산이 멀리 양평 용문산과 함께 보인다. 서쪽으로는 춘천 대룡산이, 대룡산 뒤로는 가평 방면 매봉, 계관산, 북배산, 연인산이 시야에 와 닿는다.



동으로는 가리산자연휴양림을 품고 있는 천현리 골짜기들이 골골샅샅이 펼쳐진다.

 

 

남쪽 강우레이더 관측소가 세워진 997m봉 뒤로 공작산이 머리를 내민다.

 


2봉에서 1봉으로 가는 길은 경사가 급한 암릉을 타고 올라야한다. 1봉 정상에서의 조망은 사방으로 막힘이 없다. 북서쪽 아래로는 물로리 분지가 소양호와 함께 펼쳐진다. 이 방향 멀리로는 명지산과 화악산이 한북정맥과 함께 하늘금을 이룬다. 북동으로는 등골산 능선 너머 멀리의 인제 방면 내설악 안산이 고개를 내민다. 그 뒤로 파란 하늘과 맞닿으며 오른쪽으로 길게 드리워진 산줄기가 오대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가리산에 오르면 백두대간과 소양호를 한눈에 볼 수 있어 강원도 제1 전망대로 꼽힌다.


정상에는 표지석(1,051m)과 해병대 가리산 전투 기념비가 서있다.

 

산자락 아래 물로리 마을과 소양댐 너머로 오봉산, 부용산, 용화산, 죽엽산, 사명산 이 눈에 들어온다.

 


1봉에서 샘터로 내려오는 길은 몹시 가파르지만 이곳만 지나면 편안한 등산길이다. 1봉 바로 밑 거대한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샘터에 들리면 목을 축일 수 있다. 거대한 절벽 바윗돌에서 양은 적지만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시원한 석간수 한 모금에 갈증이 싹 가신다. 가리산은 재물과 인연이 많은 산이다. 2005년 로또복권 최대 당첨금인 460억 원의 주인공 고향집이 큰바위 얼굴과 정면으로 보이는 천현리이고, 풍수지리에서 물은 재물을 의미하는데 이곳 석간수가 마르지 않고 꾸준하게 흐르는 것은 재물이 마르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하여 재물명당으로 회자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가리산을 방문해 재복을 빌고 있다.

 

석간수는 굽이굽이 약 18km를 흘러 44번국도가 지나는 성산리에 이르러 홍천강과 합수된다.

 

샘터 옆 가리산 숲속을 천천히 걸으며 고개를 숙여보면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밤사이 핀 꽃망울의 열림, 바람 따라 여행을 시작하는 씨앗의 작은 떨림, 서걱서걱 풀잎을 꿰는 풀벌레들의 움츠림. 이 숲을 지나노라면 생명이 약동하는 숲의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게 된다.

 

생명을 보듬은 가리산은 숲을 찾는 사람에게 손길과 발길을 내민다.

 


샘터에서 제법 경사가 있는 나무계단을 꾸준히 내려가면 오래전 이곳이 바다였을 때 배를 매는 쇠말뚝을 박았던 곳이라 전해오는 무쇠말재가 나온다. 이어서 밑동이 이어진 참나무와 소나무가 서로 얼싸안고 있는 연리목을 지나서 낙엽송이 들어선 가파른 길을 따라가면 숲에 잠긴 계곡을 만난다. 두 물길이 만나는 합수곡 갈림길에서 휴양림으로 내려서면서 오늘의 산행도 끝이 난다.

 

산아

푸른 산아

네 가슴 향기로운 풀밭에 엎드리면

나는 가슴이 울어라

 

오늘은 온통 연초록빛 청산인 가리산의 푸르름 속에서 한나절을 지내다 보니 잠시나마 청록파 시인이 되어 자연의 정서를 노래한 하루였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06 10:40 수정 2020.06.06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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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