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운우지락(雲雨之樂)의 무지개에 오르리

이태상

 



성격(性格)이나 인격(人格)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영어 단어가 있다. 다름 아닌 캐릭터(character)이다.

 

성격 혹은 인격이 운명 또는 숙명이다. (Character is Destiny.”

 

이 말은 성격없인 인격도 없다는 뜻이리라.

 

1990년대 중반이었나. 한 젊은 여성 시인의 성()에 대한 도발적인 표현에 독자들은 혼비백산(魂飛魄散)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무슨 눈 가리고 아웅 하듯 호들갑 떠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인가 하면서 나는 이 여성 시인의 솔직한 용기에 손뼉을 쳤었다.

 

동시에 가슴 밑으로 찡한 전율까지 느끼면서 극심한 연민(憐愍/憐憫)에 찬 감정이입(感情移入)의 엠퍼시(empathy)라는 뜨거운 용암(鎔巖)이 하늘로 솟구치는 것이었다.

 

아아 컴퓨터와 씹할 수만 있다면이란 구절이 실린 최영미 시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당시 무려 52쇄까지 찍으며 어마어마한 돌풍을 일으켰다고 하지 않나.

 

독자들은 입안 가득 고여 오는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란 시 구절에서 한 번쯤 경기(驚氣)가 들렸다고 했다. 오죽 씹할 상대로 남자나 여자 인간 아니면 개 같은 동물 또는 가지, 오이, 옥수수, 바나나 같은 식물조차 없었으면 컴퓨터 같은 기계하고라도 하고 싶었을까, 생각하니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대자대비(大慈 大悲) 이상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발동하는 것이었다.

 

여고생들의 원조교제를 다루어 화제를 모았던 김기덕 감독의 작품 사마리아가 생각난다. 5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은곰상(감독상)을 수상한 그의 열 첫 번째 작품 사마리아의 줄거리를 이 영화를 보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간략히 소개해보리라.

 

사마리아는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뜻과 죽은 마리아 또는 성녀(聖女)의 반대 의미이나 영화에서는 역설적으로 쓰였다고 한다.

 

원조교제를 하는 여고생과 그러한 딸의 원조교제를 알게 된 아버지의 복수와 화해를 그린 작품으로 소외된 자들의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면서 그 속에 상징과 풍류 알레고리(allegory)를 담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일부에서는 영화로 포장된 여성 혐오 영화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 줄거리는 이렇다.

 

유럽 여행을 갈 돈을 모으기 위해 채팅에서 만난 남자들과 원조교제를 하는 여고생 여진과 재영이 주인공인데 재영은 창녀, 여진은 포주 역할이다. 여진이 재영이 인척 남자들과 컴으로 채팅을 하고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으면, 재영이 모텔에서 남자들과 만난다. 낯모르는 남자들과 섹스를 하면서도 재영은 항상 웃음을 잃지 않는다.

 

모르는 남자들과 만나 하는 섹스에 의미를 부여하는 재영을 이해할 수 없는 여진에게 어린 여고생의 몸을 돈을 주고 사는 남자들은 모두 더럽고 추한 존재들일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모텔에서 남자와 만나던 재영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을 피해 창문에서 뛰어 내리다 여진의 눈앞에서 죽게 된다.

 

재영의 죽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은 여진은 재영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재영의 수첩에 적혀 있는 남자들을 차례로 찾아가 재영이 받았던 돈을 돌려주자 남자들은 오히려 평안을 얻게 된다.

 

남자들과의 잠자리 이후 남자들을 독실한 불교신자로 교화시켰다는 인도의 창녀 바수밀다(婆須蜜多)’처럼 여진 또한 성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정화시킨다고 믿는 해괴한 논리를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형사인 여진의 아버지는 살인사건 현장에 나갔다가 우연히 옆 모텔에서 남자와 함께 나오는 자신의 딸 여진을 목격하게 된다. 아내 없이 오직 하나뿐인 딸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아빠에겐 딸의 매춘은 엄청난 충격이다. 딸을 미행하기 시작한 아빠는 딸과 관계를 맺는 남자들을 차례로 살해하고 복수를 하지만, 고통은 여전하다. 영화는 아버지가 딸의 원조교제를 용서하고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되면서 끝난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아빠는 딸과 함께 여진의 엄마 산소를 찾아갔다가, 그 근처에서 딸에게 운전을 가르쳐주고 나서 미리 자수해 연락해 놓은 동료 형사에게 체포된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차를 계속 몰던 여진은 아버지가 수갑을 차고 끌려가자 서툰 운전으로 쫓아가다 진흙에 빠져 차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요즘 젊은 여성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신조어가 있는데, 이름하여 시선 폭력이니 시선 강간이란다. 원치 않는 타인의 시선이 폭력을 당하는 것처럼 불쾌하고, 남성의 음흉한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도 강간에 준하는 정신적 고통을 느낀다는 의미라고 한다.

 

세월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사람이 변한 것일까. 음양조화의 자연의 섭리와 이치가 변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갖고 있는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여자는 남자를 위해, 남자는 여자를 위해 있는 존재라면 말이다.

 

()이 불결하다고 잘못 세뇌된 만성 고질병이 아니라면 중증(重症)의 결벽증(潔癖症)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아무한테도 눈에 띄지 않고 하등의 흥미나 관심 밖의 전혀 매력 없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존재라면, 이보다 더 슬프고 비참한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꽃이 아름답게 피어도 봐 줄 사람이 없거나 찾아오는 벌과 나비가 한 마리도 없다면 꽃의 존재 가치와 존재 이유가 있을 수 있겠는가.

 

누가 날 쳐다본다는 건, 내가 아직 살아 있고, 젊었으며, 아무도 찾지 않는 시베리아 같은 불모지지(不毛之地)이거나 씨 없는 수박이 아니란 실증이 아닌가. 물론 나 자신의 실존적인 존재감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존자대(自尊自大)의 자가보존(自家保存)하고 자아실현(自我實現)하며 자아완성(自我完成)해야 생기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얼마 전 아래와 같은 남녀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Male vs Female)’이 항간에 널리 회자되었었다.

 

여성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a Woman)

 

18세부터 22세까지의 여성은 아프리카와 같다. 반쯤은 발견 되었으나 나머지 반은 아직 미개의 야생적으로 비옥한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Between 18 and 22, a woman is like Africa. Half discovered, half wild, fertile and naturally beautiful.

 

23세부터 30세까지의 여성은 유럽과 같다. 잘 발달했고 특히 재력 있는 사람에게 흥정이 가능하다.

 

Between 23 and 30, a woman is like Europe. Well developed and open to trade, especially for someone of real value.

 

31세부터 35세까지의 여성은 스페인과 같다. 굉장히 정열적이고 느긋하며 자신의 아름다움에 자신만만하다.

 

Between 31 and 35, a woman is like Spain. Very hot, relaxed and convinced of her own beauty.

 

36세부터 40세까지의 여성은 그리스와 같다. 기품 있게 나아 들었으나 아직도 따뜻하고 방문할 만한 곳이다.

 

Between 36 and 40, a woman is like Greece. Gently aging but still a warm and desirable place to visit.

 

41세부터 50세까지의 여성은 영국과 같아 영광스러운 정복의 과거를 지니고 있다.

 

Between 41 and 50, a woman is like Great Britain, with a glorious and all conquering past.

 

51세부터 60세까지의 여성은 이스라엘과 같다. 산전수전 다 겪었기에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신중히 일을 처리한다.

 

Between 51 and 60, a woman is like Israel. Has been through war, doesn’t make the same mistakes twice, takes care of business.

 

61세부터 70세까지의 여성은 캐나다와 같다. 자신을 잘 보존하면서도 새 사람을 만나는데 개방적이다.

 

Between 61 and 70, a woman is like Canada. Self-preserving, but open to meeting new people.

 

70세 이후로는 그녀는 티베트와 같아 신비스러운 과거와 만고의 지혜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발산하면서도 영적인 지식을 갈망하는 모험심의 소유자다.

 

After 70, she becomes Tibet. Wildly beautiful, with a mysterious past and the wisdom of the ages. An adventurous spirit and a thirst for spiritual knowledge.

 

남성의 지리학(The Geography of a Man)

 

한 살부터 90세까지 남성은 북한과 짐바브웨와 같아 (멍청한) 불알 두 쪽의 지배를 받는다.

 

Between 1 and 90, a man is like North Korea and Zimbabwe; ruled by a pair of nuts.

 

, 그래서 서양에선 자고이래로 남자는 子枝로 생각한다(A man thinks with his penis)’라고 하나 보다. 그렇다면 여자는 珤持로 느낀다(A woman feels with her vagina)’라고 해야 하리라. 이것이 남녀의 지리학이라기보다 지징의(知情意)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 되리라.

 

, 이제 우리 홍용희 문학평론가의 시집 깊이 읽기평론, <문정희 시선집> ‘사랑의 기쁨그 끝부분을 같이 심독(深讀)해 보자.

 

문정희의 시 세계가 도처에 거침없고 원색적이고 엽기적인 면모를 노정하는 것은 에로스의 후예로서 누구보다 정직하고 충실하다는 반증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러한 시적 삶의 의미와 가치는 무엇일까? 다음 시편은 이에 대한 대답을 깊고 유현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로스적 삶과 상상은 종교적 신성성의 경지 이전이면서 동시에 그 이후라는 견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

돌아가는 길

 

다가서지 마라

눈과 코는 벌써 돌아가고

마지막 흔적만 남은 석불 한 분

지금 막 완성을 꾀하고 있다

부처를 버리고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어느 인연의 시간이

눈과 코를 새긴 후

여기는 천년 인각사 뜨락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다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 앞에 시간은 아무 데도 없다

부질없이 두 손 모으지 마라

완성이라는 말도

다만 저 멀리 비켜서거라

 

석불이 석불마저 내려놓고 있다. 그리하여 다시 돌이 되고 있다. 이때 돌은 부처의 경지 이후이다. 부처가 된 이후에 다시 회귀하는 돌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완성의 경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처의 눈과 코를 새긴 어느 인연의 시간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부처의 감옥은 깊고 성스러웠으나, 그 깊고 성스러움 마저 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시상의 흐름은 부처 이후의 완성의 경지라는 말도 내려놓고자 한다. 어떤 규정이나 굴레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자유자재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 문정희가 에로스의 정령과 에로스의 모순적 삶을 집중적으로 추구하는 시집에서 다시 한 송이 돌로 돌아가는 자연을 노래하고 있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것은 에로스의 욕망은 종교적 신성성을 넘어서는 절대적 근원의 영역임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에로스의 환희와 절망이 교차하는 전쟁 같은 원초적 과정이 부처의 세계보다도 더 크고 본질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시선집 사랑의 기쁨은 부처의 감옥이나 완성이라는 말에서도 자유로운 절대적인 근원의 자연을 추구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위의 시편은 에로스의 존재성과 이 시집 전반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지속적으로 제기한다.”

 

어쩜 그 질문과 답변이란 모름지기 자()(), ()() 이리라.

 

우리 문정희 시인의 늙은 꽃을 감상해보자.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색으로 피든

필 때 다 써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핏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이 시에 오민석 시인은 이렇게 주석을 단다.

 

꽃은 한 번 필 때 모든 것을 다 써버림으로써 순간의 생애를 산다. 그것은 순간에 완벽을 이룬다. 순식간에 만개하고 멈춰 버리는 삶은 늙을 틈이 없다. 그러니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이 황홀한 규칙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 시간의 계산이 개입할 수 없는 이 생애. 그것은 너무나 짧고도 완벽하기 때문에 분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직 향기뿐.”

 

, 정녕 그렇다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모든 코스미안들은 하나같이 이 지구별에 잠시 피었다 시들고 사라지는 별꽃들이리.

 

문득 1939년에 나온 미국의 뮤지컬 영화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에서 캔자스시티의 농장 소녀 도로시(Dorothy) 역을 맡은 16세 주디 갈란드(Judy Garland 1922-1969)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황홀한 여행을 하기 전, 황량하고 광막한 벌판 위 농장에서 어딘가 무지개 위로(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부르며 먼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도로시의 친구들, 뇌 없는 허수아비, 심장 없는 깡통 나무꾼, 겁 많은 사자도.

 

우리 그 노랫말을 따라 불러 보리라.

 

이 노래를 부르며 우리도 파랑새처럼 운우지락(雲雨之樂)의 무지개에 오르리.

 

Somewhere over the rainbow, way up high

There’s a land that I heard of, once in a lullaby

Oh, somewhere over the rainbow, skies are blue.

And the dreams that you dare to dream

Really do come true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09 11:24 수정 2020.06.09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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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