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코스미안시대가 도래하고 있어라 (2)

이태상



코로나바이러스로 유발(誘發) 촉진(促進)'거리두기'의 미덕(美德)과 혜택(惠澤)을 좀 살펴보리라.

 

독일의 극작가, 시인,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시() '민주적 (이민) 판사 ‘The Democratic Judge’가 있다.


이 시() 내용을 간추려보면 이탈리아의 한 술집 주인이 미국으로 이주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려고 로스앤젤레스 이민국 판사 앞에 서서 미국 헌법과 역사 등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못하고 어떤 질문에든 ‘1492이라고 똑같은 대답만 한다. 자기 딴에는 준비를 하느라 애썼지만 영어를 못하는 처지라 어쩔 수 없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번번이 퇴짜 맞고 돌아갔다가 네 번째로 다시 이민 판사 앞에 선 이 신청자를 본 판사가 아무래도 이 사람은 더 이상 미국 헌법이나 역사에 관해서 배울 능력이 없겠다 싶어 질문을 바꿔 물었다. ‘아메리카 대륙이 (서양 사람들에게) 언제 처음 발견되었는지 아느냐. 그러자 그의 대답은 다시 한번 반복된 ‘1492이었다. 따라서 그는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따게 되었다.

 

이처럼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Brechtian Distancing effect/ Verfremdungseffekt)’라 하는 연극과 영화에서 사용되는 용어가 있는데 관람객으로 하여금 연극이나 영화 줄거리에 전적으로 몰입(沒入)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비판적인 옵서버 관찰자가 되도록 돕는 테크닉을 의미한다.

 

이를 달리 표현하자면 세상사를 미시적(微視的)이 아닌 거시적(巨視的)으로 보라는 뜻이리라. 다시 말해 소탐대실(小貪大失)하지 말라는 것 아닐까  

 

우리가 우리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듯이, 우리는 각자의 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운명적으로 선택을 받게 되는 것 같다.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 pen name of Marie-Henri Beyle, 1783-1842)이 말했듯이 우리는 모두 더 할 수 없이 완전한 한 쌍의 행복한 커플이었었는데 신() 또는 여신(女神)의 질투로 분리돼 흩어진 이산가족이기에 잃어버린 제 짝을 평생토록 그리워하며 찾아 헤메는 것인지 모를 일이어라.

 

스탕달 증후군(Stendhal syndrome)’이란 말이 있는데 극도로 아름다운 대상이나 현상에 직면했을 때 갑자기 심장 박동이 급하게 뛰고, 환청(auditory hallucination), 환시(visual hallucination, 환촉(haptic localization) 등 환각(幻覺)의 혼미(昏迷)한 상태에 빠져 때로는 혼절(昏絶)까지 하게 되는 증상 (hallucinosis)을 가리키는 정신분석학 용어이다.

 

양자역학(量子力學, 영어로는 quantum mechanics, quantum physics, quantum theory)에서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은 두 부분계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일련의 비고전적인 상관관계로 얽힘은 두 부분계가 공간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존재할 수 있다는 학설을 말한다.

 

이 물리학적인 이론을 과학자가 아닌 우리 보통 사람들이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우리가 그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너무도 신비로운 인연(因緣)’으로 얽힌 우리 마음의 입자들은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서로를 한없이 그리워하면서 상호작용을 하고 있지 않은가. 어쩜 이런 우리 인연의 얽힘과 상호작용은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넘나드는 것인지 알 수 없어라. 프랑스의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Vladimir Janke’le’vitch 1903-1985)죽음을 피하는 사람은 삶을 피하는 사람이다. 죽음도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지 않나.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사랑은 지식(知識)에 대한 욕망(慾望)이기보다 미스터리 신비감(神秘感)에 대한 존경심(尊敬心)이다. (Love is more of a respect for a mystery than a desire to know.)”

 

2015년 출간된 굶주린 시장기가 나를 현대 여성으로 만들어 준다 (Hunger Makes Me a Modern Girl)’라는 자서전 메모아(memoir)를 쓴 미국 작가 겸 배우와 음악가인 캐리 브라운스틴(Carrie Brownstein, 1974 - )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호기심이 나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 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멀리하게 한다. 나는 개방적이고 낙관적인 감흥을 느끼고 싶다. 그러는 것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지라도 말이다(Curiosity is what keeps me open to a sense of hope. It staves off negativity. I want to have a sense of openness and optimism, even if that means being open to things that are potentially dark.)”

 

강형철 시집 환생에 수록된 시() ‘재생의 한 구절이 귓가에 맴돌며 눈앞에 떠오른다  

 

명경으로 누운 호수

튀어 오르는 단치 한 마리

나도 처음 인간으로 지상에 올 때

그랬으리

 

이 시()에 오민석 시인은 이렇게 주석을 단다.

 

티 없이 맑은 호수 위로 어느 한순간 온몸으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의 존재 선언, 우리는 모두 그렇게 지상에 왔다. 세월의 두께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동안, 우리는 저 푸른 시작에서 얼마나 멀어지는가. 그러나 순간마다 번개처럼 튀어 올라 다시 시작을 선언(재생)하는 삶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간의 칼날은 시간의 푸른 힘줄 대신 권태의 실, 죽음의 실을 짠다. 죽음을 거부할 수 없지만, 처음처럼 다시 튀어 오르는 생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운다. 그 혼종성(混種性)이 우리 삶의 두께이고 깊이다. 그러므로 의연하게 살고 싶은 자들이여, 늘 다시 태어나자. 헤밍웨이의 말처럼 우리는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

 

지난 2015년 또 한 권의 스티브 잡스 전기가 나왔다. 브렌트 쉬렌더(Brent Schlender)와 릭 텟젤리(Rick Tetzeli) 공저의 스티브 잡스가 된다는 것(Becoming Steve Jobs)’2011년에 나온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스티브 잡스(Steve Jobs)’보다 더 좀 긍정적인 평가다. 한 가지 공통점은 두 책이 다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에 대해서는 전혀 이의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디 스티브 잡스에게만 적용될 수 있을까.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면,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가릴 것도 없이 아니 생물뿐만 아니라 광물을 포함한 만물이 다 그렇지 않으랴. 동물은 동물 대로, 식물은 식물대로, 광물질은 광물질대로, 제각기 개성과 특성이, 형태와 구조가, 빛깔과 냄새가, 그 수명과 지속성이, 제각각의 타고난 천재성이, 다 다르지 않은가.

 

그러니 꽃은 제각각의 꽃대로, 풀도 나무도, 벌과 나비도, 새와 사람도, 바람과 구름도, 산과 바다도, 모든 별이 제각기 제 식과 제 스타일로 반짝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말이어라.

 

그렇다면 어느 누구 무엇도 나와 같지 않다고, 나와 다르다고, 탓할 수도 없고, 또 내가 남 같지 않다고, 남과 다르다고, 스스로의 개성과 특성, 자신의 천재성을 무시하거나 망각해선 절대 절대로 안 되리라. 넌 너대로 난 나대로 서로 거리 두고 떨어져 각자의 만만세를 불러 볼거나.

 

1962년 이탈리아의 구알티에로 자코페티(Gualtiero Jacopetti 1919-2011)와 파올로 카바라(Paolo Cavara 1926-1982) 그리고 프랑코 프로스페리(Franco Prosperi가 감독했던 다큐멘터리, 아니 샤큐멘터리(shockumentary)’라 일컬어진, 영화로 개의 삶/ 개 같은 세상(A Dog’s Life/ Doggish World)’이란 뜻의 몬도 카네(Mondo Cane)’가 있다. 영화의 내용이 상당히 충격적이라 전 세계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었다.

 

, 몬도 카네의 개 같은 세상에 새로운 구세주 예수나 석가모니 아니면 현대판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세계적 아니 우주적 인물 코스미안이 나타나 세상을 바로잡아주기를 소망만 하지 말고 우리 모두 각자가 나부터 사랑의 무지개를 타고 제각기 지상으로 내려온 코스미안 무지코가 되어 볼거나.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거리를 두고 따로따로 각자의 일상생활에서 사랑과 평화와 조화의 삶을 도모해 보리라. 특히 오랜 수난의 역사를 겪어온 한민족이 단군의 홍익인간과 천도교의 인내천의 코스미안 사상으로 새로운 코스미안 시대를 열 때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바야흐로 도래했어라.

 

영어로 네 속(사정)과 다른 사람들의 겉(모습)을 비교하지 말라(Don’t compare your insides to other people’s outsides)’라는 표현이 있다. 이 말은 사람들이 스스로 행복하려고 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애쓴다는 뜻인 것 같다. 성공한 것처럼, 부유한 것처럼, 강한 것처럼, 똑똑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반드시 꼭 그렇지가 않다는 말이다. 그동안 물질문명의 '선진국'으로 불리던 서구 각국과 미국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서양의 자본주의 뿌리가 뽑히고 있지 않은가. 바닷가에 쌓아 올린 모래성이 무너져내리듯 말이다.

 

비근한 예로 그럴듯한 사람들이 자살하지 않던가. 우리 모두 목숨을 비롯해서 젊음이든 뭐든 모든 걸 다 잃게 되어 있다. 잃는다는 건 잃을 뭔가가 잠시나마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었다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흙이건 돌이건 아무거라도 다 갖고 재미있게 소꿉놀이하는 어린애들 같이 그냥 마냥 저냥 즐거워할 일 아닌가. 그래서 2천여 년 전에 살았다는 유대인 랍비 히렐(Hillel the Elder 110 BC-19 AD)도 이렇게 말했으리라.

 

난 일어나 걷다 넘어진다. 그러는 동안 난 계속 춤춘다. (I get up. I walk. I fall down. Meanwhile, I keep dancing.)”

 

그리고 그는 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내가 날 위해 있지 않다면, 누가 날 위해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나만 위해 있다면 난 뭔가? 게다가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이겠는가? (If I am not for myself, who will be for me? But if I am only for myself, who am I? If not now, when?)”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해산물은 멍게이다. 겉보기 흉측해도 그 감칠맛 하며, 씹어 삼킨 다음에도 입안에 남아 감도는 그 향기로움이란 이 세상 뭣하고도 비교할 수 없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 멍게 같은 존재들 아닌가. 아니면 바닷속 밑바닥에서 필요한 거만 또 필요한 만큼만 섭취해 아름다운 진주로 만드는 진주조개들 아니랴. 이렇게 생기는 진주들은 제각기 코스모스바다에서 영그는 별, 아니 코스모스 하늘에 따로따로 서는 무지개가 되는 것이리라.

 

, 그래서였을까. 난 젊은 날 한때 서울에서 해심(海心)'이란 대폿집을 했었다. 파도와 갈매기 그리고 뱃고동 소리를 배경 음향으로 배처럼 꾸민 선실에서 다른 주점에서 맛볼 수 없는 해심주(海心酒)’해심탕(海心湯)’으로 취흥(醉興)에 젖어 세계 각국의 뱃노래를 불렀었다.

 

, 이제 우리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우화집(寓話集) ‘방랑자(The Wanderer, 1932)'에 나오는 진주(The Pearl)’ 이야기도 들어보리라.

 

어느 굴조개가 이웃에 있는 다른 굴조개에게 말했다  

내 안에 아주 큰 아픔이 있어, 무겁고 둥근 것인데. 그래서 몸이 많이 불편해.”

 

그러자 자신은 다행스럽고 만족스럽다는 말투로 다른 굴조개가 대답했다  

하늘과 바다를 칭송하리라. 나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없고 난 안팎으로 아픈데 없이 온전하고 건강하니까.”

 

바로 그 순간 게 한 마리가 지나다가 이 두 굴조개가 하는 말을 듣고 안팎으로 아픈 데 하나 없다고 좋아하는 굴조개에게 말했다.  

그래 넌 건강하고 온전하지. 그렇지만 네 이웃의 수고(受苦)는 굉장히 아름다운 진주를 배고 있는 까닭이야.”

 

 

THE PEARL

 

Said one oyster to a neighboring oyster, “I have a very great pain within me. It is heavy and round and I am in distress.”

 

And the other oyster replied with haughty complacence, “Praise be to the heavens and to the sea, I have no pain within me. I am well and whole both within and without.”

 

At that moment a crab was passing by and heard the two oysters, and he said to the one who was well and whole both within and without, “Yes, you are well and whole; but the pain that your neighbor bears is a pearl of exceeding beauty.”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10 16:55 수정 2020.09.1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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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