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의 인문으로 보는 세상] 위험한 여름

신연강





위험한 여름이 오고 있다. 매캐한 최루가스가 눈을 파고들고, 부서진 돌멩이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귓전을 가르던 그 유월. 그리고 고된 희망은 미루나무 잎이 빨리빨리 자라서 전투훈련장에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주길 간절히 바랬었다.

 

그런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유월은 이제 도시를 용광로처럼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든다. 코로나로 휘청거리는 도시. 인적 없는 거리를 이따금 오고 가는 마스크 쓴 그림자.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야, 라고 다독이며 넘어가지만 다시 손에 잡은 제임스 미치너James Michener의 글은 여전히 긴장을 풀 수 없게 한다.

 

그의 책은 지난주 캠핑지에서 끝내려했으나 다 읽지를 못했다. 작가는 왜 쓰는가라는 제목이 눈을 끄는 책. 1952년 한국전쟁 동안 미치너가 한반도 전장을 누빌 때 <라이프>지는 특사를 파견해 헤밍웨이 특집 판의 편집을 제안한다. 이런 사연을 포함해서, 그 자신 작가로서의 성장과정과 직, 간접 경험을 들려주기에 이 책엔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청소년기에 만났던 여류작가 그레이스 리빙스턴 힐Grace Livingston Hill에 관한 얘기, 그 외 다른 작가들-어니스트 헤밍웨이, 마거릿 미첼, 트루먼 커포티-을 논한 곳에선 작가들의 스타일과 장. 단점을 논한 부분,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나이 들어가는 한 작가에 관하여 쓴 내용이 책을 구성한다.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헤밍웨이에 관한 부분. 지난번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통해 간결하고 개성 있는 문체를 보유한 하루키의 산문집을 접한데 이어, ‘비정의 문체’(hard-boiled writing style)로 잘 알려져 있는 헤밍웨이를 다룬 부분은 내게 적지 않은 관심사였다. 미치너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은 헤밍웨이의 작품 하나를 알게 되었고, 문체, 구성, 심리, 묘사 등에 관한 자잘한 얘기들에서 소소한 재미를 봤다. 그 와중에 과연 헤밍웨이의 소설위험한 여름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컸다. 얼핏 보건대 투우에 관한 내용이 더러 나오고 있었다. 책을 읽지 않고 어느 작품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부담스런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투우에 관한 것이라면 빠질 수 없는 곳이 스페인일 것이다.

 

한 여름의 살인더위에 투우장에 모여 소리소리 지르는 관중들, 공격할 대상을 찾아 숨을 헐떡이며 발을 구르는 성난 황소, 눈에 핏발이 선 채 빨간 망토를 걸친 투우사, 뼈 속을 파고드는 적막감이 한순간 떠나갈 듯 함성으로 바뀌는 광기의 원형 돔. 눈 뜰 수 없는 강렬한 햇빛 아래, 모래바람이 일고나면 모든 것이 한데 엉키어, 삶은 죽음이 되고 죽음은 삶이 되는 투우장. 이 모든 것은 생각만 해도 현기증을 일으킨다.

 

피로 물드는 붉은 깃발과 칼. 심장을 끈적끈적하게 저며 오는 달뜬 열정. 광기가 정점으로 치닫는 시간과 공간. 그곳에서라면 미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지 모른다. 극한에 다다르지 않고 미치지 않는다면, 스페인의 유월은 온전히 가난하고 초라할 것이다.

 

위험한 여름이 시작됐다. 성긴 열기는 잊힌 기억을 부르고, 최루탄의 매캐한 냄새와 귓전을 가르는 돌멩이 소리가 들려온다. 유월 미루나무가 커다란 그늘을 드리울 때 소위 계급장을 달고 병영을 나가게 되리라던 고된 희망이 떠올랐다. 희미한 사랑의 그림자를 담은 담장 밑 빛바랜 장미. 라일락은 지고 아카시아 향이 희미해진 졸린 저녁을 초여름의 설익은 공기가 비집고 들어선다.

 

사나운 태양이 욕망의 불길을 잡아 일으킨다. 잠든 사랑의 불씨가 꿈틀대고 검은 먹구름이 서서히 음모를 꾸미는 계절. 기억 저편 무딘 기억의 파편들이 소나기처럼 몰려오고, 회오리바람이 떠나보낸 그리움과 기억을 따갑게 몰아세운다. 들뜬 유월의 뜨거운 바람이 활화산처럼 번져 나갈 듯, 먼 산 감추어진 곳으로부터 거대한 구름을 조금씩 몰아오고 있다.

 

 


 

[신연강]

인문학 작가

문학박사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12 11:51 수정 2020.09.13 2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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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