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소녀의 용서 : 인간의 조건 초월하리

이태상

 


2020611일자 한국일보에 기획 기사로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의 글이 [반칙-특권 없는 노무현의 시대 왔지만 '노무현'은 없다]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정의연 의혹 폭로에 정권 지지자들 악담음모론 맞서 운동가를 위한 운동으로 전락'이라며 "이용수 할머니가 폭로를 하자 정권의 지지자들이 그를 공격하고 나섰다. (그해 여름 동베를린 거리의 작가연맹처럼) 여성 단체와 운동권 글쟁이들이 여기저기에 글질을 해댄다. 그들의 글에는 할머니들이 어리석게도 토착왜구의 꼬임에 빠져 운동권의 신뢰를 잃었다고 적혀 있었다. 그렇다면 정의연이여, 민주당이여, 차라리 할머니들을 해산하고 할머니들을 새로 뽑는 게 더 간단하지 않겠는가." 적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0151219일자에서 그 당시 한국에서 논란을 빚고 있던 박유하 세종대 일문과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에 관한 내용을 대서특필했다. 이 보도를 계기로 뉴욕한인학부모협회는 박 교수 해임을 대학 당국에 촉구했었다.

 

위안부 피해자들을 주한미군을 따라다니는 '담요부대(Blanket Corps)'로 불린 한국인 매춘부들에 비교하는가 하면 가난에 의한 자발적 지원이고 일본군과 동지 같은 관계를 형성했다는 등의 책 내용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었다.

 

우리 조상들이 지금처럼 당쟁만 일삼다가 힘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젊은 남자들은 징병으로, 나이 좀 든 남자들은 징용으로 끌려나가 개죽음을 당하거나 혹사당하다 병사했다. 반면에 생과부가 된 여인들은 어떻게든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고, 어린 아가씨들은 강제였든 아니었든 생존수단으로 성노예가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2차 대전 종전으로 해방을 맞았으나 남북으로 갈려 동족상잔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을 뿐만 아니라 아직까지도 총부리를 서로 겨누고 있지 않은가. 또 월남전에는 일종의 용병으로 참전해 무고한 목숨을 빼앗고 자신들의 목숨도 버리지 않았는가.

 

앞에 언급한 '담요부대'로 돌아가 보자.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믿기지 않겠지만 내가 입대해 논산훈련소에서 훈련받던 1960년대 초만 해도 그랬다. 저녁이면 부대 주위로 '담요부대'가 진을 쳤었다. 굶주린 시골 아낙네들이 군의 야전식량으로 보급되는 건빵 한 봉지씩 얻기 위해 몸을 팔아야 했던 시절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동전도 은전도 금전도 아닌 엽전 가난뱅이 한국 군인을 상대하는 이런 '똥갈보'에 비하면 일본군인이나 미군을 상대하는 '일본공주''양공주'들은 양반 신세였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1960년대 말부터 서울에 '미아리 텍사스촌'이란 곳이 있었다. 미아리 텍사스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하월곡동 88번지 일대의 성매매 지역을 이르는 속칭으로 1960녀대 말 당시 서울의 대표적 집창촌이던 양동과 종로3(속칭 종삼)지역의 폐쇄로 성판매 여성들이 하월곡동 정릉천변으로 유입되면서 형성되었었다.

 

'유곽의 역사'란 책에 따르면 1층에서는 술을 마시고 2층에서는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18세기 미국 서부영화 속에서 묘사된 술집에서 착안하여, 기존의 사창가와 자신들을 구분 짓기 위해 스스로를 텍사스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용병 같은 군인이나 깡패, 조직 폭력배 또는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 한때 활개 쳤던 고문기술자들에 비한다면 이 집창촌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자신의 청춘을 바쳐 가족을 부양하고 동생들 학비까지 조달한 '미아리 아가씨들'은 천사들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 이 '미아리 고개'를 넘어온 우리와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오늘날 젊은이들은 '미아리 아리랑'을 불러야 하리라. 아니 '미사고 아리랑'을 불러야 하리라. '미안해, 사랑해, 고마워' 아리랑 말이어라.

 

그리고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지 같은 관계를 형성했었다면 이것 또한 말이 좀 된다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군인 신분이든 민간인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전쟁의 제물로 동원된 같은 희생자의 입장에서 볼 때, 제 목숨 바쳐가며 남의 목숨 빼앗는 일보다는 제 몸 바쳐 사지(死地)에 몰린 절망적인 젊은이들을 잠시나마 위로해줄 수 있는 일이었었다면 이는 숭고하고 자비로운 일이었었다고 칭송할 만하지 않을까.

 

언젠가 여러 해 전에 나는 읽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1936년부터 1972년까지 주간으로, 1978년까지 간헐적 특집 형식으로, 그 후 2000년까지 월간 화보 잡지로 발행되던 미국의 라이프(LIFE)지가 펴낸, 사진을 곁들인 포토에세이집 삶의 의미에 대한 감상이다.

 

이 책은 삶의 의미속편으로 우리가 왜 존재하느냐는 이 시대 아니 만고의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해답을 세계 도처에 사는 365명의 유명 또는 무명 인사로부터 구해 본 것이다. 수록된 사진들은 세계의 일류 사진작가들이 생생한 컬러 이미지로 삶의 정수(精髓)를 포착한 것들인데, 36개국과 달에서 찍은 경치가 마치 우주 무변의 무한한 공간과 영원무궁의 시간을 한순간 한 장면에다 압축해 응결시켜 놓은 것 같았다. 그리고 실린 글들은 53개국 사람들의 말이다. 그 가운데서 발췌한 일부가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TIME)지에 실린 것 중 몇 사람의 글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 옮겨 보리라.

 

난 정말 삶의 의미를 알고 있지만 밝히지 않겠다. 즐겁게 살라는 것 말고는미국 작가 고어 바이달(Gore Vidal 1925-2012)의 말이다.

 

삶의 의미는 삶이 표현되는 모든 것에 담겨 있다. 우주 자연 모든 것에 나타나는 무한 무수한 형태와 현상 속에 있다. 삶은 아름다운 꽃들과 노래와 음악으로 피어나고 별들과 별구름 성운(星雲)과 은하수로 폭발한다. 우린 살아 있는, 가슴 뛰는, 춤추는 우주 속에 존재하는 특전이 부여된 종자(種子)이다. 왜냐면 모든 생명의 창조적인 힘이 우리의 혼() 속에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으니까. 우리 모두 누구나 그 어떤 목적을 갖고 이 지구 세상에 태어난다. 어떤 것이든 그 목적을 이루려면 우리 각자 속에 있는 신성(神性)의 도화선에 점화, 우리 삶에 의미를 두는 것이다.” 미국의 흑인 가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 1958-2009)의 말이다.

 

우린 세속적인 일들에 얽매여 우리가 영적인 추구, 우리말로 의역하자면 도()닦기를 위해 이 세상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구도(求道)의 노정(路程)이 인생의 가장 의미 있고 신나는 부분임을 알게 된 것이 내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놓았다.” 미국의 인기 TV 토크쇼 흑인 여성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1954 - )의 말이다. 다음은 오프라 윈프리가 소개한 자신의 이야기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겪는 일, 매사건마다 우리가 두려움보다 사랑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 인생에 있었던 좋은 일들은 다 내가 사랑을 선택한 데서 생긴 것들이다. 기쁨과 희망 그리고 우리 모두가 타고난 우리의 영적 갈망을 달래는 일 말이다. 그 반대로 두려움이란 우리 자신이 수준 미달로 사람대접받을 만하지 못하다든지 하는 우리 자본주의 사회가 말해주는 최면술에 걸려 욕구 충족 아니 만족과 행복이 물질적인 재화를 남보다 더 많이 획득하는 데서 온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각자 깊은 마음속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것이 있어야 함을 인지한다. 그 아쉬움과 그리움이란 나 자신 스스로를 사랑하고 싶은 동경심(憧憬心)이다.”

 

또 언젠가 나는 끔찍한 범죄 피해자들이 그들의 가해자들과 상면하는 토크쇼를 본 일이 있다. 그 가운데 17세의 한 소녀가 4년 전 자기를 폭행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죽은 줄 알고 버리고 떠났던 남자에게 방송 중 말하는 것이었다. 그 동안 열일곱 번의 수술을 받고 얼굴을 완전히 새로 성형해야 했는데도 소녀는 범인에게 말했다. “난 당신이 내게 한 짓을 미워하지 난 당신을 미워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난 내 삶을 살기 위해 당신을 용서할 것을 배워야 했어요."

 

이날까지 내가 들어 본 가장 감동적인 말이다. 그 순간 소녀는 우리가 왜 여기 있는지를 말해 준 것이다. 인간의 조건에도 불구하고 사랑할 것을 배우기 위해. 두려운 인간 조건을 초월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런 소녀야말로 코스미안의 화신(化身 아니 化神)이어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13 09:47 수정 2020.09.13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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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