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선의 시를 걷다] 진주 남강

아득한 남강의 속절없는 그리움



그렇지만

봄강은 아득하고 아득하다.

속절없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내게로 와

냉정하고 과묵하게 너에게로 흘러간다.

먼 시간의 뒤안길을 거침없이 휘돌아

낮아지고 맑아질 때까지 구비 구비를

남강은 오늘도 말없이 건너오고 있다.

봄이 오고 봄이 가듯

너는 오고 너는 간다.



생애 처음

결핍을 피워낸 꽃은

찌를 듯이 아름답다.

결핍은 생명이며 결핍은 희망이다.

진주성 봄꽃 위에서 빛나는 오후는

아련하고 그리워서 눈 둘 곳이 없다.

낮게 엎드려 흘러가는 남강 사이로

봄꽃과 나는 밀어를 즐기는데

말없는 풍경만 잔영으로 멀어져 간다.


남해를 떠돌다가 남강에 이르러서야

무심하게 잠든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은 참담했지만

나는 그 잠을 깨울 수 없었다.

실버들은 푸르게

허공 속을 휘날리고 들리는 것은

맹렬한 적막뿐이었다.

잠시 허허한 적막과 한판 놀아나다가

다시 돌아와 보니 봄날이 가고 있었다.


이 세상

시인 아닌 자 누가 있을까

촉석루 마루에 서면 저마다 시인이 되어

자연과 인간 사이의 구획이 허물어지고 만다.

옛 선비의 옷깃이 스쳤던 기둥은

지금도 말없이 남강을 바라보고 있는데

풍경이 스치고 지나가는

하늘가로 바람은 속절없이

인간을 따돌려 놓고 저 홀로 흘러가다가

시공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사라져간 시간과

천천히 다가올 시간은

오래전 사라져 간

영혼들의 영토 안에서

떠다니는 바람이 되었거나

구름이 되었거나

봄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시간은 위대하지만

그러나 시간은 나약하다.

저 대포 구멍 안으로

사라져간 시간의 역사는

전쟁보다 위대하고

평화보다 나약하다.


    

    나는 모른다.

보편적 진실을 말하려는 허영심도 없고

내안에 설정된 사유의 역사는 없다.

저 쏟아지는 햇살 아래 비석으로 남아있는

진주의 이름 없는 백성도 모르고

임진년의 처절한 왜란도 모른다.

나는 세상을 애써 읽지 않아도

이미 내 안에 흐르는 그들의

시대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럴 뿐이다.


그녀

사갑술四甲戌의 사주로 태어나

하필 논개가 되었지만

그녀가 뛰어내린 바위는

여전히 물결 위에서 가지런한 의암이다.

남강은 진주를 향해 아름답게 뻗어 있고

사람들은 그녀를 각별히 사랑하는데

그녀의 비극과 그녀의 절대고독 앞에

속절없이 강물만 흐르고 있다.


의로운 사랑은

운명에 함몰되지 않는 힘을 지니고 있다.

살아있는 모든 순간마다

한결같은 그리움으로 발현되어

생명 속에 가득 찬 삶이 된다.

저 수줍은 영정 속의 그녀는

경건한 불멸의 추억이다.

시인 변영로의 노래가 들려온다.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인본주의에 굶주린 것도 아닌데

내 젊은 날은 마음이 가난하고

사랑도 가난하여 인본주의에 열망했다.

저 옛 성문을 넘는 햇살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풍요한데

나는 문학과 문장의 틈새에서 방황하며

오늘도 잔인하게 시달렸다.

 

따뜻한 가슴을 가진 남강의 벗들이여

강줄기 자락마다 마을을 하나씩 키워내고

바람 흩날리는 나무 밑에서 나는

저 강물 속을 흐르는 진주 사람들의

부지런한 노동의 소리를 듣는다.

무던하고 착한 예술의 향기를 맡으며

남강을 한 없이 바라본다.


    다시

부유하는 시간의 기억들을 지우고

환연한 진주성 풍경 한 귀퉁이를 잡아

도화지처럼 둘둘 말아 배낭에 찔러 넣었다.

아름답고 슬프고 정겨운 진주성을 걸어 나와

세상의 길로 걸어가면서 가만히 뒤돌아보니

내가 진주를 찾은 것이 아니라

진주가 내게로 찾아 온 것이다.

안개 틈 사이로 햇살 알갱이들이

막 부서지는 이 봄에 말이다.

풍경 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내 그리움과

너의 그리움이 맞닿은

역사의 언저리로 걸어가며

안달하고 복달할 세상사를 내려놓고

뻔하고 허무한 인생을 찬양했다.

그랬다. 아무렇지도 않은 인생은

상투성으로 빛나는 찬란함이다.

나는 그 찬란함을 사랑하기로 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18.08.31 11:40 수정 2018.09.01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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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