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산세설] 골짜기의 요정들과 반항의 정신 (III) : 狂人 유한나(Yuhanna the Mad)

이태상

 


1.

유한나는 여름이면 아침마다 어깨에 쟁기를 메고 소를 몰고서, 지빠귀 새소리와 나뭇잎 살랑대는 소리를 들으면서 들로 나갔다. 한낮이 되면, 그는 냇가에 앉아 점심을 먹고, 새들을 위해 빵 부스러기를 풀밭에 남겨 놓았다.

 

저녁에 지는 해가 그 빛을 거두어 갈 때면, 그는 북부 레바논의 촌락들을 굽어보는 언덕배기 그의 초라한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유한나는 늙으신 부모님 곁에 잠자코 앉아서, 두 분이 나누시는 세상 이야기를 듣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겨울이면 그는 화롯가에 웅크리고 앉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에 귀 기울이고, 눈에 덮인 산골짜기에 잎이 다 떨어져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들을 창문 밖으로 내다보면서, 네 계절이 순서대로 바뀌어 가는 자연의 섭리에 대해 생각이 골똘해지곤 했다.

 

긴 긴 겨울밤 부모님이 다 잠이 드시면, 유한나는 늦도록 깨어 있다가 희미한 등잔불 아래서 깊이 넣어 두었던 복음서(福音書)를 꺼내 밤이 깊도록 읽었다. 성서(聖書)를 읽는 것이 성직자(聖職者) 이외에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들키는 날에는 교회로부터 파문(破門)되고 심한 벌을 받았다.

 

유한나는 이와 같이 들에서 볼 수 있는 갖가지 아름다운 자연의 조화와 복음서에 나타난 온갖 경이(驚異)로운 신의 계시(啓示)에 깨우침을 얻으며 그의 젊은 날을 보냈다. 아버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 때면, 유한나는 언제나 묵묵히 생각에 잠겨 듣기만 하고, 가끔 같은 또래의 벗들과 함께 있을때에도, 유한나는 저 멀리 지평선(地平線)을 바라볼 뿐 아무 말이 없었다.

 

교회에 다녀올 때마다, 유한나는 서글픔을 느꼈다. 교회에서 듣는 설교(說敎)의 내용과 복음서에서 읽는 예수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고 다를 뿐 아니라,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의 생활이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아름답고 진실된 삶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산과 들에 봄이 다시 돌아오고, 쌓였던 눈이 녹아 산골짜기를 타고 계곡으로 흘러내렸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은 다른 시냇물들과 만나 강으로 모여들었고, 흐르는 물소리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깊고 깊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생동하는 숨소리의 합창이었다.

 

사과나무와 호두나무에 꽃이 피고, 포플러와 버드나무에 새잎이 돋았다. 산과 들에 부는 봄바람을 타고, 풀나무 꽃향기가 유한나의 오두막집에도 스며들었다. 유한나는 집안에 있기가 갑갑해졌고, 소들은 좁은 울안에 있기가 답답해져서, 넓은 풀밭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유한나는 외투 속에 성서를 감추어 가지고, 소들을 몰고 들로 나갔다.

 

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동안, 유한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골짜기에 피어오르는 싱그러운 풀나무 꽃내음을 한껏 들이마시면서, 하늘나라에 대해 씌어 있는 성서를 읽었다. 마침 사순절(四旬節)이 끝나기 하루 전날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고 부활적(復活節)을 손꼽아 기다리는 부유한 사람들과는 달리, 유한나에게는 가난한 다른 농부들과 한가지로 단식(斷食)을 하는 사순절이나, 크게 잔치를 벌이고 진탕 먹고 마시는 부활절 축제일(祝祭日)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에게는 삶이 하나의 긴 안식일(安息日)과 마찬가지였다.

 

언제고 자신의 정직한 노동으로 그날그날의 끼니를 근근이 이어가기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고기나 기름진 음식을 먹지 않고 단식한다는 것이 조금도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그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새들이 유한나의 주위로 모여들고, 비둘기가 그의 머리 위로 날았다. 꽃들은 따뜻한 햇볕에 목욕이라도 하듯 산들바람에 흐느적거렸다.

 

성서에 열중하고 있던 유한나가 고개를 들었을 때, 골짜기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들 가운데 서 있는 교회의 높은 지붕들이 눈에 뜨이고, 은은하게 종소리가 들려왔다. 유한나는 눈을 감았다. 그의 영혼이 오랜 세월의 흐름을 넘어서 옛날의 예루살렘에 이르러 길거리에 남겨진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예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분은 눈먼 장님을 눈뜨게 해 주셨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걷게 해 주셨으나, 사람들은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그분의 머리에 씌웠지요.”

 

이 거리에서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이야기하셨고, 저곳에서 사람들은 그분을 기둥에 묶고 얼굴에 침 뱉고 매를 때렸지요.”

 

이 골목에서 그분은 창녀의 죄를 용서해주셨고, 저 너머에서 무서운 십자가를 지고 가다 쓰러지셨지요.”

 

이렇게 유한나가 옛날 예수께서 머물다 떠나가신 예루살렘을 방황하는 동안, 몇 시간이 지났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는 한낮의 태양이 하늘 가운데 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한 마리의 소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놀라서 들판 이리저리 찾아보았으나, 아무 데도 없었다. 들을 건너질러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길목에 이르렀을 때, 저만치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보였다. 부리나케 달려가 보니, 수도원의 수도사(修道士)였다. 유한나는 공손히 절을 하고, 혹시 소를 못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수도사는 노기에 찬 얼굴로 거칠게 대답했다.

 

그래, 봤다. 저기 있어. 날 따라와.”

 

유한나는 수도사를 따라 수도원까지 갔다. 거기에는 소들이 줄에 묶여서 널따란 우리 속에 갇혀 있었고, 다른 수도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 수도사의 손에는 굵직한 몽둥이가 들려 있었고, 그는 소들이 움직일 때마다 그 몽둥이로 때리곤 했다. 유한나가 소들을 몰아 내오려고 하자, 지키고 있던 수도사가 유한나의 외투 깃을 걸머잡으며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죄지은 목동을 잡았오!”

 

이 소리에 다른 수도사들과 사제(司祭)가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나왔다. 이들은 도적들이 약탈물을 에워싸듯 유한나를 빙 둘러쌌다. 그중 눈에 띄게 좋은 옷을 입고 일그러진 얼굴을 한 수도원장(修道院長)은 한눈에 다른 신부들과 구별되었다. 유한나는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서 수도원장을 보고 물었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저보고 죄인이라 하고 붙잡으시는 겁니까?”

 

수도원장은 톱으로 켜는 듯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너는 소들을 수도원 토지에서 풀을 뜯어 먹게 했고, 이 소들이 우리의 포도 넝쿨을 물어뜯어 다 망가뜨려 놓았어. 그래서 우리가 소들을 잡아 둔 거야. 이 소들이 입힌 손해에 대해선 목동에게 책임이 있어. 알겠냐?”

 

이렇게 말하는 수도원장의 노한 얼굴이 더욱 사나워졌다. 유한나는 애원하는 음성으로 호소했다.

 

신부님, 소는 아무 생각도 없고 말도 못 하는 짐승이 아닙니까? 저는 가난한 목동입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곤 소밖에 없어요. 제발 저 소들을 몰고 돌아가게 해 주세요. 다시는 이 근처에 오지 않겠습니다.”

 

수도원장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하늘로 손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 선택된 땅의 청지기로 삼으신 까닭에, 우리는 전심전력 이 성스러운 땅을 밤낮으로 지키거니와, 이곳을 침범하는 자는 불사름을 당하리라. 만일 네가 수도원에 끼친 손해를 변상하지 않는 날에는, 소들이 뜯어먹은 풀이 뱃속에서 독약으로 변할 것이다. 어쨌거나 너는 피할 길이 없으니, 손해를 배상하지 않으면 이 소들을 모두 몰수할 테다.”

 

수도원장이 말을 마치고 자리를 뜨려 하자, 유한나는 그를 잡고 다시 애원했다.

 

예수님이 수난당하시고 성모 마리아가 애통해하신 이 수난절(受難節)에 자비를 베푸시는 뜻에서, 제발 저와 소들을 놓아주십시오. 부디 마음을 너그럽게 하셔서 미천한 저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수도원의 권세와 부유함으로 저의 늙으신 부모님의 남은 여생에 긍휼을 베풀어 주십시오.”

 

수도원장은 유한나를 같잖다는 듯이 꾸짖었다.

 

수도원은 너를 용서하지 못한다. 네가 가난하든 부유하든 우리가 알 바 아니다. 네가 뭔데 주제넘게 함부로 성스러운 이름을 입에 담아 사정을 하는 거냐? 성스러운 비밀과 감추어진 진리는 택함을 받은 우리 수도원의 성도(聖徒)들만이 아는 것이다. 네가 소를 찾아가려면 금화 세 디나(dinar)를 치르고 찾아가도록 해.”

 

유한나는 목이 멘 음성으로 다시 또 애원했다.

 

높으신 신부님, 제게는 금화는 고사하고 동전 한 닢도 없습니다. 부디 저를 동정하셔서 저의 가난함을 굽어살펴 주십시오.”

 

수도원장은 숱이 많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그러면 가서 너의 집 농토를 팔더라도 세 디나를 마련해 와. 낟알 한 톨도 탕감해 줄 수 없어. 생각 좀 해 봐. 이 어리석은 젊은 것아. 무작정 자꾸 생떼를 써서 이 성스러운 수도원의 진노를 사,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떨어지느니보다는, 집과 농토를 팔아서라도 속죄하는 돈을 치르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겠어?”

 

유한나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다. 갑자기 그의 눈에서 빛이 나고 얼굴이 상기되었다. 유한나는 지금까지 애원하고 사정하던 태도와는 달리, 힘 있고 의연하게 슬기와 젊음이 응결(凝結)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금과 은으로 가득 차 있는 수도원의 금고를 더욱 불리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이 일용할 양식을 얻고 목숨을 부지해 가는 논밭을 팔아야 한단 말입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배고픈 짐승이 풀 좀 뜯어 먹었다는 죄로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고, 비참하도록 가난한 백성이 굶어 죽어야 옳습니까?”

 

수도원장은 오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예수 그리스도 가라사대, 이미 있는 자에게는 더욱 주리니 더욱 풍요해질 것이오, 없는 자로부터는 이미 없는 것까지 빼앗으리라.”

 

이 말에 유한나의 피가 끓어오르면서 눌리고 쌓였던 의분이 솟구쳤다. 마치 무사(武士)가 자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칼을 뽑듯이 유한나는 외투 주머니에서 성서를 꺼내 들고 소리쳤다.

 

당신들은 모두 위선자(僞善者)들이오. 성서의 가르침을 우롱하지 마시오. 가장 성스러운 것을 가장 욕되게 악용하는 당신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그분은 당신들의 수도원을 파괴하여 폐허가 되게 하시고 제단과 우상을 다 불살라 버리실 것 이오. 예수의 순결한 피와 성모 마리아의 지순한 눈물로 해서, 당신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오. 당신들이야말로 지옥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오. 탐욕의 우상 앞에 엎드리고, 검은 신부옷 속에 거짓과 추악함을 감추는 당신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오. 당신들은 겉으로는 겸손하게 제단 앞에 엎드리나, 속으로는 신의 뜻을 거역하는 가증스런 무리들이오.

 

태양이 공평하게 우리 모두를 위해 양분을 주어 자라게 한 이 풀밭을 내 소들이 침범했다고 나를 이곳에 잡아 놓고, 예수의 이름으로 또 그의 수난절을 빌어 애원했는데도, 당신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오. , 이제 이 성서를 똑똑이 들춰 보고 언제 예수께서 용서 안 하신 적이 있나 말해 보시오. 이 비장한 예수의 비극을 읽어 보고, 언제 그분께서 자비와 동정을 베풀지 않은 적이 있나 말해 보시오. 예수께서 산상(山上)에서 설교하신 때였나요? 두 팔을 벌려 온 인류를 품에 안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때였나요? 마음이 악독한 자들이여, 당신들은 농부들이 피땀 흘려 거두는 곡식과 열매를 천당에 보내준다고 속여 거저 받아먹으면서, 게으르고 안일한 생활을 즐기는 기생충 중에서도 고등 기생충들이오.

 

당신들은 단 한 번이라도 병든 사람을 찾아본 적이 있나요? 배고픈 사람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주고, 낯선 나그네에게 하룻밤이라도 잠자리를 주고, 애통해하는 사람을 잠시나마 위로해 준 적이 있었나요? 당신들은 우리 조상 때부터 약탈해 간 재물에 만족해하며 온갖 영화를 누려오고 있오. 당신들은 독사가 그 혀를 내밀듯, 욕심 사나운 손을 뻗어 과부와 고아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선량한 농부들이 훗날을 위해 장만한 양식을 빼앗아 가는 날도둑 날강도들이오.”

 

유한나는 잠시 숨을 돌린 뒤,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을 다시 계속했다.

 

당신들은 여럿이고 나는 혼자이니, 당신들 마음대로 해 보시오. 어린 양이 밤의 어둠 속에서 사나운 이리떼의 밥이 된다 해도, 그가 흘리는 무고한 피는 새벽이 되어 해가 뜰 때까지 산골짜기의 돌들을 붉게 물들일 것이오.”

 

이렇게 외치는 유한나의 음성에는 수도사들과 신부들을 꼼짝도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러나 저들은 마음이 더욱 강퍅해졌고, 치를 떨고 이를 갈며 수도원장의 명령이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수도원장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성서를 뺏고 이 방자한 죄인을 잡아 지하실에 가둬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직자를 저주하는 놈은 이 세상에서나 저세상에서 나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수도사들은 굶주린 사자가 먹이를 보고 달려들듯이 유한나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은 유한나의 두 팔을 묶어 지하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그가 까무러칠 때까지 매질을 해서 지하실 어두운 토굴 속에 집어넣고 문을 잠가 버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유한나는 정신이 들었다. 그는 쓰러져 있던 땅바닥에서 일어섰다. 그는 벽에 뚫려 있는 하나의 조그만 구멍으로, 밝은 태양 아래 조용히 누워있는 골짜기를 내다 보았다. 유한나의 얼굴에선 광채가 나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통쾌한 만족감이 샘솟았다. 그의 육신은 갇혀 있으나, 그의 영혼은 초원과 폐허 사이에 부는 미풍을 타고 자유로이 날았다. 수도사들의 사나운 매질이 유한나의 몸을 상하게는 했으나, 저들은 결코 유한나의 마음속의 깊은 생각을 다치지는 못했다.

 

이 깊은 생각 속에서, 그의 영혼은 예수와 함께 편히 쉴 수 있었다. 박해(迫害)는 의인(義人)의 의기(意氣)를 꺾지 못하고, 압박은 진리 편에 선 자를 누르지 못하는 법. 소크라테스는 웃으며 독배(毒盃)를 들었고, 사도(使徒) 바울은 기뻐하며 돌을 맞지 않았던가.

 

유한나의 어머니가 지팡이에 의지해서 수도원을 찾아와, 수도원장의 발아래 엎드려 울며 그의 손에 입맞추고, 유한나를 불쌍히 여겨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수도원장은 마치 세속을 초탈한 사람처럼 먼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댁의 아들을 용서해 주고 그의 어리석음을 너그럽게 보아 줄 수 있으나 수도원은 손해배상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허(謙虛)하게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는 성스러운 곳을 침범한 자를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더군다나 가축을 성스러운 수도원 풀밭에 놓아먹인 자는 무턱대고 그냥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어머니는 말없이 수도원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의 야위고 움푹 팬 뺨 위로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머니는 목에서 은목걸이를 풀어 수도원장에게 주면서 말했다.

 

신부님, 저에게 있는 것이라곤 이 목걸이밖에 없어요. 이것은 저의 어머님이 저의 결혼 때 주신 선물이지요. 제발 수도원에서 이걸 제 아들의 죄를 씻어 주시는 대가로 받아 주십시오.”

 

수도원장은 은목걸이를 받아 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고는 어머니에게 말했다

 

이 세대에 큰 화가 내릴 것이 분명합니다. 성서의 구절이 거꾸로 해석되고 젊은것들이 자기네가 차지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악담을 하려 드니, 참 큰일입니다. 돌아가셔서 어리석은 아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굽어살피시어 그의 이성(理性)을 되찾아 주실 것입니다.”

 

유한나는 수도원의 감옥에서 풀려나와, 소를 몰며, 허리가 굽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해야 하는 어머니를 부축하여 오두막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후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나직하게 하시는 말씀이 들려왔다.

 

사라, 내가 뭐랬오. 여러 번 얘길 하지 않았소? 우리 애는 정신이 좀 이상하다구. 당신은 그래도 언제나 아니라고 우겼지? 이제는 당신도 수긍이 가겠구려. 그 애 행동이 내 말을 입증해 준 셈이니까. 신부님이 당신에게 하신 말씀 내가 진작부터 골백번 해 오지 않았는가 말이오.”

 

서쪽 지평선으로 지는 햇살을 받아 아름답게 물들여진 저녁노을을 바라보면서, 유한나는 창가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2.

수난(受難)의 사순절(四旬節)이 지나고 부활절(復活節)이 되었다. 단식(斷食)이 끝나고 축제(祝祭)의 잔치가 벌어졌다. 초라한 마을 한가운데 우뚝 솟은 황태자의 궁궐처럼, 이 마을에 새로 성당이 세워졌다. 사람들은 새 성당에 부임해 오는 주교(主敎)를 영접하러 거리로 나왔다.

 

젊은이들이 부르는 찬양의 노래와 신부(神父)들이 영창(詠唱)하는 성가(聖歌)가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가운데, 주교가 도착했다. 호화롭게 장식된 안장과 고삐가 은으로 된 말에서 내린 주교는 많은 종교인들과 저명인사들로부터 찬사와 칭송으로 영접을 받았다. 그는 금박으로 수 놓인 신부복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머리에 쓰고, 정교(精巧)하게 만들어진 손잡이가 굽은 지팡이를 짚고, 다른 신부들과 함께 기도문(祈禱文)을 외고 성가를 영창 하면서, 새로 세워진 성당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성당 안에는 향이 피어오르고 수많은 촛불들이 켜졌다.

 

유한나는 이 축제와 봉헌식(奉獻式)을 성대하게 하기위해 여러 마을에서 동원되어 온 가난하고 초라한 목동들과 농부들 사이에 끼어, 슬픈 눈으로 이 장관(壯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우단과 공단에 휘감긴 부유하고 권세 있는 이들이 누더기에 싸인 곤궁하고 무력한 백성들 앞에서 금으로 된 그릇과 향로, 은으로 만든 촛대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과 괴로움으로 해서 쓴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은 부귀와 권세가 종교의 상징(象徵)이 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비천(卑賤)하고 무지(無知)한 무리라 부활절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아픈 가슴 깊은 데서 나오는 탄식과 기도가 하늘로 떠올라 바람결에 속삭였다.

 

어찌해서 우두머리로 행세하고 지도자로 군림(君臨)하는 자의 삶은 상록수처럼 서슬이 청청 늘 푸르기만 한데, 굴종(屈從)하는 백성의 생존은 죽음의 사자가 젓는 갈잎 조각배처럼, 힘없는 키는 거센 파도에 꺾이고 약한 돛은 사나운 폭풍에 찢기면서, 잠들 줄 모르는 풍랑에 끝없이 시달림을 받아야 하나?

 

한쪽에는 가혹(苛酷)한 폭정(暴政)이 있고, 또 한쪽엔 맹목의 복종(服從)만이 있으니, 어느 쪽이 먼저이고 어느 쪽이 나중일까? 폭정은 황폐한 들에서만 자라는 잡목인가, 아니면 복종이 잡목을 키워주는 버림받은 들판인가? 이렇게 유한나는 애통한 생각에 가슴 아파하고 있었다.

 

목이 조여 숨이 막힐 것만 같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아, 두 팔로 가슴을 누르듯 팔짱을 끼고, 유한나는 의식(儀式)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야말로 성대한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려는 때에, 공중에 한 정령(精靈)이 있어 유한나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고, 군중 앞에 나아가 외치도록 이끌어 주었다. 유한나가 군중 앞으로 나아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키며 우렁찬 음성으로 소리 높여 외치자,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그에게로 쏠렸다.

 

높은 곳에서 빛 가운데 앉아 계시는 나사렛 사람 예수여, 이 땅을 굽어보소서. 당신께서도 어제는 이 땅의 옷을 걸치시지 않았었나이까? 충실한 농부 예수여, 당신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로 이내 싹이 트곤 했던 아름다운 꽃들이 가시덤불 속에서 다 질식되었나이다. 선한 목자(牧者) 예수여, 당신께서 안아주시던 연약한 어린 양이 사나운 들짐승에게 갈기갈기 찢기었나이다. 당신의 순결(純潔)한 피는 땅속으로 스며들었고, 당신의 뜨거운 눈물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메말라 버렸나이다.

 

당신의 따뜻한 숨결은 사막의 모진 바람에 흩어졌고, 당신의 수난의 발자취로 거룩해진 이 들판은 강자의 발굽이 약자를 짓밟고 압제자의 손길이 선량한 백성을 억압하는 살벌(殺伐)한 벌판이 되었나이다. 박해당하는 자가 어둠 속에서 울부짖어도, 당신의 거룩한 이름으로 옥좌(玉座)에 앉아 있는 저들은 이 울부짖음에 귀 기울이지 않나이다. 불행에 우는 통곡 소리도 당신의 사랑의 말씀을 전파한다는 저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나이다.

 

당신께서 전파하시던 생명의 말씀은 성서 속에 감추어져 있고,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 공포와 두려움만 불러일으키는 저주의 소리침만이 있나이다. , 예수여, 저들은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길거리에 버려둔 채 당신의 이름을 영광되게 한다고 성당과 교회당을 세우고 값진 비단과 금으로 꾸며 놓았나이다.

 

당신의 하늘나라를 믿는 순진한 백성들로부터 양식과 재산을 당당히 뺏어가는 저들은 성당을 독사와 여우의 소굴로 만들었나이다. 큰 소리로 찬송가와 국가를 불러 가면서 종교와 정치 장사를 하는 저 간악하고 교활한 자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 주옵소서.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라고 당신의 사도(使徒)로 택함을 받았다고 자처하는 저들이건만, 얼마나 사분오열(四分五裂)이 되어 다투고 있는가 보옵소서.

 

저들은 우리 수난의 영혼과 고난의 몸을 자기네들의 속된 이권 싸움의 제물로 삼고 있나이다. 성스러운 축제일에 소리 높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는 영광이, 이 땅에는 평화가, 만인에게는 기쁨이 있으라고 외치나, 저들의 썩은 입술과 거짓말하는 혀로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께서는 진실로 영광을 받으시나이까?

 

가난한 농부들이 들에 나가 피땀 흘려 일하여 거두는 것으로 강자와 폭군만이 배를 불릴 때 이 땅에 어떻게 평화가 있을 수 있겠나이까? 굶주린 어머니의 마른 빈 젖을 빨면서 울어대는 젖먹이의 눈에 어떻게 평화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신부들이 배불리 먹고 남는 양식이 살찐 돼지에게 던져질 때, 고픈 배를 움켜잡고 돌바닥에서 잠이 드는 궁핍한 자에게 평화가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예수여, 기쁨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부귀를 누리는 자들이 가난한 자의 노동과 불우한 여인의 몸을 은전 몇 닢으로 살 수 있는 게 기쁨입니까? 눈부시게 휘황찬란한 보석과 훈장과 비단옷을 걸친 자에게 정신과 육체가 모두 노예가 된 백성들에게 기쁨이 있겠나이까? 사랑하는 처자식이 압제자의 말발굽에 짓밟혀 피로 땅을 물들일 때 압박 받고 짓밟힌 자의 절규(絶叫) 속에 기쁨이 있겠나이까?

 

, 예수여, 당신의 굳센 손을 뻗어 저희를 압제자의 손에서 구해내 주옵소서. 아니면 차라리 죽음의 사자를 보내시어 저희를 무덤으로 인도해 주소서. 그러면 우리는 당신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당신의 십자가의 그늘에서 평안히 잠들겠나이다. 진정코 우리의 삶은 악령(惡靈)들이 날뛰는 암흑이요,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골짜기에 지나지 않나이다. 예수여, 당신이 부활하신 이날에 당신의 이름으로 이 자리에 모인 이 무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이들의 약하고 비천함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이렇게 유한나가 하늘에 호소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를 에워싸고 서 있었다. 그중에는 유한나를 칭찬하는 이도 있고, 욕하는 이도 있었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저 젊은이 말이 옳소.”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니요, 저 사람은 사탄의 유혹에 빠진 거요. 우리는 조상 때부터 이렇게 어리석은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소.”

 

또 다른 사람이 그의 친구에게 귓속말을 했다.

 

저 젊은이의 말에는 내 마음을 흔드는 이상한 힘이 있어.”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그렇긴 해. 하지만 우리의 지도자들이 이런 일에는 더 많은 지식이 있지 않겠어? 그러니 그들을 의심할 수는 없지.”

 

수군거리는 이 모든 소리는 성난 바다의 파도처럼 일어나서 하늘로 흩어졌다. 한 신부가 유한나를 잡아 경찰에 넘겼다. 경찰은 그를 지사한테 데리고 갔다. 검찰이 그를 심문해도, 예수께서 그를 박해하고 심문하는 자들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유한나는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았다.

 

관리들은 그를 감방에 가두었다. 유한나는 감방의 벽에 기대어 편안히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 유한나의 아버지가 아들의 미친 것을 증언하러 지사 앞에 나왔다.

 

지사님, 가끔 제 아들이 혼자서 중얼거리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세상이 다 조용히 잠들었을 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허공에다 대고 지껄였습니다. 마술사들이 주문(呪文)을 욀 때처럼, 괴상한 목소리로 어둠 속에서 중얼거리곤 했습니다. 제 자식과 어울려 지내던 친구들한테 물어보십시오. 제 자식은 언제나 딴 세상에 정신이 팔려 친구들이 말을 건네도 대꾸도 좀체 하지 않았답니다.

 

간혹 제 자식이 대답하는 걸 보면, 횡설수설하는 엉뚱한 소리뿐 이었습니다. 그 애 에미한테 물어보십시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애 에미 말이 가끔 그 애가 정신 나간 사람모양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기도 하고, 어린애처럼 나무와 꽃과 시냇물과 별들하고 얘기하는 걸 들었다고 합니다. 수도원의 수도사들한테 물어보십시오. 어제도 그 애는 수도사들의 신앙심을 비웃고 성직자들의 거룩한 생활을 조롱했습니다.

 

지사님, 저 녀석은 미친놈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나 제 에미한테는 착해요. 우리는 늙었고, 그 아이는 우리를 부양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저희들 처지를 동정해 주십시오. 저와 그 애 에미를 생각하셔서 그 애에게 자비를 배풀어 주십시오.”

 

유한나는 석방되고, 그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 멀리까지 퍼졌다. 젊은이들은 그를 조롱하고 비웃었지만, 처녀들은 동정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사람이 저렇게 이상해지는 건 세상 탓일 거야.”

 

저 사람이 미쳤다지만, 빛나는 그의 눈은 아름답지!”

 

꽃과 나무로 덮인 산등성이 풀밭에 송아지들을 풀어 놓고 앉은 유한나는 눈물을 글썽이며 골짜기 아래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내려다보면서, 깊이 한숨짓고 되뇌이었다.

 

너희들은

여럿이고

나는 혼자다.

 

너희들 마음대로 해 봐.

어린 양이

밤의 어둠 속에서

사나운 이리떼의

밥이 된다 해도

그의 무고한 피는

새벽이 되어

해뜰 때까지

골짜기의 돌들을

붉게 물들일 거야.”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18 11:08 수정 2020.09.13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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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