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의 항간세설] 사랑의 전설 카든 씨

이태상

 


가슴 뛰는 대로 살다 죽은 꽃을 든 남자이야기 하나 해보리라.

 

1811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교육을 받고 자기 집 농토의 지주로서 바레인 성주(城主)가 된 카든 씨 이야기다. 이렇게 평범한 지주였던 그가 사랑 때문에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버린 이야기다.

 

어려서부터 여자를 좋아했고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던 그가 나이 40이 넘은 노총각일 때 어떤 여자를 한번 보고 깊은 사랑에 빠져 죽는 날까지 헤어나지 못한다. 카든 씨는 어느 날 친구 집 파티에 갔다가 열여덟 살 난 처녀한테 홀딱 반해버렸다. 그와 처녀 집 가족은 이날 이후 자연스럽게 친해져 서로 방문하며 같은 파티에도 참석한다.

 

그러나 한결같이 예의 바르고 상냥한 처녀에게 그는 좀처럼 사랑을 고백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만 해도 직접 상대방에게 구애하거나 청혼을 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의사를 타진하는 게 상례였을 때였으니까.

 

그래서 처녀의 언니를 통해 처녀에게 청혼을 했는데 그만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처녀 본인의 의사가 아니고 가족들의 반대 때문일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처녀의 본심에서라고 믿고 싶지 않아, 분명 타의에 의한 거라는 희망을 그가 품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 한 오라기라도 붙잡으러 들듯 그는 자기가 믿고 싶은 쪽으로 안간힘을 썼으리라.

 

처녀만 단독으로 만나 시간을 갖고 얘기할 수 있으면 처녀가 속으로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처녀가 가족들의 포로가 된 채 그가 구출해 줄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는 처녀에게 나와 함께 남몰래 사랑의 도피행을 하자는 정열적인 편지를 썼다. 편지를 받은 처녀는 이를 가족에게 공개했고, 그는 천하의 치한(癡漢)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그가 정중한 사과 편지를 썼으나 처녀의 집안에선 그와 더 이상 상종하지 않았고, 처녀는 그로부터 받은 모욕을 용서할 수 없다는 짤막한 답장을 보내왔다.

 

이렇게 실연(失戀)한 그는 한동안 폐인처럼 지내면서 온갖 궁리를 다 해 봤다. 처녀를 잊기 위해 먼 외국 땅 웨스트 인디스로 이주할 생각까지 해보았다. 그래도 처녀를 잊을 수 없어 마침내 목숨을 걸고 그는 처녀를 납치해서라도 구출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힌다.

 

그해 가을 스코틀랜드 스카이섬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러 가는 길에 마침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가는 처녀의 집 가족 일행과 같은 한배를 타게 되어 처녀의 행선지를 알게 된 그는 여정을 바꿔 처녀가 참석한 무도회에 나타난다. 그리고 처녀만 따라다니면서 처녀에게 계속 눈길을 준다.

 

그가 세운 납치 계획은 처녀를 일행으로부터 끌어내 여러 마리의 말에 번갈아 태워 고어웨이 해안까지 가서 거기에 대기시켜 놓은 요트를 타고 스카이섬에 도착하면 그의 친구가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리라는 것이었다.

 

사랑의 도피행을 위해 매입한 요트 내부를 거금을 들여 초호화판으로 새로 꾸미고, 처녀가 입고 쓸 값비싼 옷과 화장품 등을 비치해 놓은 다음, 처녀와 안면이 있어 낯설지 않을 자기 바레인성()의 하인들이 처녀의 시중을 들도록 그는 만반의 준비를 다 했다.

 

처녀를 납치할 준비를 착착 진행하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처녀가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다. 처녀와 처녀의 가족이 파지에 가면 그도 따라가서 처녀의 주변을 맴돌았고, 처녀의 일행이 아일랜드로 돌아가면 그도 돌아갔다.

 

드디어 처녀를 납치할 준비가 다 되었으나 뜻하지 않은 사고로 그 실행이 지연된다. 처녀가 말을 타다 발목을 삐게 된 것이다. 처녀의 집을 방문할 수 없는 그는 간접적으로 처녀의 소식을 수시로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리를 다친 처녀를 가족들이 잘 보살펴주지 않고 있으리라는 상상 아니 망상까지 한다.

 

생각하다 못해 그는 처녀의 오빠와 친하게 지내면서 협조를 얻어 보려고 한다. 때마침 오빠가 인도에 가게 되었는데 인도까지 가는 여정 일부를 처녀와 동행하게 될 것을 알게 되자 이 여행 중 오빠가 처녀와 자기를 만나게 해줄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는다. 그때 그렇게 해서 처녀를 만날 수 있었더라면 처녀를 납치할 계획을 포기했을 것이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오빠의 여행 출발 날짜가 되어서도 처녀의 발이 다 낫지 않아 처녀는 오빠와 동행할 수 없게 된다. 절박해진 그는 몇 번씩이나 처녀의 집으로 찾아가 처녀를 한 번 만나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한다. 자기와 처녀가 결혼할 수 있게 해주면 자기의 전 재산을 처녀의 집안에 넘겨주겠노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 편지는 사태를 악화시켰을 뿐이다.

 

처녀의 발목이 다 나아 처녀의 언니가 처녀를 데리고 파리로 가자 그도 따라가지만, 이번에는 처녀 가까이 접근하기를 삼간다. 아일랜드로 돌아온 그는 그의 요트를 고어웨이 해안에 정박시킨 다음 해안에 이르는 길 중간중간에 말들을 대기시켜 놓고 힘세고 믿을 수 있는 장정들을 동원, 만일을 위해 마취약까지 준비한다. 보쌈당해 가는 아가씨들이 흔히 히스테리칼 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1854년 그러니까 그들이 처음 만난 지 2년 후 72일 일요일 마침내 그가 기다리던 기회가 왔다. 그날 아침 처녀의 세 자매가 가정부와 함께 교회 성당에 간다. 성당 뜰에서 서성거리던 그가 이들을 따라 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처녀 일행을 태워서 갖고 온 마부가 마차를 집으로 몰고 가 덮개 있는 마차로 바꿔온다.

 

미사가 끝나 처녀 일행은 마차를 타고 귀갓길에 올랐는데 그가 말을 타고 달려온다. 그의 행동에 익숙해진 처녀 일행은 아직까진 별로 놀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이 탄 마차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건장한 젊은이 셋이 길가 고랑에서 뛰어나와 마차를 끌던 말들 고삐를 풀어버린 다음 마부를 칼로 위협하는 동안 카든 씨는 마차 뒷문으로 가서 처녀를 끌어내리려 한다.

 

처녀 일행이 성당 갈 때 타고 갔던 덮개 없는 마차였더라면 그는 쉽게 처녀를 잡아챌 수 있었을 텐데 미사 보는 동안 비가 오는 바람에 마부가 덮개 마차로 바꿔 온 탓에 일이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가 마차 속으로 달려들자, 뒷문 쪽에 앉아있던 가정부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코피가 나면서 그는 피투성이가 된다. 처녀를 끌어내리기 전에 이 황소 같은 가정부를 처치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가정부를 마차에서 길가로 떠다밀었다. 이 순간 그의 부하들은 그 즉시 납치 대상인 처녀를 가정부로 잘못 알고 가정부를 들어다 근처에 대기시켜 놓았던 마차에 태운다. 이러는 동안 처녀의 언니가 마차에서 뛰어내려 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하자 하인들이 마부와 합세해 카든 씨의 괴한들과 싸우기 시작한다.

 

가정부와 처녀의 언니가 빠진 마차에 남게 된 처녀와 처녀의 동생 두 자매 중 우선 동생을 마차 밖으로 끌어낸 다음 처녀를 끌어내려는 순간 그는 머리 뒤통수를 몽둥이로 얻어맞고 나가동그라진다. 그러면서도 카든 씨는 안고 있던 처녀를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의자에 내려놓는다.

 

처녀의 저택에선 하인들이 있는 대로 몰려나와 합세를 하게 되자, 카든 씨는 부하들에게 미리 마련해주었든 총을 쏘라고 한다. 그러나 이미 중과부적으로 그는 말을 타고 그의 부하들은 처녀 집 가정부를 태운 마차로 도망간다.

 

그러다가 경찰추격대에게 잡혀 카든 씨는 감옥에 갇힌다. 이 소식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 특히 부녀자들이 감옥 입구에 몰려들어 그를 영웅으로 추켜 환호했으며, 아일랜드의 모든 지주들이 크게 동정하여 감옥으로 그를 방문, 그의 구애가 앞으로 성취되기를 빌어주었다.

 

그의 재판은 당시 굉장한 인기가 있어 아일랜드의 귀족 집안 부인들과 딸들이 방청석을 얻으려 애썼다. 참으로 사랑은 동서고금 누구의 가슴 속에나 있는 꿈이 아니런가. 납치, 납치미수, 폭행 상해죄, 세 가지 죄목으로 그는 재판받았다. 재판받으면서도 처녀가 재판장에 증인으로 나오게 되면 처녀를 가까이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뻐했다. 그는 자기 변호인에게 자기는 사형언도를 받게 되어도 좋으니 자신에게 유리한 증언을 받아내기 위해 처녀를 조금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했다.

 

처녀는 추궁이나 심문을 받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그가 마차에서 자기를 끌어내리지 못했다고 증언을 해 납치미수죄만 그에게 적용되어 그는 중노동의 2년 징역형을 받았다. 첫째 죄목 납치와 함께 셋째 죄목 폭행 상해죄는 방청객들이 너무 심하다고 분노하는 바람에 배심원들이 무죄 평결을 내렸다.

 

재판장은 그가 다시는 처녀를 괴롭히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 그를 석방해주겠다고 했으나 처녀를 그가 포기한다는 것은 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각서를 쓰느니 차라리 크리미아 전쟁에 사병으로 자원입대 출전하겠노라고 했으나 허락되지 않아 그년 2년의 징역살이를 했다.

 

1856년 형을 다 산 그는 그의 출옥을 환영하는 무리를 피해 조용히 형무소를 떠났다. 세상 사람들이 낭만적인 영웅으로 자기를 치켜세워도 그는 이런 인기에 관심 없었고, 재판받는 동안에도 그랬지만 그 후에도 언제나 처녀와 처녀의 가족들에게 죄송하다 사과하면서도 처녀를 한시도 잊거나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처녀의 오빠를 인도로 찾아가 처녀와의 결합이 이루어지도록 도와달라고 해보았으나 허사였고, 아일랜드로 돌아와 처녀 집안 어른들에게 재삼, 재사 청을 드려봤으나 소용 없었다. 이렇게 끝까지 그가 처녀를 단념할 수 없었던 것은 처녀가 마음속으로는 자기를 남모르게 사랑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랄지 망상을 계속 키워나갔기 때문이었으리라.

 

처녀 집안에서 일하던 한 하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쫓겨나자, 이는 필시, 자기한테 비밀로 보내는 처녀의 편지를 하녀가 갖고 나오다 발각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단정한 그는 이 하녀를 만나 확인해 보려고 했다. 이런 약점을 이용하려는 하녀의 한 친척이 거짓말로 자기가 처녀와 자주 몰래 연락이 있는데 실은 처녀가 카든 씨를 열렬히 사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미치게 보고 싶어 한다고 그에게 말해줬다.

 

이로 인해 카든 씨와 처녀는 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고, 처녀는 판사 앞에서 카든 씨를 혐오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시는 보기를 원치 않는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카든 씨에게는 앞으로 처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라는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처녀의 법정 진술조차 처녀의 진심이 아니고 처녀의 가족들이 강요한 것이라고 믿는 까닭에 그에게 법원명령은 아무 효력이 없었다.

 

그 후로도 여러 해를 두고, 그는 처녀가 가는 곳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에서 그는 처녀가 혼자 있는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녀와 단둘이 있어 보기는 처음이었다. 처녀는 카든 씨 보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방에서 당장 나가 달라. 안 그러면 자기가 나가겠다고. 아무 말 없이 그 방을 나와 그는 아일랜드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행여나 처녀가 찾아올까 하여 그날을 대비해서 자기 바레인성() 내부를 대대적으로 개조하고 터키식 목욕실을 비롯해 온갖 호화시설을 다 갖춰놓았다.

 

이렇게 처녀가 자기를 찾아줄 날만 기다리며 살다 그는 1866년 세상을 떠났다. 한편 처녀는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 무정하고 교만한 여자라고 욕을 먹고 마음대로 밖에 나다니지도 못하게 되었다. 카든 씨 말고 구애하는 남자도 없어 끝내 아무하고도 결혼을 못 한 채, 독신으로 스코틀랜드에 사는 여동생의 집에 가서 조카들 가정교사로 있다가 죽었다.

카든 씨의 처녀납치사건에 대한 반응은 아일랜드와 영국이 판이했다. 영국 언론에선 풍자 섞인 조롱 조로 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카든 씨의 인기를 꼬집었다. 수 세기에 걸쳐 영국의 식민지 백성인 아일랜드 사람들의 다혈질적인 야만성의 한 표본이라며, 이러한 원시적 구애법이나 관습이 개명된 영국에까지 전염병같이 파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영국의 전통적인 귀족 계급의 유산 상속녀 신붓감들이나 이들의 후견인들에게는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유괴행위가 돈 많이 들고, 복잡한 결혼식 절차보다 얼마나 값싸고 간편한 수단이 되겠냐고 비꼬는 영국 언론에 아랑곳없이 이 사건은 세월이 가도 잊히지 않고, 모든 아일랜드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수많은 민요를 통해 전해오면서, 만인의 심금(心琴)을 울려주고 있다.

 

이 사건을 소재로 삼은 노래의 가사로 퍼시 프렌치란 사람이 지었다는 바레인성() 샘터에 앉아가 있다.

 

나 바레인성 샘터에 앉아

그 사내를 그려보네.

제멋대로 고집 세고

애틋한 환상에 사로잡힌

가엾은 그 사내를.

 

너무도 아름답고 매력 있는

그 처녀를 잊지 못해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미행과 납치 계획으로

지새우며 보낸 밤과 나날들

잘 달리는 말들과

호화롭게 꾸민 요트

그의 전부를 다 바쳐

그의 목숨과 삶을 건

도박이요 모험이었지.

 

이렇게 일편단심으로

추구한 이 한 가지 행복을

그는 놓치고 말았다네.

그의 생명보다 소중했던

바로 그 처녀가

그의 짝이 되지 않겠다고

그녀의 작은 두 주먹으로

그를 두들겨 패는 바람에.

 

, 태곳적 옛날에

사랑을 했던 우리 조상들은

이렇지 않았었지.

 

선사시대 원시인들은

이러쿵저러쿵 말할 것도 없이

좋아하는 처녀를 덥석 안아

제 동굴로 가는 것이

관습이었지 죄가 아니었다네.

 

내가 재판장이었더라면

난 그 사내를

감옥에 넣지 않았을 거야.

 

내가 비록 그 사나이처럼

용감무쌍하고

날 사로잡을

아름답고 매력 있는

처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 처녀를 위해 파 놓은

이 사랑의 샘가에 앉아

그 사내가 못다 부른

이 노래를 불러 보네.

 

그 사내가

그 처녀를 위해

헛되이 파 놓은

이 사랑의 샘터에 앉아

어쩌면 이 세상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로운 세상에서

그들이 다시 만나는

상상을 해 본다네.

 

그곳에는 그 사내를 불태울

정열의 태양이나

그 처녀를 두려움에 떨게 할

얼음바다가 없을는지 몰라도

 

[이태상]

서울대학교 졸업

코리아타임즈 기자

코리아헤럴드 기자

뉴욕주법원 법정통역관

전명희 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25 11:31 수정 2020.09.1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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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