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보는 근현대사] 영등포의 밤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

라희·김부해·오기택

<영등포의 밤> 노래의 발상지 서울 영등포(永登浦). 영등(永登)은 신길동 방아곶이나루터(신길동 50번지)부근 성황당에서 영등 굿을 하던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영등 뒤에 붙은 포()는 바닷가나 강가에 나룻배나 갯배를 정박시키던 곳. 한자 영등(影燈·燃燈) 표기가 오늘 날 사용하는 글자와 다른 점이 영등 유래의 곡절 파악을 더욱 어렵게 한다. 일본제국주의 암흑기와 해방정국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마포에서 바라다 본 강 건너 영등포는 너무 먼 곳이었다. 불빛만 가물거리고 길거리는 질척거려서 고무신발을 신지 않고는 다니기가 어려웠던 흙탕 진창. 그래서 진등포라고 비하하기도 했었다. 1963년 이 진등포가 <영등포의 밤> 노래로 환골탈태(換骨奪胎)의 날개를 단다. 1962년 말, 라희가 노랫말을 엮고 김부해가 붙인 곡을 저음의 마법사 오기택이 데뷔곡으로 세상에 고했다.

 

궂은 비 하염없이 쏟아지는 영등포의 밤/ 내 가슴에 안겨 오는 사랑의 불길/ 고요한 적막 속에 빛나던 그대 눈동자/ ~ 영원히 잊지 못할 영등포의 밤이여// 가슴을 파고드는 추억어린 영등포의 밤/ 영원 속에 스쳐 오는 사랑의 불길/ 흐르는 불빛 속에 아련한 그대의 모습/ ~ 영원히 잊지 못 할 영등포의 밤이여.(가사 전문)

 

https://youtu.be/avLpWSgGWgc

 

서울 서남부 대부분을 통칭하던 이곳은 조선시대 초기까지는 경기도 금주현(錦州縣)이라고 하다가 태종15(1415)에 금천현으로 불렸다.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 직후 191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시흥군 하북면 하방하관리(下方下串里)와 중종리(重宗里)를 합쳐서 북면 영등포리로 불렀고, 1920년 영등포면이 되었다가 1931년 읍으로 승격된다. 1936년 경기도에서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영등포정(永登浦町)이 되었다가 해방광복 이듬해인 1946년 영등포동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201012월 노래가 탄생된 지 48년 만에 노래비가 세워진다. 영등포 타임스퀘어 문화광장 한쪽에. 오늘날 신세계백화점 앞마당이다. 노래의 주인공 오기택은 휠체어에 몸을 의탁하여 행사에 참석하여 당시를 회고한다. 숨 가팔랐던 시절, 희망의 멜로디를 절창하던 그 시절을. 노래비가 세워진 자리는 경성방직(京城紡織)공장이 있던 곳. 경성방직은 면직물과 실을 주로 생산하는 업체로 191910월에 세워졌다. 동아일보 창업자 김성수와 삼양사 창업자 김연수가 전국을 돌며 11주 공모방식으로 자본금을 마련한 한국인 소유의 국내최초 주식회사로 볼 수 있다.

 

오기택의 삶은 곡절이 많다. <영등포의 밤>을 부를 당시 그는 23세였다. 1939년 해남에서 외아들로 출생한 그는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학시절에 어머니마저 천국으로 보낸다. 의탁할 것은 서울의 외삼촌, 그 슬하에서 성동공고를 마쳤다. 그는 1960년 동화예술학원(고복수 운영)에서 노래를 배우다가 1961KBS직장인 노래자랑에 동화백화점 대표로 출전(노래, 비극에 운다)하여 1등을 한 후 이듬해 <영등포의 밤>으로 데뷔를 한다. 그는 오디션만 받고 전속계약을 한 특이한 가수다. 이 콩쿠르를 TV중계로 보고 있던 작곡가 김부해가 오기택을 찾아와 그를 한국작가모임동지회사무실로 데려간 것이다. 그곳에서 전수린·형석기·손목인·박시춘·반야월·조춘영을 만난다. 그리고 김부해가 문예부장으로 있던 신세기에 전속계약을 맺는다. 음반 취입 없이 전속계약, 그때 받은 계약금은 거금 5천원이었단다. 그는 1963년 해병대 홍보단에 입대했다가 1965년 전역한다. 이후 1966<아빠의 청춘>, <고향무정>, <충청도 아줌마> 등을 히트하며, 1966년 남궁원·엄앵란이 주연한 영화 <아빠의 청춘>에도 출연(감독 강민호)한다. 당시 그의 인기는 <동백아가씨> 이미자와 견주기도 했었다. 이 곡은 왜색 가락으로 지목되어 금지되기도 했으며, 1972년 은방울자매가 리메이크했었다.

 

노래탄생 사연도 흥미롭다. 그 무렵 김부해는 동아방송 주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영등포 여관에 묵었다. 콩쿠르 진행 3일간 비가 계속 내려 진등포의 불편을 감내해야 했단다. 낮에는 흙탕의 길, 밤에는 여관방 객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어야만 했던 것. 이러한 상황이 바로 멜로디의 모티브가 된다. 가수 선택도 당시 영등포에 기거하던 오기택, 신세기레코드에서 출반을 한다. 영등포는 6.25전쟁 중, 9.28서울수복을 위한 주요 공격로다. 1950915일부터 27일까지, 미 해병5연대가 행주나루를 도하하여 서대문으로 진격을 할 때, 해병1연대와 국군17연대는 김포가도·영등포지역의 북한군 제9사단 87연대와 제18사단을 격파하고, 서울 중심부로 진격한다. 17일 부평, 9일 소사 및 영등포, 21일에 김포, 27일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할 때까지. 그 당시 영등포 주변은 해발 80~110고지의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유차영]

문화예술교육사

솔깃감동스토리연구원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7.10 11:49 수정 2020.07.1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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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