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상 칼럼] 박원순 서울시장 영전에 바치는 글

이태상

 

현재는 미국 뉴저지주에 거주하고 있지만 아이서울유I-SEOUL-U’ 의 한 사람으로, () 서울시민으로서, 그것도 1960년대 김현옥 시장 재임 시 한국일보 자매지 영자신문 코리아타임스 서울시청 출입 기자 출신으로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접하고 경애하는 박 시장님 영전에 삼가 이 조사(弔詞/弔辭)를 바칩니다.

 

201631일 출간된 우생의 졸저 사상이 아니고 사랑이다2장에 아래와 같은 글을 올렸습니다.

 

박원순 서울특별시장님께 드리는 공개편지:

아이서울유(I.SEOUL.U)’ 풀이

 

이젠 서울시가 만든 새 브랜드 아이서울유(I.SEOUL.U)’를 택시나 공공장소에서 마주치게 됐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인터넷엔 아이유가 장악한 서울시를 표현한 것이라는 식의 패러디가 넘치고, “나는 서울 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며 콩글리쉬라는 조롱의 폄훼가 판치자 서울시는 이 문구가 서울(Seoul)’을 동사형으로 활용했다고 설명한다는데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의 한 사람으로 서울시민과 한국인 모두에게 극히 외람되나마 한 마디 드리고 싶어 몇 자 적습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아야 한다는 말처럼 매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풀이하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가 생기지 않습니까? 개인이고 국가이고 간에 자중자애(自重自愛)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비하할 때 아무에게서도 존중받지 못하는 법입니다.

 

20151031일자 한국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한국에 살며라는 칼럼 한국인의 삶은 지옥인가에서 영국인 배리 웰시 숙명여대 객원교수 겸 서울북앤컬처클럽 운영자는 다음과 같이 헬조선개념을 요약한 후 이러한 이유로 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한다이는 국가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헬조선 개념에 따르면 한국은 평범한 사람은 배척시키고 끝내 굴복하게 만드는 잔인한 사회구조를 가진 곳이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해야 하며 남자의 경우 군대에 가야 한다. 또한 취직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많은 이들이 세계 최장 시간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한국의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만약 대기업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여러 가지가 문제가 되며, 낮은 수준의 삶을 사는 것으로 느낀다. 반면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집안에서 태어나면 낙하산과 인맥을 통해 혜택을 누리기 때문에 이러한 한국 사회의 잔인함을 피해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정의롭지 못한 특혜를 누리며 즐겁게 살아간다.”

 

이러한 인식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온실의 화초가 못 된 걸 한탄하고 비관, 절망한다는 말인데, 젊은이들이 간과할 수 없는 한 가지 엄연한 사실과 진실이 있습니다. 다름 아니고 온실의 화초는 결코 큰 나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대기업 창업자들을 비롯해 오늘날 젊은이들의 부모와 조부모는 하나같이 온실의 화초가 아닌 잡초 억새풀들이었습니다.

 

일정시대인 1936년 평안북도 태천에서 태어나 8.15, 6.25, 4.19, 5.16을 다 겪고, 영국과 미국으로 떠돌면서 인생 80년을 살다 보니 깨닫게 된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진리란 탁상공론(卓上空論)으로 성경, 불경, 도덕경 등 성인성자들의 가르침이 아니고, 살면서 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제가 몸소 체득한 것입니다.

 

최근 발라드 황제 신승훈(당시 47)9년 만에 11번째 정규 앨범 아이 앰 앤 아이 앰(I am & I am)’을 발표했다는데 이 앨범 타이틀을 달리 표현하면 유 아 앤 유 아(U are & U are)’가 되겠지요. 그리고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신승훈이 작사와 작곡에 참여하지 않은, 가수 정준일이 만든 노래로 배우 김고은이 함께한 수록곡 , , 별 그리고 우리가 있다지요.

 

앞에 언급한 진리로 돌아가서, 이를 제가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넌 너, 난 나우린 다 별들이 되겠습니다. 좀 풀이해보자면 아이서울유가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이(I),’와 너 (u)’ 사이에 서울S(e)oul’ 그리고 우리 서로 사랑(Love)하면 넌 나가 되고 난 너가 되는 동시에 어떻든 가릴 것 없이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대우주의 축소판 소우주가 되는 것이지요. 우리 모두 우주 나그네 코스미안 (Cosmian)’ 그것도 사랑이란 무지개 타고 이 지구별에 잠시 들린 방문객 코스미안 어레인보우(Cosmian Arainbow of Love)’이란 말입니다.

 

이 점을 널리 홍보해주시면 좋겠다는 우생(愚生)의 졸견(拙見)을 감히 말씀드려 보는 것입니다.

 

망언다사(妄言多謝)

 

2016년 봄이 오는 길목

미국 뉴저지주에서

이태상 드림

 

한국의 대표적인 인권, 민초들의 민권 변호사로, 특히 한국 최초의 성희롱 재판으로 불리는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1992)에서 무료로 피해자 변론에 나섰고, 서울시장이 된 뒤에는 서울을 성평등 도시로 만들겠다며 여성친화적 시정에 주력했으며, 지난해에는 전국 지자제 중 처음으로 성평등 임금 공시제도입을 시도하신 박 시장님께서 최근 전직 비서로부터 성추행 혐의로 고소당한 사실이 피소 당사자 본인에게 큰 부담이 되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따님이 9일 오후 5시 17분쯤 박 시장님의 실종을 신고하면서 “4~5시간 전에 아버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암시하는 통화를 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고 말했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우리 각자의 뜻이 아니었듯이 생로병사로 이 세상을 떠나는 것 또한 우리 각자의 뜻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연사든 사고사든, 자살이든 타살이든, 미시적으로 보면 그 누구의 잘 잘못, 책임을 지울 수 있겠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그 구분이 불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치 어린 왕자가 자기 별로 돌아가기 위해 이 지구별 사막에 사는 독사의 도움을 받듯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따로 없이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예부터 인명재천(人命在天 )이라 하나 봅니다.

 

부조리의 연극이라 불리는 극작품들이 있습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 유럽과 미국 극작가들의 작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 그대로 인생의 부조리성을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연극의 기능이고 작업이란 뜻이지요.

 

잘 아시겠지만, 부조리라는 실존주의 철학용어로서 사용되는 단어는 프랑스 작가 알베르 까뮈의 부조리 철학에 의해 알려진 것으로 인생에서 삶의 의의를 찾을 희망이 전혀 없는 한계상황적, 절망상태를 가리키는 데 쓰이지요. 산다는 것이 부조리하다는 생각은 1942년 까뮈의 에세이 시지프스의 신화가 발표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지요. 이 에세이에서 까뮈는 말합니다.

 

()들은 시지프스에게 쉴 사이 없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형벌을 가했지요. 산꼭대기에 이르면, 바위는 그 자체의 무게로 말미암아 또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무익하고도 끝날 가망이 없는 노동이란 무섭고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이 신들을 경시한 그의 태도와 행위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는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것입니다. 시지프스가 부조리의 영웅임을 이만하면 알 수 있지요. 그의 고뇌뿐만 아니라 그의 정열로 인해 그는 부조리의 영웅이 된 것입니다. 신들에 대한 그의 도전, 죽음에 대한 그의 반발, 생명에 대한 그의 애착과 열정이 결단코 성취될 수 없는 일에 그의 온 힘과 존재를 다 바쳐 일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 절망적인 형벌을 그는 자초한 것이지요.

 

이렇게 세상이 부조리하다고 정의하는 것은 인생이 본질적으로 신비하고 풀 수 없는 수수께끼 같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와 같은 인식은 삶의 방향과 목적과 의욕을 상실하는 데서 오는 당혹감에서 출발하지요. 이같은 인간실존의 부조리성을 다룬 작품으로 아일랜드 출신이면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한 극작가 사뮤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있습니다.

 

고도(Godot)’란 누구일까요? 1952년 발표되어 그 다음 해 1953년 파리에서 프랑스어로 무대에 오른 이후 세계 각국에서 여러 나라 말로 거듭 상연되어 온 이 극작품에는 에스트라곤과 블라디미르라는 두 부랑자(浮浪者)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고도라는 이름의 신비스런 인물을 끝없이 기다리면서 이렇다 저렇다 다투지요. 그가 올 예정된 시간과 장소가 어느 때 어느 곳 언제 어디라고 서로 질세라 우겨대면서 이들은 재치문답의 말장난을 하며 놀고 있습니다.

 

2막으로 된 이 연극의 각 막이 끝나 갈 무렵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의 왕림, 도래가 임박했다고 전합니다. 하지만 그는 오지 않고 제1, 2막 다 두 부랑자의 다음과 같은 대사로 막이 내리지요.

 

, 이제 우리 갈까?”

그러지, 이제 우리 가세.”

 

그러나 둘 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동정과 연민, 희망과 기지가 가미된 인간의 무지와 착각 때문에 생기는 무기력한 마비 상태가 상징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 묘사되고 있지요. ‘고도(God)’ 의 지소사(指小辭)임이 분명하지만 어쩌면 ()’이라는 ‘God’와 바보라는 뜻의 ‘idiot’란 두 단어를 복합한 합성어 고도 (Godot)’를 통해 어리석은 인간의 허망허탄(虛妄虛誕)한 허탕을 꼬집고 인간의 참된 구원과 행복의 조건은 외재(外在)하는 것이 아니고 내재(內在)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시지프의 신화에서와 같이, 행복이란 누가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만들어 누리는 것임을.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할 때 한국의 링컨이 되기를 희망했었고 2004318일자 미주판 중앙일보 오피니언 페이지 탄핵 정국 어떻게 볼 것인가에 저는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습니다.

 

노짱은 노짱다워야

 

미국의 2인조 가수 에멀리 세일리어스와 에이미 레이로 구성된 남빛 소녀들(Indigo Girls)’의 수많은 인기곡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아주 훌륭하고 괜찮아(Closer to Fine)’의 가사 일부는 다음과 같다.


난 당신에게 인생에 대해 뭔가를 말해드리려 합니다. /

그러니 내게 통찰력을 주십시오./

흙과 벽 사이에/

당신이 내게 해준 가장 좋은 일은/

내 삶을 좀 덜 진지하게 다루도록 날 도와준 것이랍니다./

결국 단지 삶이니까요./

어떻든 어둠은 채울 수 없는 굶주림이고

빛은 듣기 힘든 소리이지요./

난 포대기처럼 두려움으로 내 몸을 감싸고/

안전이란 내 배가 침몰할 때까지 항해했으나/

난 이제 당신의 해안 육지로 기어오르고 있습니다.

 

난 의사에게 갔었고/

난 산에도 갔었고/

난 애들도 믿어보았고/

난 샘물도 마셔보았지요./

모든 문제엔 답이 하나 이상임을/

똑바르지 않고 구부러진 선으로/

또 결정적인 명확성을 위해/

내 근원을 덜 찾을수록/

내가 아주 괜찮아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특히 우리 노무현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던져 주고 있다. 노 대통령은 최근 이렇게 말했다.

 

미국 제7대 대통령 앤드루 잭슨은 나와 비슷하게 학력이 낮다. 독학으로 공부해서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대통령이 됐다. 그의 별명은 커먼맨(Common Man) 보통 사람이다. 그때부터 미국의 귀족민주주의가 대중민주주의로 바뀌었다. 그 때 미국은 서민 대통령을 필요로 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제왕적 대통령에서 민주적 대통령으로 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도 그런 시대적 흐름이 있다.”

 

그렇다면 노짱은 노짱다워야 하지 않을까. 그는 그의 단점을 그의 장점으로 역이용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을 기대해 본다. 그의 약점이 오히려 그의 장점으로 전환 될 수 있는 매력적인 시대가 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우리가 모두 명심불망(銘心不忘)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선인들께서 말씀하였듯이 학무식(學無識)은 구제할 길 있어도 인무식(人無識)을 구제할 길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의 에디푸스는 러시아의 소설가 도스토예프스키의 킬리이로프와 같은 표현으로 부조리를 포용한다. 고대의 예지(銳智/銳志/豫知/叡智)가 현대의 영웅주의와 결부된다. 부조리를 발견한 자는 누구나 행복에 이르는 길잡이 안내서 같은 것을 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뭐라고? 그렇게 힘들고 좁은 길을 걷지 않고는 행복에 이르지 못한단 말이냐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러나 세계는 하나밖에 없다. 행복과 부조리는 동일한 대지에서 태어난 쌍태아이다. 이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물론 행복은 반드시 부조리의 발견에서 생긴다고 한다면 잘못이리라. 행복에서 부조리의 감정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여기에 바로 시지프스의 남모를 기쁨이 있다. 시지프스의 운명은 시지프스의 것이다. 시지프스의 바위는 시지프스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짱의 기쁨도 여기에 있고, 노짱의 운명과 바위는 노짱의 것이니 노짱은 노짱다워야 노짱이라고, 노짱에게 이 격려문을 띄운다.

 

2009523일 자택 뒷산인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자살한 후 그가 미처 다 이루지 못한 일을 현 문재인 대통령이 또한 다 이루지 못할 경우, 박 시장님께서 이어받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이루어주실 것을 바라던 우리 모두 대망의 꿈이 이렇게 깨지다니 허망할 뿐입니다.

 

본래 신화란 인간의 상상력이 그 생명을 불어넣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지요. 우리들에게는 다만 시지프스가 저 거대한 돌을 밀어 올리는 그의 혼신의 노력이 보일 뿐입니다. 긴장한 그의 얼굴, 돌에 밀착된 그의 뺨, 진흙에 뒤덮인 바윗덩어리를 지탱하는 그의 어깨, 돌과 한 덩어리가 된 몸을 받치고 선 그의 두 다리, 흙투성이 된 그의 두 손으로 굳게 움켜잡아 쥔 너무도 인간적인 정확성과 집착력이 우리에게 여실히 보일 따름입니다. 도달할 하늘이 없는 공간과 끝나는 날이 없는 시간 속에서 계속되는 이 길고 한없는 노력 끝에 일견 목적이 달성되지요. 그러자 어느새 돌은 순식간에 하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시지프스는 보고 있습니다. 하계로부터 다시 기백 번, 기천 번째 그 돌을 그는 산꼭대기로 올려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는 다시 내려갑니다.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주말이면 월말이면 또 연말이면 반복되는) 이 하산(下山), 이 휴식,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시지프스에게 지대한 관심을 갖게 합니다. 기진맥진하여 돌 가까이 가는 그의 얼굴은 돌 그 자체입니다. 무거우나 틀림없는 발걸음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고뇌의 발걸음으로 그는 산을 내려갑니다. 이를테면 호흡작용처럼 그의 불행이 반복되는 이 순간, 이것은 의식을 되찾는 순간이지요. 산꼭대기를 떠나 신들의 거처로 내려가는 이때 시지프스는 순간마다 그의 운명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는 그의 운명의 바위보다 굳셉니다.

 

시지프스의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그 주인공의 의식이 눈을 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공한다는 희망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그를 떠밀고 있다면 그는 어떠한 어려움도 감수,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노동자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또는 감성적이든 매일 같은 일에 종사하고 그의 운명은 시지프스의 것에 못지않게 부조리하지요. 그러나 그가 비참해지는 것은 그의 의식이 눈을 뜨는 희귀한 순간뿐입니다.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면서도 반항하는 시지프스는 자기의 비참한 조건의 전모를 알고 있습니다. 산을 내려오면서 줄곧 그가 생각하는 것은 이 비참하고 절망적인 조건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의식하는 그의 인식이 그의 승리를 완벽하게 합니다. 날마다 시지프스의 하산은 고통스러운 자학(自虐)의 행로이지만 그것은 동시에 기쁨에 찬 자존자대(自尊自大) 곧 자애(自愛)의 행로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시지프스가 바위로 돌아온 장면을 상상해봅니다. 고통은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대지의 아름다운 광경이 너무나 기억에 생생할 때, 행복을 갈망하는 부르짖음이 너무나 격렬할 때, 너무도 비통한 비애가 인간의 가슴을 채웁니다. 이것이 바위의 승리요, 바위 그 자체입니다. 끝없는 고통과 한없는 비애란 인간으로서 감당 못 할 일이지요. 이것이 우리들의 겟세마네의 밤입니다.

 

에디푸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디푸스는 그가 그의 운명을 알게 되는 때부터 그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을 알게 된 바로 그 순간, 눈이 멀고 절망한 에디푸스는 이 세상에 자기를 붙들어 매는 유일한 끈은 생기 넘치는 젊은 딸이란 것을 알게 되지요. 그리하여 이때 경이로운 말이 들립니다.

 

이와 같은 많은 고통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나의 노령(老齡)

내 영혼의 위대함은

나로 하여금 판단케 한다.

모든 것은 다 좋다고.

 

모든 것은 다 좋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렇게 에디푸스는 말합니다. 이 말은 숭고하지요. 이 말은 인간의 잔인하고 무정 무한한 우주 속에 쩡쩡 울립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이 과거에 다한 일 없고, 현재도 다 하지 않으며, 미래에도 다하지 않을 것임을 알려 줍니다. 이 말은 인간의 운명을 인간이 풀어야 할, 인간의 문제로 바꾸어 놓지요. 여기에 시지프스의 남모를 기쁨이 있습니다.

 

시지프스와 에디푸스의 운명은 제각기 시지프스와 에디푸스의 것이듯 선구자(先驅者)로서 이 지상에서의 여정(旅程)을 이제 이만 끝내시고 코스미안으로서의 우주적 우로역정(宇路歷程)에 오르신 박 시장님의 명복을 빌면서 부디 이 지상에 아직 머물고 있는 중생(衆生)들을 굽어살펴 선도해주시기를 앙망하옵니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7.11 11:02 수정 2020.07.12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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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