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인문학 여행] 마키아벨리와 카트린 왕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실천한 카트린

김용필

 

1. 운명의 여인들

 

마키아벨리와 카트린 왕비는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이루지 못하는 사랑의 아픔에 절규했던 슬픈 연인이었다. 그러나 국부론을 실천한 그녀는 프랑스를 강대부국으로 만들었다.

 

로마제국은 근친상간의 더러운 피로 망했다. 불륜과 욕정으로 얼룩진 더러운 피가 섞이면서 로마는 망했다. 율리아. 리비아. 아그리피아 같은 여인들이 로마를 망쳤다. 그리고 프랑스는 메디치 가문의 황녀 카트린 드 메디치 왕비와 루이 16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허영에 들뜬 왕비의 사치로 망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와 앙리 2세의 왕비 카트린은 세상에서 가장 여성스럽고 정숙한 왕비였다.

 

역사의 조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유순하고 착하고 순수한 두 여인은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오명을 쓰게 되었다.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오스트리아 황녀의 상속녀란 이유로 카트린은 부유한 메르치 가문의 딸이란 이유로 핍박을 받았다. 그러나 카트린은 마키아벨리의 국부론으로 명예를 회복했으나 앙투아네트는 결코 명예를 회복 받지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국부론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역사 철학자였다. 그는 명문 법률가의 집에서 태어나 피렌체의 고위 행정관이 되었다. 외교와 국방을 책임지는 최고행정관 시뇨리아의 비서로 프랑스에 체류하면서 외교사절로 일했다. 그가 집정관으로 있으면서 1513년 프랑스 종교회의를 해산한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으나 결국 공모자로 형을 받고 나왔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고 조반니 데 메디치가의 레오 10세가 교황으로 즉위하자 그는축복받은 영들의 노래를 작곡하여 메디치가에 바쳤으나 환대받지 못하고 가난한 빈민촌에 은둔하면서 군주론을 완성하였다.

마키아벨리는 다시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군주론을 헌정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또 실패했다. 로렌초 공이 죽고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클레멘스 7)가 피렌체를 다스리게 되자 마키아벨리에게 새로운 희망이 생겨났다. 추기경은 그를 1520년 피렌체 공화국의 사료 편찬 관으로 임명하였다.

 

1521년 레오 10세가 사망하자 줄리오 추기경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재검토하고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본격적인 정치개혁을 추진하였다. 1523년 레오 10세가 요절하자 줄리오 데 메디치는 클레멘스 7세는 그에게 피렌체 사를 집필하게 하였고 15268권의 완성본을 헌정하자 엄청난 사례금을 받았다.

그 후 메디치가가 사라진 피렌체에 새 정부가 들어서고 새 정부는 그가 메디치가와의 인연 때문에 외면했다.

 

2. 국부론은 강력한 통치력이다.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선 강력한 군사력과 지도력을 가진 군주가 필요하다. 개인의 능력과 활동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자유로운 르네상스 지성들은 영적 권위를 상실하고 세속 권에 물들어 돈에 눈이 먼 부패한 교황과 황제를 버리고 진정한 종교와 도덕률에서 근본을 찾아야 한다.’

 

군주론은 국가의 위기와 사회 혼란을 잠재울 수 있는 힘이다. 군주란 교황이나 황제 또는 어느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영도자를 말한다. 따라서 국가는 신의 섭리나 황제의 사욕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국민정신과 자연법의 원리에서 나온다. 따라서 군주는 냉철한 지성과 심사숙고한 판별력으로 오로지 국가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종교와 도덕을 초월하여 지성과 의용으로 돌진해야 한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자기희생과 선정을 베풀어 항상 국민의 마음을 파악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는 총명함을 지녀야 한다.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선 절대적인 통치력과 강력한 군대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권력과 국가의 문제는 도덕의 문제를 넘어선다. 따라서 군주는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절대적 권력을 가져야 한다.‘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라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이론을 피력하였다.


3. 사랑의 힘


카트린은 마키아벨리의 국부론으로 프랑스를 손에 넣어 영웅적인 황후가 되었다. 피렌체 메디치가의 공주 카트린은 155314세 때 프랑스의 앙리 2세와 결혼을 하였다. 어느 날 메디치 가문의 교황인 아버지 클레멘스 7세는 마르세유의 왕 프랑수아 1세에게내 딸 카트린을 며느리로 맞이하는 게 어떤가라고 물었다. 프랑스 왕가는 메디치 가문의 재력 때문에 수락하였다. 그런데 클레멘스 교황이 암살당하고 어린 딸 카트린은 수도원에 보내졌다. 부모님을 잃은 슬픔에 늘 성격이 활달하지 못했다. 그녀는 너무 못생긴 추녀인데 할아버지가 엄청난 지참금을 안겨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보냈다. 그런데 프랑스 귀족들은 천한 상인의 가문이라고 괄시하고 멸시하였다.

 

남편은 부왕이 죽자 앙리 2세로 즉위하고 카트린은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남편 앙리 2세 역시 못생긴 그녀를 무서운 짐승 보듯이 냉대했다. 그리고 앙리는 20년 연상의 연인 디안과 정사를 벌이며 그녀를 멀리했다. 결혼 후 10년 만에 첫 출산을 하여 아들 4명과 딸 3명을 두었으나 앙리 2세는 그녀가 낳은 자식을 정부인 디안에게 기르게 하였다.

 

그녀의 못생기고 장사꾼 집안 여자라고 사랑을 받지 못해 고독했다. 그런데 남편 앙리 2세가 마상시합 도중 죽자 카트린은 정부 디안을 내치고 아들 앙리 3세를 왕위에 오르게 하고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다. 마침 프랑스는 문화와 예술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았다.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고 너무 현명한 처세로 프랑스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비중 있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의 병약하고 나태한 프랑스 왕가를 쇄신하기 위하여 왕권을 확립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녀의 뒤엔 마키아벨리가 있었다.

어느 날 카트린은 마키아벨리를 찾아갔다.

 

내가 살고 내 자식들이 번성하는 길을 가르쳐 주시오.”

 

그녀의 절절한 간청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를 증오하고 해치는 무리부터 제거하십시오. 군주는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잡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 뭐냐고요?”

 

국가를 내세우고 국가의 통치에 방해되는 것을 모두 제거하십시오.”

 

그녀는 정적을 제거할 건수를 찾고있던 중에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치열했다. 그녀는 구교의 편에 서서 사태를 진압하였다. 마침 바르톨로메오 신부의 결혼식에 하객들이 파리로 많이 모였다. 카트린은 기병대를 보내 결혼식에 참석한 일만여 명의 신교도들을 학살하였다. 그리고 시체는 센강에 버렸다.

 

카트린은 아들 세 명을 왕위에 올려 섭정을 하였다. 그리고 큰아들이 죽자 사위를 왕위에 올렸다. 앙리 4세다. 비로소 프랑스 왕권의 기초를 세웠던 것이다. 그녀는 불온한 성장 과정과 젊은 시절에 겪은 설움과 박탈감으로 인해 가득찬 증오심과 남편으로부터 받은 설움과 한을 복수로 풀었다. 남편인 앙리 2세가 죽자 카트린은 정부 디안을 장례식에도 못 오게 하고 그녀의 모든 재산과 보석을 빼앗고 성 밖으로 내쫓았다.

 

카트린은 왕위를 물려받은 아들 프랑수아 2세와 갈등을 빚게 되자 그를 독살하고 다른 아들 샤를 9세를 왕위에 올렸으나 그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독살 하였다. 아무튼 카드린은 부정적인 평가와는 달리 프랑스의 역사와 문화 예술사에 많은 업적을 남겼던 것이었다. 그녀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실천한 왕후였다.

 

미련하고 무식하다고 비하한 카트린에게 비범한 능력과 예술에 대한 높은 취향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흡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소양을 바탕으로 그녀는 프랑스의 문화 예술을 수준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예술을 사랑하는 훌륭한 건축가와 설계사, 화가를 많이 낳아 프랑스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 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

 

김용필 danmoon@hanmail.net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7.14 11:02 수정 2020.07.1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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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