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완 칼럼] 동아시아의 경제성장

최용완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7.21 11:40 수정 2020.07.21 11:43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미국과 서쪽에 동아시아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경쟁이 시작하였다. 1941127일 아침, 일본 해군이 진주만을 공격했다. 일본은 중일전쟁을 연장하여 동남아시아 해양지역을 점령하려는 데 필리핀에 미해군 기지가 걸림돌이었다. 태평양 해군 본부가 하와이 진주만에 있었다. 이때 일본의 해군은 미국의 해군보다 강력했고 항공모함도 더 많았다.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으로 미해군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끼쳤다. 하지만 미국의 레이다 기술과 암호해독 기술은 일본을 능가하였다. 4개월 후에 미국의 공군은 도쿄를 공습하였다. 암호통신을 해독하여 야마모토 제독을 공중에서 사살하였다. 원자탄을 발명한 미국은 일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공격하여 이차대전을 승리로 종식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승리한 미국과 소련은 패전국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나누었다. 미국과 소련은 일본을 남북으로 나누지 않고 한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미국은 일본을 간직하고 보호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은 36년 동안 모든 것을 일본에 빼앗기고 해방 후에 하나도 돌려받지 못했다. 1950625일 소련탱크와 무기로 무장한 김일성의 북한군은 일요일 새벽에 남한을 공격했다. 남한군과 정부는 속수무책이었다. 낙동강을 경계로 마지막 생존을 방어하고 있는 무렵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맥아더 장군은 인천 상륙으로 북한군 침략의 허리를 끊었다. 남한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몰아붙여 함경북도만 남겨 놓았다.

 

그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모택동의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너와서 남한군과 유엔군의 반격에 허리를 찔렀다. 함경북도와 함경남도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후퇴할 길이 막혔다. 장진호 전투를 비롯하여 수만 명의 목숨을 잃었다. 맥아더 장군은 압록강에 원자탄 공격을 제안했지만 트루먼 대통령은 거절하였다. 맥아더 장군은 미군의 희생에 책임을 지고 은퇴하였다. 미국 국회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진다.”고 명언을 남기고 평민이 되었다. 이차대전 유럽에서 승리한 아이젠하워 장군은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태평양 전쟁에서 승리한 맥아더는 평민으로 마쳤다. 625 한국전쟁은 소련 스탈린의 공산화 노력으로 김일성을 움직여 시작했지만 미국과 중국의 대결로 휴전했다.

 

1950625일에 시작해서 1953727일까지 지속된 전쟁에서 사망한 사람은 1374195명에 이른다. 국군이 전쟁 중 137899명이 전사했다. 유엔군 사망자 수는 37902명에 달한다. 이중 33668명이 미군이었다. 중공군은 1486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남한에서 민간인 244663명이 사망했고 북한에서는 282000명의 민간인이 전쟁으로 죽었다. 한국전쟁으로 사망한 수는 약 137만여 명이다. 수없이 많은 희생자의 영혼은 아직도 한반도의 땅에 묻혀 있다. 전쟁을 시작한 김일성도 상상할 수 없는 비참한 전쟁이었으며 우리민족 역사에 큰 상처만 남겼다.

 

내 나이 9살에서 12살에 이르도록 우리 친척의 피해도 컸다. 작은아버지는 조선대학 교수였다. 가족 먹을 쌀 사러 시장에 갔다가 납치되어 멀리서 사살되어 땅에 묻혔다. 삼남매 살아갈 길을 잃은 작은 어머니는 아이들을 할아버지 댁에 맡기고 사라졌다. 삼남매는 부모 없이 살았다. 어머니의 동생인 삼촌은 식당을 운영하였다. 어느 날 저녁 친구가 불러서 나갔다. 다음 날 아침 길 건너 골목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내가 살던 집 앞에는 광주 무등산이 높이 솟아 있다. 마을 안에 우리 형제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고 전쟁 동안 육군부대가 머물고 있었다. 무등산 기슭에는 공산군 유격대가 숨어 살고 있었다. 총성이 요란하고 수류탄 폭음과 화염에 잠을 깬 어느 날 새벽, 살인, 절규, 비명, 피에 젖은 아침 길에 쓰러진 군인들의 시체를 치웠다. 포로 열사람은 끈에 묶여 무등산 기슭에 이르렀다. 데려간 헌병들은 포로들에게 삽을 주어 땅 구덩이를 파게 하고 한사람 한 사람 사살하여 자기가 판 구덩이에 쓰러지면 흙을 덮고 떠났다. 잠시 후에 가족들이 찾아와 소리 내어 울며 시체들을 흙속에서 찾아내어 등에 메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향에 찾아갈 적마다 무등산을 보며 죄없이 목숨 잃은 영혼들을 위해 혼자서 묵념하는 때가 자주 있었다. 전쟁 후에 한반도는 세계에서 가장 참혹하고 가난한 땅이 되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제일 못사는 나라가 바로 인도와 한국이었다. 한국의 경제성장에 개척자 3사람이 있다. 군사혁명 일으킨 박정희와 현대건설을 시작한 정주영과 삼성전자를 시작한 이병철이다. 박정희 소장은 케네디를 만나기 위해 백악관을 찾았지만 케네디는 끝내 박정희를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 돌아와 빈손으로 귀국하려고 짐을 싸면서 박정희 소장과 수행원들은 서러워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우리와 같이 분단된 서독에 필요로 한 간호사와 광부를 보내주고 그들의 봉급을 담보로 14000만 마르크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월남전의 파병은 한국 경제의 활로를 트고 군을 현대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우호적인 신임을 쌓고 외화획득이라는 경제적 이득이 이루어졌다. 월남전 참전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자금을 지원받았다. 이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비용으로 충당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현대와 삼성을 비롯한 한국 기업들의 성장과 국제적 경제발전에 시동을 걸었다.

 

정주영은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1947년에 현대토건사를 설립하면서 현대그룹의 모체를 일으켰다. 뛰어난 상업과 기업 경영능력으로 현대그룹을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었다. 1971년 정주영 회장은 혼자서 차관을 받기 위해서 울산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유럽을 찾아갔다. 영국 롱바톰 회장을 만났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때 정주영은 우리나라 5백 원짜리 지폐를 꺼내 거기 그려진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설득해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현대 자동차와 현대 조선소는 세계적 수출기업으로 성장하였다. 1998년에 83세의 정주영 회장은 트럭 50대에 500마리의 소떼를 싣고 판문점을 넘었다. 정주영 회장은 이번 방문이 남북 간의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고 부탁했다.

 

삼성의 이병철은 현대 정주영과는 달리 집안이 부유했다. 그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시작하여 대기업 삼성전자를 만든 기업가였다. 대구 서문시장에서 국수를 파는 처음 사업에서 시작하여 제일모직 사업으로 성장하였다. 제일모직의 성공으로 삼성은 기업의 자리를 확고하고 계속해서 이병철의 아들 이건희의 권유로 반도체 사업에 투자하게 되었다. 이병철은 미국의 실리콘 벨리를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서 컴퓨터로 인한 사무처리를 처음 보게 되면서 반도체 사업은 미래의 중요한 사업임을 깨닫게 되었다. 1983년 미국에서 스티브 잡스 애플의 창시자가 찾아왔다. 그는 이병철 회장과 독대하면서 애플의 컴퓨터를 소개하였고 앞으로 삼성에서 만든 반도체를 공급받고 싶다고 말였다. 그때부터 삼성 전자제품은 일본을 제치고 세계적 전자제품회사가 되었다.

 

625 한국전쟁은 휴전이지 종전이 아니다. 북한과 남한은 아직도 전쟁 장비를 갖추고 서로를 경계하는 중이다. 최근에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의 의견을 아베 수상에게 물었다. 아베는 반대했다. 이차대전 이후 패전국 일본은 한국전쟁으로 다시 일어섰다. 한국전쟁 중에 도요타 자동차가 처음 만들어졌다. 일본의 자동차 생산은 미국의 디트로이트 자동차생산을 공황에 빠트렸다. 지금은 세계 각국에서 사용하는 자동차가 되었다. 일본은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는 교두보의 역할을 하며 미국의 재원을 확보한다. 미국 재원으로 세계 2위 경제강국이 되었다.

 

중국은 225 한국전쟁에 참여하며 처음으로 미국과 대면하였다. 중국이 마오쩌둥 공산당의 지배하에 중국은 가난한 나라였다. 우호적 외교 관계도 없이 자급자족에 의존하였다. 1976, 마오쩌둥의 사망 이후 덩샤오핑을 선두로 한 개방개혁정책으로 중국 경제는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1979년 미중 간의 외교 관계가 회복되었다.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 강한 장점으로 90년대부터 중국은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의 가입을 계기로 성장세에 가속도를 더했다. 미국의 가정 소모품이 모두 중국산으로 보급되며 중국이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등극했다.

 

미국은 세계 경찰이라는 역할로 전 세계의 온갖 분쟁에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여러 곳이다. 이 틈을 타서 중국은 대규모 개발 프로젝트로 아시아-인도양-아프리카 일대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다. 이제는 중국이 미국의 경쟁자가 되었다. 중국은 미국 공공 채무를 가장 많이 보유한 해외 채권국이다. 미국 경제는 200712월부터 침체기를 맞기 시작했다. 미국의 노동인구는 15600만 명(실업자 1126만 명)이며 중국의 노동 인구는 전체 134천만 인구 중 10억 명을 넘는 최대 규모를 기록할 전망이다. 2020 년에 중국이 1인당 국내총생산(GDP) 1만 달러 시대를 열었다. 미국은 6만 달러를 넘는다. 중국 경제는 강한 내재 동력과 광활한 저력을 가지고 미중 무역갈등에 따른 충격을 해소할 조건과 능력을 갖추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위대한 미국을 다시 찾는다는 각오로 자국이득주의 정책을 세웠다. 불법적이고 막대한 이익을 취하는 중국 기업들을 침몰시키고 중국 기업들이 불법 행보를 막기 위해 미국의 상무부와 인텔, 구글, 퀄컴과 글로벌 미국 우방 연합군이 보이지 않는 기술 전쟁을 치르고 있다. 중국의 기업 '화웨이' 등을 억제하는 과정이다. 2018년의 미국-중국 무역 전쟁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 등을 기점으로 양국 간 대립이 점점 노골화되는 상황이다.

 

일본이 이차대전 중에 식민지 한국을 속이고 한국을 세계의 눈에서 가렸다. 하지만 한국의 1980~1990년대 경제적 성장은 세계경제 역사에 유례없는 기적적인 성장이었다. 그때부터 현대 자동차와 조선사업 그리고 삼성전자의 생산을 발판으로 꾸준한 성장세를 이어 이제 10대 강국에 진입하였다. 최근에 일본은 한국의 경제성장에 재동을 시도하였지만 한국은 역경을 발판으로 일본보다 더 빠른 경쟁력을 기르고 있다. 소련의 자연자원과 한국의 기술이 연결되면 동아세아의 경쟁력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북한의 독재는 인민의 지식 성장으로 자유를 찾으려는 노력이 시작되면 독재가 사라지려는 추세이다.

 

이차대전 이후에 동아시아가 가난했을 때 백인 우월주의 연막탄은 세계 지성인의 눈을 가렸다. 지난 60년 동안에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온 인류의 과거는 백인 우월주의 무지와 착각이었다. 한국, 일본, 중국은 미국을 뒤쫓는 경제강국들이다. 이제부터는 우리 스스로 역사의 진리를 찾아서 새로운 시대를 펼쳐 가기 기대한다.

 

<동아시어는 인류 문명문화의 어머니> 최근에 새로 출판된 책에서 더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최용완]

건축가·시인·수필가

서울공대 건축과 졸업

미네소타 주립대 대학원 졸업

오하이오주 건축회사 대표

전 문교부 문화제 전문위원 역임

미주문협 신인상 수상

자유문학 신인상 수상

에세이포레 신인상 수상

 

최용완 ywbryan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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