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강의 인문으로 바라보는 세상] 바람의 여행

신연강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7.24 11:10 수정 2020.07.24 11:11



강렬한 비바람이 얼굴을 훑어 내렸다. 운무 속에 서 있는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온 바람. 대서양을 벗어나 힘들고 지친 듯 다가와서 손등을 두드린다. 말을 좀 건넬듯하더니 이내 발아래로 툭 떨어진다. 광대한 바다를 횡단한 그 에너지와 끈기가 이제 한계에 달한 듯싶었다. 남은 힘을 다해 브루클린교를 세차게 흔들더니 흩뿌리는 비바람이 되어 가슴을 파고든다. 포구를 선회하던 갈매기가 하트 크레인Hart Crane의 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잔물결 보금자리 찬바람을 맞으며/ 갈매기 나래는 얼마나 많은 새벽을 적시며 선회할까/ 하얀 고리를 흘리고, 굽은 만() 높이 자유를 세우며 -중략- 그리고선 완만한 곡선으로 시야를 벗어난다/ 빼곡한 숫자가 적힌 장부(帳簿) 위를 마치 돛대가 가로지르듯/ 기중기가 하루로부터 우리를 내려놓을 때까지” *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바람을 이고, 땀이 배어든 소매로 연신 얼굴을 훔치며 뉴욕으로 향했다. 한동안 머물 친구 집을 나와 딩키(2량의 미니 열)를 타고, ‘프린스턴 정션에서 뉴욕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뉴왁(Newark)을 지나 펜스테이션(Penn station)에 내려 매디슨 스퀘어를 지나며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를 잠시 떠올렸다. 곧이어 시청사를 지나고 브루클린교에 오르자, 오른편에 공원과 부두가 길게 이어지고,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눈에 들어왔다. 여신상을 지나 길게 이어진 수로는 꼬리를 감으며 대서양으로 내달린다. 포구에 점점이 떠 있는 선박들이 아득히 수평선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부두 오른쪽의 빛바랜 건물들과 아파트에 시선이 멈춘다. 그 허름한 공간 어딘가에 머물렀을 천재 시인 하트 크레인과 그의 시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시인은 1899년 오하이오에서 태어나 뉴욕으로 옮겨온 뒤 허름한 아파트에서 대서양의 아득한 꿈과 미국의 이상을 노래하다가 꽃 같은 나이에 요절했다. 20세기 현대문명 속에서 대서양의 망망한 바다처럼 아득한 꿈과 이상을 바라보았을 크레인은 그렇게 전설로 내게 남아있었다. 하얀 고리를 흘리며 수많은 새벽을 선회하던 갈매기가 사라질 때, 나는 시를 접고 트렌튼행 열차표를 확인하며 다시 펜스테이션으로 향한다.

 

바람의 기억은 조금씩 다르다. 이십 대 청년기에 찾은 하와이가 낭만과 꿈의 섬이었다면, 뉴욕은 달뜬 열정과 희열로 잠 못 이루던 사십 대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쉰을 넘기고 중년이 되어 찾은 호미곶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의 안식처였다.

 

몸과 마음이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던 대학 시절, 하와이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국내 여행조차 하지 않았던 내게 첫 해외여행은 가슴 벅찬 일이었지만, 장시간의 첫 비행은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긴장한 탓도 있겠지만, 멀미로 인해 꼬박 하루를 굶었다. 하와이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눈앞에 땅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기력을 회복하고 이튿날부터 학업과 문화탐방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던 기억이 새롭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햇볕은 따갑고, 공기는 가벼우며, 바람은 쾌적하다. 바람은 얽매이지 않고 손끝을 타고 올라 얼굴과 이마를 어루만진다. 하와이가 태평양의 파라다이스라고 불리는 이유는, 낭만과 꿈이 푸른 파도와 더불어 일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십삼 세의 청춘에 각인된 그 하와이는 늘 와이키키 해변의 파도로 일렁인다. ‘하노머 베이의 옥빛 물결 또한 보석처럼 영롱하게 반짝인다.

 

그 후 이십여 년이 지나 미국 본토를 찾게 되었다. 뉴욕을 찾는 사람 누구나 랜드 마크인 브루클린교를 한번은 방문할 것이다. 다리에 올라서면 바람은 습하고, 왜소한 인간을 압도하는 거대한 기운이 몸에 감겨든다. 뉴욕을 찾아드는 바람은 대서양을 횡단하여 긴 포구를 거슬러 올라온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고 환호성을 지르곤 허드슨강을 따라 고된 항해를 마친다. 미처 떨어내지 못한 습기를 머금고, 이마와 얼굴을 거칠게 훑으며 바삐 지난다. 목적지를 눈앞에 두었기에 지체할 여유 없이 마지막 힘을 다해 바삐 지나가는 바람이다.


 

 

하와이와 뉴욕의 바람이 이국적이고 낭만적이며 달뜬 희열을 주었다면, 호미곶의 바람은 지극히 편안하다. 좀처럼 남쪽으로 내려갈 일이 없던 삶 속에서 12일의 일정으로 영남알프스호미곶을 방문하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었다. 반나절이면 바람과 파도를 눈에 담을 수 있는 땅에서, 오십 대 장년에 찾은 호미곶. 차에서 내려선 순간 아늑하고 평온한 기운이 느껴졌다. 대기는 온화하고 상쾌하며, 영혼은 자유로웠다. 눈 앞에 펼쳐지는 짙푸른 바다. 일순간 생각은 멈추고, 영혼은 넘실대며 광활한 바다로 뻗어간다.

 

호미곶에 오면 시간은 멈춘다. 몸도 마음도 단추를 풀어 헤치고 쉬어가기를 청한다. 낯선 얼굴은 편한 이웃이 되고, 바다와 바람이 협연을 한다. 그곳에서라면 누구라도 잠시 쉬었다 가도 좋을 것이다. 마음이 쉬는 사이 푸른 바다와 하늘과 파도가 노래한다. 호미곶에 풀어놓았던 영혼을 다시 챙겨 태백산맥을 따라 영남알프스를 향하는 길.

 

 

황금 억새를 일렁이던 바람/영혼에 스며들고/ 구름은 술래잡기를 하는 곳 -중략- 한 번이라도/ 아니 다시 한 번이라도 걷고 싶은 곳/ 꿈에서도 영혼이 자유로운/ 그립고 그리운 내 마음의 알프스

 

호미곶의 자유로운 영혼과 시간을 뒤로하고 해안선을 굽어보며 발걸음은 가지산, 신불산을 누빈다. 푸른 파도를 담았던 눈앞에 금빛 주단으로 펼쳐진 억새밭. 구름을 쫓던 마음은 멀리 호미곶을 바라보며 이내 알프스를 담는다. 꿈에서도 영혼이 자유로운 내 마음의 알프스, 영남알프스.

 

 

 

* 하트 크레인의 시, ‘브루클린교에(To Brooklyn Bridge)’ 부분 인용.

* 신연강, ‘영남알프스부분 인용.



 


 





[신연강]

인문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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