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윌리엄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

대표적 낭만주의시인

영문학사의 중요한 작가

김태봉 기자

작성 2020.08.02 08:27 수정 2020.08.06 20:33


 

그가 1798년에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함께 출판한 <서정가요집>(Lyrical Ballads) 의 서문은 낭만주의의 시작으로 평가되며, 이 점으로 인해 그는 영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가로 여겨진다.

워즈워스 이전의 시대는 찰스 2세의 왕정복고(1660)부터 지속되고있는 신고전주의의 시대였는데, 이 시대의 시들은 내용이나 상상력보다는 형식과 이성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워즈워스는 '서문'에서 평범한 삶에서 소재를 선택할 것과,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할 것, 그리고 그 평범한 일상을 시인의 상상력으로 채색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한, 신고전주의 시들이 교훈시나 풍자시 등의 목적을 가진 시들이었다면, 워즈워스는 예견된 목적에서 벗어나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넘쳐흐름"으로 쓰는 시가 좋은 시라고 했다. 워즈워스의 '서문'은 영문학사 뿐만 아니라 유럽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생애

영국 출신으로 프랑스 혁명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서정가요집 서문에서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이며,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가 좋은 시적 언어라고 하여 18세기식 고전주의의 종말을 알렸다. 후기의 워즈워스는 초기의 혁명적인 마인드를 버리고 보수적인 색채를 갖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 때문이었다. 1843년에 워즈워스는 영국 왕실이 임명하는 "계관시인"이 되었다.

 

영국 낭만파 시인.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문학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서정가요집개정판 서문에서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스스로의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야말로 시에 알맞은 언어라고 하여 18세기식 기교적 시어를 배척했다. 그는 영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유럽 문화의 역사상 커다란 뜻을 지녔다.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1770.4.7 ~ 1850.4.23.)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주요저서

서곡 Prelude

잉글랜드 북부 컴벌랜드의 코커머스 출생이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을 이 호수지방에서 보냈다. 8세 때 어머니를, 13세 때 아버지를 잃고 백부의 보호로 1787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였고, 재학 중에는 프랑스와 알프스 지방을 도보로 여행한 일도 있다. 1791년 학교를 마치자 다시 프랑스로 건너가 때마침 절정기에 이른 프랑스혁명의 이상(理想)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오를레앙에 머무는 동안 A.발롱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깊이 빠져 딸을 낳기까지 하였으나, 이 일은 오랫동안 비밀로 숨겨져 왔다.

 

1793년에 저녁의 산책소묘풍경(素描風景)을 출판하였는데, 시형(詩形)은 상투적인 영웅대운(英雄對韻)이지만, 곳곳에 생생한 자연묘사가 돋보였다. 프랑스 혁명으로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국교가 악화되자 그는 공화주의적인 정열과 조국애와의 갈등 때문에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 때 쓴 비극 변경 사람들(17961797)에는 혁명과 고드윈적인 합리적 급진주의에 대한 반성이 엿보인다.

 

1795, 친구의 도움으로 누이 도러시와 레이스다운으로 옮겨 조용한 자연과 누이의 자상한 애정으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갔다. 1797년 여름에는 다시 올폭스덴으로 전거(轉居)하여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S.T.콜리지와 친교를 맺으면서 그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1798년 이 두 시인은 공동으로 서정가요집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콜리지는 초자연의 세계를, 워즈워스는 일상의 비근한 사건을 각각 다룸으로써 새로운 시경(詩境)을 개척, 영문학사상 낭만주의 부활의 한 시기를 결정짓는 시집이 되었다. 여기에는 그의 초기 대표시 틴턴 수도원이 포함되어 있다.

 

1800년 개정판을 냈으며, 영국 최초의 낭만주의 문학 선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서문에서 시골 가난한 사람들의 스스로의 감정의 발로만이 진실된 것이며, 그들이 사용하는 소박하고 친근한 언어야말로 시에 알맞은 언어라고 하여 18세기식 기교적 시어(詩語)를 배척하고 있다.

 

초판이 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이들 세 사람은 독일로 여행을 떠나 고슬라에서 겨울을 보냈다. 향수 탓이었는지 그는 그 곳에서 한 영국 소녀를 주제로 한 루시의 노래를 썼고, 또한 자신의 시심(詩心)이 성장해온 발자취를 내면적으로 더듬은 서곡 Prelude(초판 1805, 개정판 1850)을 집필하기 시작하였다. 1799년 독일에서 귀국한 뒤 누이와 함께 그래스미어 호반의 더브코티지에서 살았다. 1802년 누이의 친구 M.허친슨과 결혼하였는데, 이 무렵 동생 존이 사고로 죽고, 콜리지가 병석에 눕게 되는 등 심로(心勞)가 겹쳤고, 또 한편으로는 국외 정세의 변화로 해서 열렬한 애국자가 되었다.

 

그러나 서정가요집이후의 10년간이 시작(詩作) 면에서는 가장 왕성한 시기였으며, 그는 이 시기에 늙은 양치기와 그의 아들의 운명을 그린 마이켈(1800)을 썼고, 대표작 서곡을 완성하였으며, 이 밖에 2권의 시집(1807)을 내 놓았다. 이 시집에는 나는 홀로 구름처럼 헤매었다〉 〈홀로 추수하는 아가씨〉 〈무지개를 볼 때 나의 가슴은 뛴다등의 주옥 같은 명시가 수록되었다. 특히 영혼불멸송(靈魂不滅頌)에서는, 어렸을 때는 순수한 넋을 지닌 인간이 자라남에 따라 신과 자연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인간관을 암시하고 있다. 1813년 그는 라이덜마운트로 옮겨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1814년 장편시 소요(逍遙) The Excursion를 완성하였으나, 이 무렵부터 그의 작품은 도덕적 ·보수적인 색채가 농후해져 갔다.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1820년경부터 점차 높아져 1843년에는 R.사우디의 뒤를 이어 계관시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옥석혼효(玉石混淆)라고들 하는데, J.톰슨, W.쿠퍼 등에서 싹트기 시작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워즈워스에 이르러 가장 심오해졌으며, 그리고 자연에의 미적 관심이 동양에 비하여 희박하였던 유럽에 있어 그와 같은 범신론적 자연관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영문학에만 그치지 않고 유럽 문화의 역사상 커다란 뜻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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