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차영의 대중가요로 본 근현대사] 용두산 엘레지

배반당한 울화통에 만든 통곡

최치수·고봉산·고봉산

 

2019년 '내일은 미스트롯' 진(), 송가인의 목청에 흘러간 노래가 걸치면 대중들은 가슴을 쓸어내린다. 원곡 가수의 감흥에 송가인의 애절한성(哀絶恨聲)이 아우러지기 때문이다. 젖은 적삼에 부슬비가 내려 베이는 듯한 절규, 송가인은 하늘이 내린, 이 세상에서는 만들 수 없는 휘틀어진 쇠퉁소다. 1986년 진도 출생, 본명 조은심. 진도씻김굿 전수조교 송순단의 딸. 그녀를 1등으로 만든 1등 공신 곡이 <용두산 엘레지>.

 

이 곡은 이재호(1919~1960)가 작곡한 노래(울어라 기타줄)를 발표할 가수 배정을 하는 과정에서 배반당한 고봉산의 울화통이 씨앗이 되어 만들어진 노래이다. 1957년 늦은 봄 날, 고봉산은 용두산 194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갔다. ‘어떻게 이런 배신을 할 수가 있어. 그동안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서 연습했는데, 다른 가수에게 음반취입을 시키다니....’

 

배반의 주체가 된 노래는 이재호가 예명 무적인으로 작사한, ‘낯 설은 타향 땅에 그날 밤 그 처녀가/ 웬일인지 나를나를 못 잊게 하네/ 기타 줄에 실은 사랑 뜨내기 사랑/ 울어라 추억의 나의 기타여로 이어지는 <울어라~>이다. 이 배반 사실은 당시 지방순회공연 중이던 고봉산이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손인호가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알게 되었던 것이다. ‘분하다 분해,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나 자신이 작곡을 못하여 생긴 일인데...’

 

그날부터 고봉산은 피아노에 매달려 작곡공부에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세아레코드 최치수 사장과 협의하여 가사를 다듬고 자신이 곡을 붙인다. 그 노래가 1964년 고봉산이 발표한 <용두산 엘레지>, 일명 <추억의 용두산>이다. 이 노래가 2019년 내일은 미스트롯의 주인공 송가인의 목청으로 되살아났다. 유행가, 물결처럼 흐르는 노래.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한 발 올려 맹세하고 두 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사 계단에/ 사랑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가고/ 나만 홀로 쓸쓸히도 그 시절 못잊어/ 아아~ 못잊어 운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사 계단에/ 즐거웠던 그 시절은 그 어디로 가버렸나/ 잘 있거라 나는 간다 꽃피던 용두산/ 아아~ 용두산 에레지.(가사 전문)

 

용두산은 부산(釜山송현산·우남공원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용두산으로 불린다. 부산은 동국지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고, 산모양이 가마솥을 닮았다하여 가마솥 부()자를 산() 앞에 붙인 고유의 이름이다. 하지만 용두산(龍頭山)은 식민지 치하에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이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용머리 부분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붙였단다. 다분히 의도되고 왜곡된 도참사상(圖讖思想)을 근거로 한 음흉함이 곁들여 있다.

 

6.25전쟁 후 이승만 대통령은 우남공원으로 바꾼다. 그는 서울 우수현 남쪽 오두막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우수현 우()자와 남녘 남()자를 따서 자신의 호를 지었고, 이 호를 따서 용두산 이름을 바꾸어 붙였다. 이 이름은 4.195.16정변 후 1966년 용두산으로 다시 환원된다. 용두산 공원의 명물은 높이 120m의 부산탑. 탑 전망대는 불국사 다보탑 보개(寶蓋)를 본떠 만든 것이다.

 

<용두산 에레지>를 부를 당시 37세 고봉산(본명 김민우)1927년 황해도 안악(김구의 고향)에서 출생 하여 악극대원으로 활동하다가 1961<아메리칸 마도로스>로 데뷔하여 남석일이란 예명도 사용하였다. 그는 젊은 날 뻥이 세다고 하여 별명이 고대포였으며, <용두산 엘레지> 히트 후 작곡과 노래를 병행하다가 1990621일 심장병으로 향년 67세로 타계했다.

 

https://youtu.be/O3hZqady-ZM 

 

이 노래에 서사된 194계단 꼭대기에는 용두산공원이 있다. 부산 중구에 있는 공원이고, 꼭대기에는 부산타워가 있다. 1930년경 이곳 용두산공원에는 일본제국주의 신사(新寺)가 있었다. 일본제죽주의자들의 대한제국 민족문화말살정책의 증거였다. 1970년대 까지 중앙동 부산호텔 근처에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고, 광복동에서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부산항과 영도를 바라볼 수 있고, 부산타워 아래에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이곳은 1592413일 왜군들이 처 들어 온 임진왜란 첫날 조선 땅을 공격 상륙한 곳이다. 그날 부산진성 정발(1553~1592)장군이 전사하고, 이어서 이틀 뒤 동래부사 송상현(1551~1592) 장군이 순절하면서 7년간의 전쟁(임진왜란·정유재란)이 시작되었다. 이때 왜군 선봉장이 고니시 유키나가(1555~1600)였다.

 

용두산은 조선시대에 초량소산, 송현산으로 일컬어졌고, 1876년 부산항 개항 후에는 소산, 중산 등으로 불렸다. 용두산이란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78년 일본자료 조선귀호여록(朝鮮歸好餘錄)에서다. 용두산은 초량왜관 중심에 있는 산으로 숲이 우거진 곳이었다. 소나무가 많아 송현산으로도 불렀다. 개항과 함께 일본제국주의 강제점령기인 1915.11~1916.6 사이에 공원이 만들어졌다. 정상은 용두산(龍頭山), 옛날 부산시청이 있던 자리는 용미산(龍尾山)이라고 불렀다. 식민지시절(1935년 전후) 남포동 방향으로 달리던 전차가 용두산 신사 앞을 지나갈 때면 전차 안의 승객들은 모두 일어서서 용두산을 향해서 큰절을 해야 했다고 하니, 울화분통에 분기탱천할 생채기 난 과거사다. 흘러간 유행가를 꼭꼭 씹으면 과거사의 쓴물 단물이 쫄쫄 입안에 베인다.

 

 [유차영]

문화예술교육사

트로트스토리연구원 원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8.08 11:23 수정 2020.08.08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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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