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유모차

김수정



폭염을 동반한 여름 오후의 등등한 기세에 밀려 도망치듯 가까운 공원을 찾았다. 선풍기와 에어컨에 시달린 몸과 마음이 자연 바람에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다. 플라타너스 잎들이 베풀어준 그늘 밑에 앉으니 여유가 생기고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반려견을 끌고 산책 나온 아가씨의 웃음이 햇살에 반짝이고 벤치에 앉은 노부부의 이야기는 넉넉하고 정다웠다. 더위 속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함성은 싱싱한 활어처럼 펄떡이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들의 얼굴에는 달콤한 행복이 넘쳤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모습에 덩달아 나도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유모차가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은 하얀 종이가 되고 얼굴은 납덩이로 변했다.


영화에서처럼 모든 것이 정지되고 그녀와 나만 화면 속에 각자의 놀람을 어쩌지 못해 멍하니 서로를 바라보는 껄끄러운 어색함을 우리는 마주하고 있었다.


남편의 여자. 굳이 어렵게 설명하지 않아도 한 때는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사랑의 저울질에 가슴 아파했던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 중 가장 밑바닥에 숨겨둔 절망을 이곳에서 만날 줄이야. 순간 현기증이 아주 잠깐 아득한 어둠을 동반하고 식은땀을 한줄기 쏟았다. 발길을 멈춘 그녀의 불안한 눈동자와 모든 것을 체념한 내 눈이 허공에서 부딪혀 심하게 흔들렸다.


언니, 어떻게 여기에…….”

정적을 깬 것은 그녀였다. 까만 얼굴보다 더 새까만 눈동자가 예뻤던 작고 아담한 모습 그대로 아이 엄마가 되어 사는 일상이 말을 안 해도 한눈에 보였다. 유모차에 아기는 옹알이하며 뭐가 좋은지 생글생글 웃었다. 순간 심장이 바늘에 찔린 듯 울컥하고 숨이 막혔다.


그녀가 남편이란 존재와 함께 가족이란 집의 객식구로 여행 가방을 살며시 내려놓던 날. 내 아이도 옹알이하고 유모차를 탔었다. 애써 잊고 지냈던 달갑지 않은 시간이 롤러코스터를 탔다.


바람이나 쐬려고 나왔지.”

간단한 단답형 대화도 왜 이리 길게 느껴지는지 거북하고 답답했다. 그녀는 갈 곳이 없다 했다.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심지어 친구 하나 없는 천애 고아라 했다. 그 말에 흔들렸을까! 따지지도 않고 묻지도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드라마에서처럼 머리채를 쥐어뜯고 욕을 하고 살림을 때려 부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편을 향한 원망이나 하소연도 하지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은 남이 어쩌지도 못하고 악다구니를 해 못 만나게 해도 결국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인다는 보편의 법칙을.


같은 공간을 함께 적절히 나눠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습게도 숟가락 두 개 이불 한 채로 시작한 신혼은 단칸방을 벗어나지 못한 현실이었다.

아이와 나의 공간은 삼등분한 방의 가장 위쪽이었고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썼다. 관심을 가지는 사치를 부리고 싶지 않았다. 내 관심사는 오로지 아이에게 아빠가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가정의 기본을 언제까지 지켜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지옥 같은 절망의 마침표를 찍은 건 그녀의 편지였다. 바람도 불다 그칠 때는 흔적도 없다던 어른들의 말처럼 영원히 떠난다는 편지만 주인의 체취를 대신하고 그림자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가버린 시간을 걸어와 다시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던지니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었다.


오빠는 잘 있죠?”

그래. 잘 있어.”

굳이 그녀에게 이혼했다는 개인사를 말하고 싶지 않았다. 괜한 죄책감으로 가슴에 돌덩이를 넣고 살지 말기를 바랐다.


건강해라. 아이 잘 키우고.”

. 언니도 건강하세요.”

유모차를 끌고 가는 손가락에 힘을 얼마나 줬는지 손가락 마디가 새하얗게 떨렸다. 5분도 걸리지 않은 만남이 지구를 한 바퀴 돈 듯 체력이 고갈되어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찰나와 같은 스쳐 지나감이 끝나지 않을 시간으로 다가와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자꾸만 숨고 싶은 마음은 왜일까!


나는 그녀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아이를 떠올렸다. 유모차 안에 이제 막 새로운 세상을 맞은 생명이 숨 쉬고 있다. 부디 따스하고 아름다운 기억만 주는 엄마가 되기를 살짝 빌었다. 지나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 할 길이 훨씬 많기에 씩씩하고 힘차게 유모차를 밀고 아이와 함께 행복하게 살기를 열기로 가득한 여름 공원에서 진심으로 바랐다.


올려다본 하늘에 양털 구름이 참 고왔다.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8.11 11:02 수정 2020.08.11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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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