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동화가 된 흑백사진

김종문


그 밤에 꿈을 꾸었다. 친구들을 모두 태우고 수학여행 버스가 막 떠나려던 참이다. 나도 태워달라고 엉엉 울며 쫓아가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가 준비해 놓은 옷이며 간식이 머리맡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난 새 아침을 맞았다. 들뜬 마음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로 달려갔다. 먼데 친구들이 먼저 와있었다. 노랗게 물든 우람한 은행나무 아래서 여자아이들은 머심아 같이, 남자아이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이 뛰놀고 있었다. 수학여행 버스가 오려면 아직도 멀었다.


2년 전 3학년 땐 수학여행 버스에 오르는 친구들을 멀리 구멍가게에서 바라보며 눈물 젖은 빵을 목구멍으로 집어삼켰었다. 60년대 말, 너나없이 형편이 어려워 시골에선 수행여행도 절반 정도 밖에 못 가던 시절이었다. 아부지는 형들도 5학년이 되어서야 갔다며 너도 그때가 되면 보내주겠다고 용돈을 주며 달랬었다. 여행을 다녀온 친구가 기념사진을 보여주며 이게 문경 시멘트공장이라고 자랑했다. 멀찍이 찍어서 그렇지 저기 저 공장굴뚝이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침이 마르도록 말했다. 지금도 굴뚝만 보면 그때 그 공장이 생각난다. 당시로선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큰 공장이었다.


선생님은 대구 달성공원에 가면 호랑이며 코끼리를 구경할 수 있다고 했다. 책에서만 본 신기한 동물들이 벌써 내 마음 속 정글에서 뛰놀고 있었다. 호랑이에게 물리면 어떡하지 걱정을 하면서도 가슴은 이미 달려가고 있었다. 버스는 내 급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장 가질 않았다. 울퉁불퉁 삼십 리 길을 달려 상주 읍내로 가서 다시 기차로 갈아탔다. 난생 처음으로 기차를 탔다. 차창 밖으로 세상은 뒤로 밀려가고 있었다. 맑고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곡식이 누렇게 익은 들판이 빠르게 다가왔다 뒤로 사라지는가 하면 또 캄캄한 터널을 뚫고 지나갔다. 한적한 마을이 나타났다간 곱게 단장한 가을 산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넋을 잃고 차창 밖을 내다보다 맞은 편 선로에서 다가오는 열차가 갑자기 획 지나가자 다들 놀라 자지러진다. 얼마간 후엔 누군가 고구마를 내놓았고 누군가는 옥수수를 꺼냈다. 삶은 계란을 내 앞에 밀어놓는 짝꿍의 손이 고왔다. 우리는 난생 처음 보는 신비의 세계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갔다.


곳곳마다 멈춰서며 구경거리를 보여주던 완행열차에서 내리니, 집과 차와 사람들로 가득 한 어마어마하게 큰 동네가 나타났다. 대구라고 했다. 백여 가구가 살던 우리 동네는 주변에서 가장 큰 동네였다. 학교도 있고 우체국도 있고 면사무소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어서 속칭 대처라고 난 자부했는데, 여긴 차원이 달랐다. 우리는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고 계속 달렸다. 달려도 달려도 익숙한 초가집은 보이지 않았고, 논도 밭도 보이지 않았다. 거리엔 차들로 가득했다. 저 많은 차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어지러웠다. 저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쌀을 구하고 땔감을 구하고 물을 구할지 궁금했다.​​​


막 배고프던 참이었는데, 선생님이 자장면을 먹으러 간다고 했다. 환호성을 지르며 소문으로만 듣던 자장면 맛이 어떨지 잔뜩 기대를 걸고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왁자지껄 떠들며 음식을 기다리다, 소변이 마려워 정낭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정낭이 뭐냐고 되묻는다. 오줌이 마렵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화장실은 저기에 있단다. 화장하는 데서 거시기를 하다니 참 의아했다. 그런데 화장실 가는 길에 그만 못 볼걸 보고 말았다. 부엌이 좁아선지 국수를 담은 밥그릇을 땅바닥에 죽 펼쳐놓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위로 사람들이 넘나들고 있었다. 친구들은 맛있다고 난리지만 난 토할 듯하여 밥그릇을 비울 수 없었다.식사 때 누군가 방귀만 꿔도, 나는 밥에 방귀 들어갔다며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던 까탈스러운 아이였다. 방귀는 거시기의 분자가 떠다니면서 그 고유한 냄새를 풍기는 거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또다시 버스를 타고, 가다서다를 되풀이하고서야 우린 달성공원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공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우와소리치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집채만 한 동물 앞에서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황소가 세상에서 제일 크다고 생각했는데, 그 발 하나만해도 황소보다 커 보였다. 이 육중한 동물은 자그마한 디딤돌을 딛고 서서, 긴 코를 손인 양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을 받아먹고 있었다.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노래가 절로 나왔다. 완전히 압도당한 채 넋을 놓고 홀린 듯 바라보고 있는데, 선생님은 저 큰 코끼리가 조그마한 불개미를 가장 무서워한다고 했다. 불개미를 피해 걸음아 날 살려라 뒤뚱뒤뚱 줄행랑치는 코끼리가 눈앞에 있는 양, 우리는 배꼽을 잡고 깔깔댔다. 바로 옆에는 공작새가 있었는데 마침 날개를 활짝 펴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길가엔 공작새를 닮은 접었다 펼 수 있는 부채를 팔고 있었다. 아부지가 좋아할 것 같아 아껴 쓰라고 준 용돈을 다 털어 넣었다. 호랑이, 사자, 기린, , 원숭이가 날 오라고 부르는 듯하여 못내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노랗게 빨갛게 물든 나무들 사이로 초록빛 잔디밭이 훤히 펼쳐지고 그 위에 예쁜 꽃으로 수놓은 시계가 보였다. 찰칵찰칵 시계바늘이 돌아가고 있었고 시간도 맞다고 했다. 우린 꽃 시계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활짝 웃어라 할수록 더욱 굳어버리는 똘망똘망한 얼굴들이 형형색색 고운 빛깔을 걷어낸 흑백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반백년이 지난 지금 영영 사라져버린 사진이 되었지만, 가슴 속에 동화 같이 아련히 남아있다. 그 동화 속에선 여전히 난 수학여행 중이다. 무르익은 들판과 울긋불긋 단풍 사이로 코끼리와 기린과 개구쟁이들과 어울려 나는 또다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고 만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4명씩 한 방에 들었다. 방에는 등잔 대신 전등이 있었다. 전기에 감전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난 누군가 먼저 스위치를 켜주기를 기다렸다. 전깃불이 들어오니 호롱불과는 비교할 수없이 눈부시게 밝았다. 호기심 많은 친구들은 불을 켰다 끄기를 반복하며 장난질을 했다. 10시가 되자 모두 불을 끄고 자라고 했다. 난 금방 잠들었지만 뭔가 콕 찌르는 듯한 통증에 깜짝 놀라 깨어났다. 아이들은 잠든 친구들에게 불침을 놓으며 짓궂은 장난질로 밤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아부지 이 부채 좀 보세요. 공작새를 닮았어요. 마음에 드세요?” 흡족해하는 아부지에게 난 코끼리 이야기를 했다. 우리 집채보다 큰 어마어마하게 큰 동물이라고 했더니 아부지는 날 놀리는구나하신다. 되풀이 이야기해도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다. 어쩌면 내가 문경 시멘트공장 굴뚝이 얼마나 큰지 상상이 되지 않았듯이 아부지도 그랬던 모양이다. 6.25 전쟁 통에 부상을 당하고 겨우 자식을 낳아 키우기 바빴으니 코끼리 구경 갈 틈도 없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어마어마한 코끼리를 아부지 눈앞에 그림같이 보여줄 수 있을까?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9.02 11:18 수정 2020.09.02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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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