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목발

김종문



학창시절에 만난 그는 늘 무거운 짐을 지고 있었다. 무슨 죄를 지은 까닭도 아니요, 다만 운명인 듯 보였다. 나는 그 무게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고서야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한때 측은한 마음을 품었었지만, 이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회사에서 팀장으로 우수한 성과를 달성하고 기분 좋게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였다. 다들 마음이 들떠서인지 뭔가 재미있는 걸 원하는 눈치다. 분위기도 고취할 겸 연말 팀 회식을 하기로 하고, 좀 그럴듯하게 계획을 세워보라고 했다. 평소 가려운 데를 잘 긁어주는 송 대리에게 맡겼는데, 간단하게 저녁식사를 하고 나서 롯데월드 지하 아이스스케이트장에서 스케이트를 타자고 했다. 1229일이었다. 저마다 이리저리 약속이 잡혀있어 다같이 모일 수 있는 날은 그 날뿐이라고 했다. 결혼기념일이었지만 나는 말도 끄집어내지 못하고, 아내에게는 사장님과 연말모임이 있다고 둘러대기로 마음먹었다.


​​저녁식사를 하자마자, 우리는 스케이트장으로 향했다. 연말이어서인지 엄마랑 같이 온 어린이들, 젊은 연인들, 많은 사람들이 신나는 음악에 맞춰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우리도 덩달아 흥이 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대열에 합류해서 빙글빙글 돌았다. 몇 년 만에 타보는가? 여의도광장에서 롤러스케이트를 몇 번 타보기는 했지만, 얼음 위에서는 초등학교시절 시골에서 얼음지치기를 한 기억이 아련할 뿐이다.

비틀비틀 한두 바퀴를 조심스럽게 돌고 나니 그래도 조금 자신이 붙었다. 슬슬 속도를 높여보았다. 그때 어린이 몇 명이 갑자기 옆으로 확 다가오기 시작했다. 엉겁결에 방향을 살짝 틀려고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발을 삐끗하고 콰당탕 엉덩방아를 찢고 말았다.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생각보다 발목에 통증이 심했다. 결국 누군가의 등에 업혀서 나와야 했다. 준비운동을 충분히 하고 조심했어야 했다.


병원 응급실로 가려다 이미 밤이 깊어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가까이 사는 팀원이 차를 몰고, 나와 송 대리가 같이 탔다. 집이 가까워와 질수록 숨겨둔 이야기를 할까 말까 고민이 됐다. 결국 난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다는 걸 이야기했다. 송 대리가 어디선가 꽃다발을 사왔다. 그 꽃다발을 손에 들고 송 대리 등에 업혀 우리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내는 기겁을 하고 놀라 어리둥절했지만 반갑게 맞아주었다. 꽃을 받아 든 아내는 간단한 음료를 내놓았고, 송 대리는 나를 대신해서 그간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았지만 연말이라고 환자를 받지를 않았다. 삐친 부위를 받침대로 고정하고 목발을 주면서 연초에 다시 오라는 말뿐이었다. 머리보다 다리를 높여야 한다고 해서 나는 며칠간 그렇게 누워 지내야 했다. 자세가 뒤집어져서 소화도 잘 안 되었는데, 아내마저 자기를 속였다가 벌 받은 거라고 놀려댄다. 그 날부터 마치 영어의 몸이 된 듯 연말연시를 꼼짝달싹 못하고 그냥 집에 처박혀 지내야 했다.


지긋지긋한 가택 연금이 끝나고 이어서 나는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오른쪽 발목 윗부분이 부러졌다고 했다. 수술을 받고 나서 퇴원할 때는 허벅지까지 깁스를 한 상태였고, 5개월 이상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한다고 했다. 깁스한 발은 움직일 때마다 몹시 아플 뿐 아니라 상당히 무겁고 불편했다. 목발은 다루기에 서툴렀고 또 힘겨웠다. 늘상 다니던 길이 그리도 멀 줄은 미처 몰랐다. 주차건물에서 사무실까지는 기껏해야 백여 미터 남짓했지만 몇 번이고 쉬어가야 했다. 비바람이 내릴 칠 때면 난감했다. 목발을 짚고 우산까지 들어야 하니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비를 고스란히 맞기 일쑤였다. 앞질러 지나가는 사람들이 마냥 부럽기만 했다. 그냥 두발로 뚜벅뚜벅 걷는 것조차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내 사무실은 2층이었는데, 승강기가 서질 않았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했는데, 평소엔 가뿐히 오르내렸지만, 이젠 험난한 길이 되고 말았다. 몇 번은 주위에 도움을 받기도 했지만 매번 그럴 수는 없었다. 힘들어도 목발을 짚고 혼자서 올라갔다. 몇 계단 오를 때마다 쉬었다 오르기를 거듭했다. 마치 극기훈련을 하듯이... 무더운 여름이었다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을 것이다. 집안에서도 불편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다못해 화장실 가는 것, 세면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바깥에 나갈 일은 아내에게 다 맡기고 난 집안에만 있어야 했다. 가까이 사는 팀원 덕택으로 그럭저럭 직장에 다닐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냥 활동이 불편한 정도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하는 일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업무관계로 외부에 나갈 일이 자주 있었지만, 내가 꼭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부득이한 경우만으로 최소화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에는 내근을 하는 부서로 발령받아, 잘 알지도 못하는 엉뚱한 일을 맡아야만 했다. 사실 그마저도 거동이 불편한 나를 상당히 배려해준 결과였다. 그러니 새로 맡은 일이 미숙해서 겪는 수모쯤이야 불평할 처지가 아니었다. 스케이트를 타다 우연히 발생한 단순한 사고가 이렇게까지 번질 줄이야?


이 악몽 같은 일을 겪고 나서야, 나는 까맣게 잊고 있던 그때 그 친구가 다시 생각났다. 여전히 그 무게를 알 수 없지만, 그의 축 처진 어깨와 슬픈 눈동자가 많은 걸 말해주는 듯했다. 그 친구와 함께 우린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의 강연을 들으러 갔었다. “돌아온 탕자란 제목이었는데, 김장환 목사가 통역을 맡았다. 극장식이어서 뒤에서도 잘 볼 수 있었고, 정해진 자리도 없었다. 서둘러 갔더니 너무 일찍 도착했는지 홀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좋은 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아래위로 옮겨 다녔다. 그는 힘든 내색 한번 없이 부지런히 쫓아다녔는데, 어느 순간 멍하니 넋을 놓고 목발을 짚은 채로 장승처럼 꼼짝도 않고 서 있었다. 소아마비로 불편한 그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다가, 그제서야 눈치를 채고 갑자기 조용해졌다. 겸연쩍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울음보가 터질 듯한 그의 얼굴이 선명한 사진이 되어 지금도 뇌리 속을 아리도록 아프게 맴돌고 있다.


내 잠시 경험은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것이다. 친구란 녀석도 이 모양일진데, 모르는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제네 아빠는 장애인이래이런 말들을 무시로 무심코 던져댈 테니 상처가 아물 틈이 없을 것이다. 택시를 잡으려 해도 그냥 무시하고 지나쳐버리곤 한다는 게 결코 빈말이 아닐 것이다. 다 건강하고 다리만 좀 불편할 뿐인데도 장애인이라고 부르니 마치 장애가 곧 그 사람인 듯한 뉘앙스이다. 제멋대로 약자라고 규정짓곤 도와주기는커녕 깔보고 차별하기 일쑤다. 이런 비뚤어진 시선만큼 견디기 힘든 일이 달리 또 있을까? 그저 슬며시 배려해주고 응원해주면 좋으련만, 나도 그러질 못했으니 부끄러울 뿐이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같은 시대에 같은 땅에서 살지만 나와는 전혀 딴 세상을 겪어왔을 게 분명하다. 혹 나 같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더욱 힘들지나 않았을는지

 

친구야 미안해!

 

 

 


전명희 기자
작성 2020.09.03 10:37 수정 2020.09.0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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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