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필의 인문학 여행] “인류의 낙원 베네치아”

피곤한 자여, 베네치아에서 자아를 찾아라

 

1. 작가로 태어나서 베네치아를 가보지 않으면 작가의 자격이 없다.

 

베네치아는 물 위에 떠 있는 도시로 동서와 현대와 과거가 혼합된 낭만을 창출했던 꿈의 도시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예술가들이 베네치아를 동경하며 탄성하였다. 베네치아의 산마르켈레 섬은 그만큼 지성인과 예술인들이 묻히고 싶은 꿈의 로망이었다. 셰익스피어가 베니스 상인을 썼고 안토니오 비발디는 이곳을 주무대로 노래하였고 라페니체 오페라 극장에선 명성 있는 음악가들이 공연을 갈망했던 곳이었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북부의 바다 위에 700년 전에 건설한 도시다. 115개의 섬과 섬이 170개 운하와 400개의 다리로 연결된 평균 수심이 1미터 갯벌에 목책을 박아 건물을 세운 도시다. 1년에 한두 번씩 태풍이 불거나 밀물이 많을 때는 건물이 1층까지 물에 잠기기도 한다.

 

베네치아는 유리 세공이 발달한 도시로 각양각색의 유리 제품이 화려한 전시장을 이루고 가면무도를 즐기는 공연장이 많아 가면의 주산지기도 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이곳에 집필실과 작업실을 갖길 원했고 부호들이나 귀족들은 아름다운 집과 별장을 지어 부와 권력을 과시하였다. 누구보다 베네치아의 유명한 예술가는 비발디였다.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서 이곳에서 죽었다.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발레리나 세르게이 다아길레프 는 러시아 사람으로 이섬을 사랑하고 이 섬에서 죽어 묻혔다. 두 분은 작곡과 발레를 연구 보급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뭐니 해도 베네치아를 사랑한 예술가는 작곡가 브람스와 시인 괴테, 바이런이었다.그리고 장자크 루소, 마크 트웨인, 마르셀 프루스트도 자주 찾았다. 베네치아를 가장 인상적으로 표현한 작가는 마르셀 프루스트였다. 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베네치아를 다시 만난 그녀라고 표현하였다.

 

마르셀이 사랑하는 애인 알베르틴과와 꿈에 그리던 베네치아로 여행을 왔는데 알베르텐가 이별을 선고하고 떠난다. 그는 버림받고 방황하다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녀를 찾아가서 재결합을 결심했는데 그녀는 이미 승마 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어머닌 절망에 빠져 방황하는데 그를 베네치아에서 내쫒는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지내다가 어느 날 우연히 존 러스킨의 소설 베네치아의 돌를 읽고 슬픔을 잊고 다시 베네치아를 찾아와서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젖어 방황하던 자신의 체험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란 소설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 작품은 시공을 넘나드는 작품으로 그를 베네치아의 작라고 불렀다.

 

2. 곤돌라와 수상택시를 타고 돌아보는 수로여행

 

섬 안에 수많은 유람선과 산처럼 높은 쿠르즈가 온 바다에 버티고 서 있었다. 섬도시 마을엔 400여개의 골목이 있는데 모두 배로 운행한다. 곤도라를 타거나 수상택시(모터보트)를 타고 돌아야 관광이 가능하다. 골목 수로를 수상택시를 타고 베네치아인들의 수상생활의 모습을 샅샅이 들여다보며 경이로운 감탄이 비명처럼 쏟아져 나온다. 그중에서 석조로 된 리알토 다리는 베네치아 수로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물이다.

 

건물 사이 수로엔 육중한 말뚝이 여기저기 꽂혀있는데 바로 이 나무 기둥을 개펄에 박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는 흔적이다. 수상택시를 타고 좁은 골목 수로를 달리는데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산타로치아를 들으며 마치 천국에서 들려오는 소리 같았다. 베네치아는 물 위에 떠 있는 도시로 동서와 현대와 과거가 혼합된 낭만을 창출하는 꿈의 도시였다. 르네상스 시대의 유럽의 예술가들은 이곳에 집필실과 작업실을 갖길 원했고 부호들이나 귀족들은 아름다운 집과 별장을 가지고 풍요로운 생활을 즐겼다.

 

3. 베네치아는 카사노바의 주무대였다.

그는 1725년 이곳에서 광대 배우의 아들로 태어나서 부모가 일찍 죽고 외할머니에게 맡겨져 자란 미숙아였다. 그러나 교육을 받으면서 문학, 신학, 예술, 법학 등 모든 면에 천재적 재능과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명문대학을 나와 추기경의 비서가 되었고 40여권의 집필서를 냈던 법학 박사였다. 외할머니와 살면서 남녀가 구별 없이 사는 수로생활에서 이성에 일찍 눈떴다. 그는 어린 날 곤돌라를 타고 수로를 돌아다니며 많은 여인의 체취를 감미했던 것이다.

 

그는 잘 생기지도 못했는데 여성들이 그를 흠모했던 것이다. 그는 45세가 될 때까지 134명의 여인과 성도락을 즐겼다. 그렇다고 성도착증 환자거나 바람둥이는 아니었다. 여인들이 그를 원했고 탐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도 아름다운 사랑을 한 여인도 있었다. 매춘부 발란티란 여인은 평생 그의 연인이면서 그의 바람기를 허락했던 자유녀였다. 아무튼 카사노바는 미색과 가문과 신분을 가릴 것 없이 베네치아 여인들의 우상이었다. 특히 귀족 사제의 부인들이 매혹했던 남자였다.

 

 

4. 산마르코 광장과 투칼레 궁전 (Palazzo Ducale)

 

베네치아의 중심부에 산마르코 광장이었다. 광장 앞에 우뚝 선 돔건물이 산마르코 성당(Basilica San Marco)이다. 언제나 광장엔 칸초네가 잔잔하게 흐른다. 나폴레옹은 이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하였다. 바로 광장의 뒤편에 나폴레온 광장이 있다. 예술가들도 산마르코 광장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만의 천국이라고 말하였다.

광장의 전면의 산마르코 성당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르코가 묻혀있다. 성당은 1063~1073년에 산마르코의 무덤 위에 세운 것이다. 황금 성당의 99미터 망루엔 사자상이 장엄하다. 광장엔 유명한 시인 예술가들이 찾아와 한담을 나눴다는 플로리안(Florian)카페가 있다.

 

투칼레궁전 (Palazzo Ducale)9세기경에 지었던 베네치아 정부청사로 베네치아를 다스리는 총독 도제가 살았던 공관이다. 현재의 궁전 모습은 14~15세기경에 지은 것이다. 투칼레 궁전과 피리자오니 누오베 감옥 사이 수로를 넘어다니는 탄식의 다리가 있는데 청사에서 재판을 받은 죄인은 이 탄식의 다리를 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프리자오닐(투갈래) 감옥엔 카사노바가 갇혀 있었다.

 

5. 플로리안(Florian) 카페에서 카사노바를 만나다.

 

베네치아에 가면 플로리안(Florian)카페에서 커피를 마셔라. 그러면 너의 예술과 사랑이 꽃을 피우리라.’

-카사노바

 

플로리안(Florian)카페는 1720년에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 문을 연 카페로 유명한 예술가, 극작가. 음악가, 화가, 문필가, 건축가, 정치가들이 이곳에서 인생과 사랑과 예술을 논하였던 곳이다. 장자크 루소는 베네치아에 머물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드나들었고 괴테, 나폴레옹, 셀리, 바이런, 쇼팽, 리스트, 바그너 토마스만 등 많은 예술가와 사상가들이 문학과 음악과 화화를 논하고 사상을 논하며 정보와 우정을 교환하며 사랑에 빠져 작품을 구상했고 숫한 귀족 부인들이 카사노바와 염문을 뿌린 장소이다.

 

태어나서 베네치아의 가보는 것이 소원이고 플로리안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예술가들의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이 심금을 울린다. 당시 예술가들은 이곳에서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여인들은 그들의 예술 속에 묻혀 사랑받길 원 했던 곳으로 여행가들과 예술가와 문필가들이 교감을 이루는 아름다운 지성과 낭만을 지닌 카페이다.

 

플로리안 카페는 카사노바가 단골로 다녔다. 카사노바는 귀부인 성직자 부인들과 이곳에서 사랑을 속삭였다. 베네치아의 플로리안 카페엔 밤낮과 시대를 초월하여 예술가들이 붐볐다. 그 카페에서 와인을 마셔보는 것이 작가들의 로망이었다.

 

6. 이탈리아 정서를 표현하는 칸초네

 

산마리코광장에서 칸초네가 항상 울려 퍼졌다.‘카사비앙카(언덕위의 하얀 집)’서정어린 음악이 잔잔하게 배경 음악으로 흘러나왔다. 칸초네(canzone)'노래'라는 뜻으로 프랑스어로는 '샹송'인데 이탈리아의 파퓰러 송이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칸초네를 민요나 대중음악처럼 부르고 있다. 해마다 많은 칸초네 페스티벌이 있는데 최초로 나폴리에서 피에디 그롯타가요제로 시작하였다. 그 축제에서 , 나의 태양’, ‘5월의 밤같은 명곡이 나왔고 산레모 페스티벌은 현재까지 유명한 가수와 아름다운 곡을 남겼다. 칸초네는 감미로운 우아함과 달콤하고 아름다운 멜로디로 주목을 받았다.

 

1960년에 소 도미니코 모두뇨는 리듬보다는 가사에 중점을 둔 내용을 써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고 그 뒤로 운베르토 빈디, 피노 도낫죠, 지노 파올리 등이 명성을 떨치면서 아방가르드적인 칸초네가 젊은 층에 인기를 차지하였다. 칸초네의 가치는 역시 멜로디였다. 콘티넨탈 탱고가 전성시대를 이르면서 칸초네는 원래의 리듬에서 탈루했지만 천천히 원래의 멜로디를 찾아가고 있다.

 

* 그 찬란한 르네상스 문화의 절정을 이루던 베네치아는 중세 페스트 팬데믹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고 찬란한 문화가 단절되면서 베네치아는 망하고 말았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 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

 

김용필 danmoon@hanmail.net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9.07 10:49 수정 2020.09.0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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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