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끝내 못 다한 이야기

김회권



어느 땐 세월이란 게 참 쓸모없고, 무용하기 이를 데 없다는 생각이 든다. 흐른 세월만큼 잊히고 지워질 법한데 좀처럼 희석되거나 바래지 않는 게 있어서다. 그게 오늘따라 차고 쓸쓸히, 그러면서 아름다운 환영처럼 밀려온다.


지난 나의 청춘이 한갓 꿈이었던들 어떠리. 그게 한 인간을 보이지 않게 문득 성장하게 하는 꿈인 바에야. 하지만 나는 아직도 모른다. 우리가 눈물의 깊이만큼 사랑했고, 이별의 아픔만큼 그리워했던가를.


내 한때는 술을 간단없이 부어 마셨고, 어느 땐 꿈의 추억을 되살리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이젠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 다시 돌아갈 노랫소리 없다. 단지 그 무렵의 추억만이 맥박처럼 뛰놀 뿐, 가없이 표적도 없이 가버린 옛 추억들을 이제 조용히 끄집으며 반추하려 한다.


내가 처음 그 여인을 만난 곳은 전주시청 부근에 있는 2층 화실(畫室)에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녀는 화실을 운영하였고, 몇 차례 개인전도 갖은 지역에선 꽤 이름 난 화가였다. 나는 사범대 졸업을 앞둔 대학생으로 그녀의 화실에서 기초적인 데생이며 정물화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두 살 연하였다. 내 초등학교 후배라는 것은 후에 알았다. 그녀의 첫인상은 뭔지 모를 고뇌와 내면의 쓸쓸함이 묻어있었다. 그러면서 쉽사리 근접할 수 없는 무언가를 고귀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다. 간혹 석양 무렵, 노을 진 창가에 앉아 고요한 눈빛으로 하늘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를 볼 적엔, 결코 내 지닐 수 없는 어떤 신비감이 들었다.


그녀와 대화는 조금 낯설었지만 걸림돌이 없었다. 마치 내 미숙한 화법(話法)을 익히 알고 있듯, 자연스러우면서도 친숙한 언어로 분위기를 이끌어나갔다. 조금은 느릿하면서 저음인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 한 점 없이 움찍 않는 갈대 같았다. 어쩌면 그녀의 내면세계는 탄탄하면서 육중한 그 무엇이 들어있지 않았나 싶다. 그게 내 마음의 눈을 뜨고 감을 수 없게 했다.


한 사람이 다른 한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어느 깊은 강물을 손으로 헤쳐 나가는 그런 일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더욱 그녀를 존경하였고, 그녀의 관대함 또한 내 마음을 확장시키는데 충분했다.

우린 주로 화실의 문을 닫은 후에야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 둘만의 마음의 화폭에 사랑을 그려나갔다. 그 시간은 참으로 아름답고 빛났으며 숭고했다. 정말이지 한 영혼과 친숙하다는 게 이리 가슴 벅찬지 몰랐다. 한 사람이 살아왔던 삶과 앞으로 살아갈 그의 행로에 함께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어쩌면 그녀와의 인연은 내 인생 일대의 가장 귀중한 보물 중 하나가 아닐까, 그리 자찬했다.


우리는 공원, 찻집, 도서관, 혹은 거리를 거닐며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시간이든 그녀와 마주한 시간은 작은 울안에 갇힌 봄인 양 가슴 울렁댔다. 부드러운 골짜기나 유유히 흐르는 강 너머로 함께 해가 지는 것을 볼 적엔 이 세상에 우리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삶의 환희를 우리만 얻어 마시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헤어질 적이면 나는 그녀를 떠나보내기 싫었다. 수인(修因)이 창가의 자리를 영영 떠나지 못하듯, 그녀의 한없는 미소를 나의 햇살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모든 건 내 소망대로 이룩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앓았던 폐결핵이 다시 도져 재발한 것이다. 안일하게 대하고 방치했던 게 더 화근이었다. 병원과 보건소를 오가며 한 주먹의 독한 약과 스트렙토마이신 주소를 집중적으로 맞았지만 예전처럼 완쾌되거나 정상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 방책으로 약봉지를 들고 찾아든 곳은 산새 깊은 암자였다. 그보다 먼저 그녀에게 내 병명을 알렸고, 당분간 만남을 미루었다. 그날 불안과 근심에 쌓였던 그녀의 얼굴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우린 그렇게 만남을 보류했고, 서로의 소식을 편지로 주고받았다. 우편배달은 스님의 하행 길에 맡겼고, 그녀의 답장은 산자락 아래 산지기가 맡아놓은 것을 스님께서 가져다주었다. 그러던 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편지가 듬성듬성 오더니 깜깜 무소식이었다. 몇 번이고 보낸 편지에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나는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마음은 점점 초조했고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당장 달려가 무슨 일인지 알고 싶었지만 자꾸 주저되었다.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란 불안한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것을 직면하기가 나는 두려웠고 겁이 났다.

나의 불길한 예감은 점점 낯설게 다가오는 이별로 감지되었다. 그러면서 광막하고 고요한 벌판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 깜깜한 어둠 속 낯선 사내의 공모의 눈짓이 꿈속에 보였고, 그 여자의 손을 잡고 훌훌 떠나는 모습까지 여러 번 나타났다.


전에는 인생이라는 게 나도 모를 어딘가 먼 곳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흘러가 버렸다고 한다면, 그때는 많은 일들이 내 앞에서 한꺼번에 벌어지고 부수어지고 있다는 비애와 슬픔만이 뒤엉켰다.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나 자신을 돌아봤다. 장래가 촉망 받는 그녀와 달리 나는 가진 게 없었다. 더욱이 몹쓸 병까지 얻었으니 장차 교사가 된다는 것도 불투명했다. 내겐 그녀를 부여잡을 무엇이 없었다. 그보다 이에 대처할 어떠한 방법도 전혀 잡히지 않았다. 모든 것이 오리무중이었고, 의지가지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그러면서 당장에 메워야 할 시간들이 너무도 많이 남아돈다고 생각했다. 안개처럼 졸던 시간만 쓸쓸하고 초라하니 흘러갔다. 그 자리에 한조각 그리움만 남았다.

그 이듬해 봄이었다. 나는 잠깐 산에서 내려올 일이 생겼다. 대학 친구가 교통사고로 그만 세상을 떠났다는 거다. 난데없이 찾아든 그 비보는 나를 큰 충격으로 휩싸이게 했다. 좀처럼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삶 또한 허무했다.

비통한 마음으로 발길을 옮겨 고인의 영정으로 다가가는 순간, 태풍의 노호가 나를 기다릴 줄 차마 몰랐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한 여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그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본 순간, 나는 묵직한 쇳덩어리로 가슴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토록 만나기를 염원했던 그 여자였다. 나는 어긋나버린 희망을 다시 절감했다.


그녀가 고인인 내 친구와 남매지간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한 순간 광란하는 꿈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편 없던 반가움이 솟아났다. 가슴까지 쿵덕거렸다. 할 수 만 있다면 그녀의 손을 잡고 껑충껑충 뛰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꿈속에 봤던 그 낯선 남자가 그녀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 눈에도 두 사람 사이가 어떤지 직감했다. 사내는 슬프면서 정감 있는 눈빛과 다정한 손으로 그녀를 위로하는데 여념 없다. 나는 또다시 상처 입은 작은 짐승이었다.

한때는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이 풍선처럼 차올라 무엇 하나 파고들 틈이 없었는데, 이젠 아니다. 모든 게 환연히 달라졌다. 고약한 불신과 배반의 뒷맛만 흐를 뿐이다. 그녀의 놀람과 기막힌 침묵 뒤로 나는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디 가서 술 한 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내 몸뚱이가 그저 역겹고 슬프기만 했다.

시간이란 게 참으로 희한하다. 막상 그렇게 헤어지자 내 마음에 없던 평화가 찾아들었다. 세상은 나와 아무 상관없이 잘도 돌아갔고, 그리움이란 것도 흐릿한 빛 속으로 잠겨 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나의 몸은 회복되었고, 산을 내려와 중도한 학업을 마쳤다. 조금 늦은 졸업이었다.

내가 첫 발령을 받은 학교는 전남 함평에 위치한 한적한 바닷가 옆이었다. 말이 바다이지 땅을 일궈 먹고사는 주민들이 더 많아 농촌이라 해도 무방하다. 나는 하숙을 했고, 집 앞엔 야트막한 언덕배기가 하나 있었다. 이따금 나는 그 동산에 올라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곤 했다.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 저 너머에 누가 살고 있을까, 동화 같은 생각도 했다. 어느 땐 단풍잎처럼 붉게 물든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괜한 슬픔에 젖어들곤 했다. 아직 내게 그리움이란 게 남아있는 걸까. 마음이 까닭 없게 출렁였다.


그런 어느 날, 해와 달과 바람과 파도만이 품고 사는 바다에 한 여인이 찾아왔다. 내내 잊고 지냈던 그 여자였다. 근 이 년만이다. 그녀와 나는 가까운 돌섬으로 나갔다. 우린 서로 말이 없었고, 바다는 조용히 길을 내주었다. 나는 어디쯤에 이르러 자개농처럼 바위에 붙은 석화 하나를 떼어내 그녀의 붉은 입술에 대주었다. 그러자 그녀의 입술이 가늘게 떤다. 석양녘 몸부림치는 태양의 마지막 눈길이 구름 너머로 살포시 내려다본다. 깨알처럼 부서지는 황금빛 햇살은 바다 위로 우수수 내려앉는다.


그녀와 나는 그만그만한 거리를 두고 짠 내음 가득 머금은 방파제로 옮겼다. 그리고 나란히 햇빛이 곱게 달궈진 둑에 앉았다. 하얀 안개꽃들도 소리 없이 우리 곁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둑 아래로 내려가 안개꽃 한 송이를 꺾어 그녀의 손등에 살짝 얹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손이 금세 꽃처럼 하얗게 피어난다. 홍조 띤 그녀의 두 뺨은 붉은 저녁노을보다 더 붉다.


어디선가 갈매기 한 마리가 머리 위로 휘익 날아오른다. 나는 저 갈매기가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를 그녀에 대한 소식을 신에게로 전하려간다고 생각했다. 우린 아무 말 없이 갈매기떼 노니는 바다만 바라봤다. 무정한 파도는 하얗게 부서지며 모래밭에 납작 엎딘다.


나는 처음에 그녀에게 하고픈 말, 전해 줄 말이 참으로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무어라 말을 건네려 하면 갈매기떼가 날아들어 내 속마음을 딸꾹딸꾹 삼키었다. 나는 그녀의 고운 손등만 내려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사이 갯바람만 잠깐씩 쉬었다 갔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지된 시간들이 일순간 빠르게 흘러갔다. 파도는 그녀를 떠나보내기 싫다는 듯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며 눈물 같은 포말을 일으킨다.


나는 읍내 버스정류장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고 싶었지만 그 뜨건 악수를 풀고 나면 영영 못 볼까봐 손을 내밀지 못했다. 그 대신 언제 다시 바다를 찾아 줄 거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어느 새 차장 안에서 고운 손만 흔들어 보인다. 그렇게 그녀를 떠나보내고 다시 바다를 찾아들었을 때, 그 바다는 붉은 노을로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날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던 여인. 우린 서로 말이 없었지만 그렇게 영영 헤어졌다. 마치 오래전 예고된 이별처럼.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9.09 10:26 수정 2020.09.09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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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