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한국 근현대사 속, 그리운 나의 외할아버지

문예찬



나는 학생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역사 선생이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면 한 가지 특징이 있다. 한국사 교과서의 반 정도는 인류의 시작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선사시대는 제외하고 고조선부터만 생각하더라도 단군신화부터 대략 조선시대 후기까지가 한국사 역사 교과서의 반을 차지한다. 시간적으로만 봐도 매우 긴 시간이다. 반면에 한국사 교과서의 나머지 반은 흥선대원군 집권기부터 오늘날 대한민국의 역사까지를 다루고 있다. 역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시간적으로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한국사 교과서의 반을 차지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사건과 인물들이 교과서에 등장한다.


역사를 공부하고 학생들에게 가르치다 보면 역사적 사건 속에서 많은 인물들을 만난다. 역사의 어느 시기가 살아가기에 편했겠냐 만은 특히나 한국 근현대는 민족적 측면에서나 국가적 측면에서나 또 그 시대를 살았던 개인 측면에서나 너무나 힘들고 고단했던 시기의 역사이다. 이런 한국 근현대사의 시기를 삶으로 살아가셨던 분이 바로 나의 외할아버지이다. 학생들에게 한국 근현대사 수업을 할 때면 나의 외할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외할아버지는 나를 참 많이 예뻐하셨다. 내가 외할아버지 집에 가기로 한 날이면 내가 언제 도착하나 싶어 아파트 복도에서 바깥을 보시며 날 기다리셨다. 어렸을 적 외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면 외할아버지는 나를 옆에 앉히시고 외할아버지가 참 좋아하시던 카라멜을 두세 개 내 손에 쥐여주시며 당신의 이야기를 하시곤 하셨다. 나는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였던 1926720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나셨다. 당시 외할아버지의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외할아버지의 어머니는 혼자 자식들을 양육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는 어렸을 때 정주에 있는 소학교를 다니셨는데, 할아버지가 다른 학생들보다 우수하셔서 월반을 하셨다고 한다. 그 후 소학교를 졸업하시고, 고등학교(보통학교)를 다니셨다. 이때가 대략 1930년대 후반에서 1940년대 정도인데, 이 시기는 특히나 일제에 의해 민족 말살정책이 진행되던 시기로 학교에서는 한국어를 금지시켰고 일본어를 가르쳤다. 이때 외할아버지도 일본어를 배우셨는데, 후에 60세가 넘으셨는데도 일본어 교사인 큰이모를 만나러 온 일본인 손님과 일본어로 대화가 가능하셨다.


당시에 외할아버지는 굉장히 부유하셨고, 이북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외할아버지의 큰형님이 밭을 가시는데 점심 식사도 거르신 채 하루 종일 논을 갈아, 그만 소가 지쳐 쓰러졌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농사일을 하는 게 싫어서 같이 하고 있던 포목점에서 외할아버지 어머니의 일을 도와드렸다고 한다. 나는 외할아버지네 소가 쓰러지는 모습, 외할아버지가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농사일을 하기 싫어하시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슬며시 웃곤 했다.

광복과 한국 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큰 역사적 사건들은 우리 외할아버지의 삶을 그냥 비껴가지 않았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후 19458월 이북에는 소련군과 함께 김일성이 들어왔고, 1948년 북한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와중에 1946년 이북지역에서 토지몰수 작업이 실시되면서 외할아버지네 땅이 대부분 몰수되셨던 것 같다. 시대의 격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결국 한국전쟁이 발발 한 것이다.

전쟁이 일어난 후 외할아버지는 19511.4 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오셨다가, 국군으로 입대하셨다. 외할아버지가 남한으로 오셨을 때는 인민군징집을 피해 임시로 남한에 내려오셨는데, 휴전이 되면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되실 줄은 모르셨다고 한다. 또한 입대한 후에는 군대에서 군 신문을 만드는 일을 하셨다고 한다. 외할아버지의 사촌동생은 이북에서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외할아버지께서 면회를 가셨는데 그 덩치 큰 애가 뼈만 남아있어서 마음이 아프더라야.’라고 특유의 평안도 사투리로 말씀하셨다. 후에 이 사촌 동생은 19536월 이승만 대통령이 반공포로를 석방할 때 석방되어 남한에 남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와중에 가족들과 헤어지시고 정든 고향을 잃으셨다.

대구에 정착하시고 난 후, 대구에 아무런 연고도 없이 내던져진 외할아버지는 친척 집에 더부살이를 하시다가, 곧 실 장사를 시작하셨다. 이때는 한참 경제발전 5개년 계획으로 대표되는 산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특히 대구의 섬유 산업이 활성화 되는 시기여서, 돈을 많이 버셨다고 한다. 작은이모의 말에 따르면 영화 국제시장에도 나오는 것처럼 그 당시 귀했던 미제 냉장고, 전화와 전축이 있었을 정도로 부유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의 파도는 다시 한번 외할아버지의 삶을 덮쳤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나가고 대구의 섬유 산업이 점차 위축되어 갔다. 외할아버지의 공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친구에게 집 담보로 보증을 섰는데, 집이 은행으로 넘어가 버렸다. 작은이모의 기억으로는, 그 당시 살던 집이 동네에서 가장 컸었는데 대문 옆에 한자로 새겨진 문패를, 쫓겨나시다시피 그 집에서 이사 나올 때 외할머니가 떼 내어 오셔서 화장대 서랍에 오랫동안 그 문패가 간직되어 있어, 그 문패를 볼 때마다 이모의 마음이 씁쓸했다고 한다. 그 후 당시에는 시골이었던 반야월로 이사를 하셨다.

이후 제1차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면서 한반도 평화무드가 형성되었다. 북한의 모습이나 북한사람들, 남북 이산가족 상봉 등의 장면이 뉴스에 자주 나왔다. 몇십 년 동안 가족을 그리워 하셨던 할아버지가 그런 뉴스를 어떤 심정으로 보셨을지 짐작이 간다. 가족들이 할아버지께 북한에 계신 가족들을 찾아보고 편지도 보내보라고 하셨지만 할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다. 나중에 안 이야기지만 혹시나 남한에 월남한 가족이 있다는 것을 북한당국이 알게 되면 북한에 남겨진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 봐 그러셨다고 한다. 그때까지도 분단은 현재 진행형으로 할아버지의 인생을 갈라놓고 있었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2013,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 전날 외할아버지의 상태가 위급하다는 소리를 듣고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의 집이 있는 시지로 갔었다. 침대에 누워서 가쁜 숨을 몰아쉬시던 외할아버지께서는 나와 우리 가족이 오자, 억지로 눈을 뜨시며 나의 모습을 보셨다. 아직도 나를 바라보시던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눈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나의 기억 속에 할아버지는 늘 위트와 여유가 넘치셨던 분이셨고, 자식들과 손자들을 사랑하시는 따뜻한 분이셨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은 한 개인이 삶을 마감하는 순간이기도 하였지만, 외할아버지가 몸소 살아내셨던 비극적인 우리의 근현대사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 가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할아버지는 영천에 있는 호국원에 영면하셨다. 할아버지의 장례식 날 나는 영정사진 대신에, 화가인 외삼촌이 그리신 초상화를 들고 장례식을 치렀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이신 외할아버지는 참여정부 때 받은 6.25참전용사 감사패를 늘 자랑스러워 하셨다. 외할아버지의 관을 감싸던 태극기와 호국원 군데군데에 쓰인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가 적힌 글들을 보며 나는 매우 자랑스러웠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우리나라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인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셔서, 광복, 한국 전쟁, 경제발전과 민주화 운동을 겪으셨다. 돌아가시기 몇 개월 전에도 이북에 계시던 형제들과 어머니를 그리워하시는 걸 보면서, 내가 역사 속에서만 만났던, 우리 민족과 국가가 겪은 비극적 사건들이 개인의 삶에도 얼마나 큰 한과 상처로 남아있는지 느끼게 되었다. 아직도 학생들과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하다 보면 외할아버지가 그립고 보고 싶다. 글=문예찬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09.18 09:49 수정 2020.09.1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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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