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산정천리] 포천 광덕산에서 풀잎처럼 눕다

여계봉 선임기자


포천 이동의 백운계곡에서 사창리를 잇는 캐러멜 고개로 올라가는 도로 주위에는 새벽에 내린 비로 숲은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그 속에는 영혼이 맑은 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꼿꼿이 서있다. 먼 길을 달려 왔는데 3년 만에 다시 찾은 광덕산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상해봉에 올라 바라본 광덕산. 이름만큼 산의 모습이 웅장하고 덕의 기운이 넘친다.


포천 광덕산은 그동안 근처 백운계곡으로 유명한 백운산에 가려 있어 그다지 알려진 산이 아니었는데, 근래에 백두대간에 이어 한북정맥을 종주하는 등산객들과 산정의 천문대를 찾는 사람들이 느는 바람에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 수도권에서 당일 산행이 가능할 뿐더러 등산 시작 지점이 620m여서 정상까지 산행 거리가 길지 않고, 기상관측소까지 임도가 잘 닦여 있어 접근이 용이한 편이다.

 

광덕고개 너머 광덕마을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산으로 들어선다. 산행은 대부분 교통이 편리하고 원점 회귀가 가능한 광덕고개 아래 광덕마을의 산정가든에서 시작한다. 오늘은 산장가든을 출발, 임도를 따라 회목현을 거쳐 상해봉에 올랐다가 다시 임도로 내려와 천문대와 기상대를 지나 광덕산 정상에 도착한 후 잣나무 숲을 통해 산장가든으로 하산하는 원점회귀 산행인데, 이동거리는 약 9km, 산행시간은 4시간 정도 걸린다.

 

가든 왼쪽 길로 접어들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마을길을 지나 300m 오르면 번암교가 오른쪽으로 나타나고, 여기서 맞은편을 등산로 입구가 보이는데, 나중에 광덕산 정상에서 하산할 때 만나는 날머리이다.


광덕산 임도는 원래 군사도로였는데, 산정 부근에 기상대와 천문대가 생기면서 확장되었다.


길가의 들국화들이 산을 오르는 산객의 거친 호흡과 들뜬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제법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따라 회목현에 이르는 임도의 길섶에는 참나무 숲이 군락을 이룬다. 가을 하늘을 덮은 상수리나무, 참나무, 철쭉나무, 청단풍나무 숲 사이로 쑥부쟁이, 미역취, 구절초, 투구꽃, 향초, 며느리밥풀꽃 등 흐드러지게 핀 가을 야생화들을 만날 수 있다. 광덕산의 완만한 골짜기는 토양이 기름지고 습기가 많아 야생화가 잘 자란다. 숲으로 발길을 들여놓으면 계절과 시기에 따라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꽃을 만날 수 있는 야생화의 산이 바로 광덕산이다.

 

가냘픈 꽃대로 꽃을 피우는 들꽃들은 풀벌레 소리까지 데려온다.

포장된 임도는 산객에게 마냥 달갑지는 않지만 길 오른쪽으로 막힘없이 트인 풍경과 길 양쪽에 핀 야생화들이 하늘거리며 반기고 선선한 가을바람마저 자유로이 소통하니 단박에 자연과 사람은 하나가 된다.


회목현. 여기서 임도 방향은 천문대와 기상대, 오른쪽은 상해봉 가는 길이다.


너른 광장이 있는 회목현의 군사시설 건너편에 작은 쉼터가 있는데, 이 지역이 6.25때 격전지였고 산화한 국군의 유해 발굴 작업이 최근까지 이루어졌음을 알려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어서 헬기장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숲 사이로 우뚝 서있는 봉우리 하나가 보이는데 잠시 후 오를 상해봉이다. 오솔길을 따라 상해봉으로 가는 중간 중간에 잘 보수된 참호들이 연이어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민통선과 멀지 않은 전방지역임을 새삼 깨닫는다. 500m 정도 오솔길을 따라 가면 능선 가운데 높이 50m 정도의 암봉 하나가 길을 막고 서있다. 암봉 아래 작은 쉼터에 배낭과 스틱을 두고 맨몸으로 급경사의 슬랩을 올라서면 상해봉 정상이다.


경사가 급한 상해봉 암벽에는 로프와 철제 받침대가 설치되어 있다.


상해봉(上海峰)은 정상을 이룬 바위지대가 마치 망망대해에 떠 있는 암초와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광덕산에서 가장 돋보이는 암봉으로, 먼 옛날 이곳이 바다였다는 전설이 전해져온다. 정상에서 북쪽 방향으로는 명성산, 각흘산, 보개산, 금학산, 고대산이, 남쪽으로는 경기 최고봉 화악산, 명지산, 국망봉, 백운산이, 우측으로는 복계산, 대성산, 복주산, 회목봉이 일망무제의 파노마라를 연출한다. 특히 대성산, 복계산, 복주산, 회목봉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마루금을 이곳에서 조망할 수 있어 한북정맥 최고의 전망대라고 불린다. 오늘은 날씨까지 청명하여 대성산 너머 북한 땅 오성산까지도 잘 보인다. 광덕산 정상은 조망이 별로이기 때문에 이곳 상해봉에서 충분히 조망을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좋다.

 

상해봉 정상석 뒤로 복계산, 대성산, 복주산, 회목봉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광덕산은 백두대간의 추가령에서 갈라져 남쪽으로 한강과 임진강에 이르는 산줄기인 한북정맥을 종주하는 산악인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다. 상해봉은 한북정맥 능선과 경기도의 주요 봉우리들이 그려내는 첩첩 산그리메가 장관이다. 산들머리에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커다란 축구공을 머리에 올려놓은 것 같은 천문대와 기상관측소가 아스라이 보인다.

 

이곳에 서면 백운산, 국망봉, 강씨봉, 청계산, 운악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산그리메를 볼 수 있다.
발 아래로 우리가 가야할 천문대와 기상대로 이어지는 임도가 아스라이 보인다.


상해봉에서 회목현으로 다시 내려와 천문대로 가는 2km 임도 좌우에는 노란 고들빼기가 줄기 마디마디에 햇살 같은 꽃을 달고 있고, 양지바른 바위의 엉성한 틈새에는 연보랏빛 쑥부쟁이가 상쾌한 가을바람에 하늘거리며 춤을 추고 있다. 들꽃들이 바람에 날리는 것은 자신의 홀씨를 풀섶에 내려놓기 위해서다. 이들은 바람결에 작은 몸짓으로 얼마나 춤을 추어야했을까. 나도 그 무엇을 위해 이들처럼 처절하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광덕산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서로 엉켜도 싸우지 않는다. 숲속의 나무들은 바람에 서걱대도 서로 상처를 입히지 않고 안온하게 동거한다. 세월이 흘러 나잇살을 먹으니 비로소 무위자연(無爲自然)하며 사는 것이 순리임을 산에서 깨닫는다.


꽃말이 ‘기다림’인 쑥부쟁이. 이 계절이 끝날 때까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조경철천문대는 별과 함께 살아온 아폴로박사 조경철 박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4년 화천군에서 건립하였다. 천문대가 위치해있는 해발 1,010m 광덕산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은하수 촬영이 가능한 무공해 청정지역이어서 고즈넉한 풍경 아래 신비한 우주 천체와 밤하늘의 별천지를 만끽할 수 있다.


조경철천문대. 한여름 밤에 아름다운 은하수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


천문대를 지나 기상대로 가는 임도 오른쪽으로 명성산과 각흘산, 동송읍과 철원평야, 그리고 그 너른 벌을 적셔주는 한탄강이 보인다. 이윽고 돔 형태의 광덕산 기상레이더 관측소가 나온다.


박달봉 너머 명성산과 각흘산으로 이어지는 마루금이 눈 아래로 시원하다.


기상대를 지나서 오솔길을 따라 약 400여 미터 가면 나타나는 작은 언덕이 광덕산 정상이다. 광덕산은 강원도 포천시와 화천군, 철원군 3개 시군에 걸쳐 있다. 광덕산에는 3봉이 있는데, 해발 1,046m인 정상이 첫째, 1차이로 낮은 기상대 옆 봉우리가 둘째, 1,010인 상해봉이 셋째다.

 

광덕산 정상. 정상석 뒤로만 시계가 트여 있다.


정상에서 박달봉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직진하면 박달봉, 좌측은 광덕마을로 내려가는 길이다. 숲은 그 입구부터 가파르지만 골짜기는 과감하게 산객에게 길을 내어 준다. 울창한 원시림이 가을 햇살을 가로막는 바람에 한낮의 숲속은 침잠하다. 어스름한 가을 산 숲속의 한동안 고요도 잠시, 잣 수확하는 사람들이 치는 막대기 소리가 저 밑에서 올라오면서 숲의 정적이 깨진다. 조용히 흔들리다 그냥 떨어진 잣 하나를 주워서 잣알을 힘들게 꺼내 야생의 맛을 즐겨본다.


광덕산은 요즘 잣 수확이 한창이라 숲속은 요란하다.


가을이 되어도 기세등등한 코로나19 때문에 가슴에 크고 작은 불안과 스트레스가 잠재되어 있다면 가을 들녘에 핀 야생화를 만나러 떠나라. 비록 이름 모를 하찮은 풀꽃이지만 저들은 절로 나고 절로 자라 꽃 피우고 향기까지 내뿜지 않는가. 저 작고 가냘픈 몸매에 약하고 약한 꽃대를 달고 싱싱한 꽃을 피우는 들꽃들. 저들을 만나면 당신 가슴속의 불안과 스트레스는 풀잎처럼 누울 것이다.

 

가을 광덕산은 그렇게 조금씩 익어간다.



 


여계봉 선임기자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9.28 11:21 수정 2020.09.28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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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