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프로젝트] 아직은 덜 펼쳐진 날개를 위하여

박지니



진정으로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바로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이지요.” 미국의 국민화가인 모지스 할머니가 한 말이다. 모지스 할머니는 75세에 그림을 시작하여 101세까지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나는, 작년에 귀가 순해진다는 환갑을 지났다. 구정 바로 뒷날이 나의 생일이다. 진갑이라니... 참 많이도 걸어온 것 같다. 문득, 뒤 돌아 보니 시린 너덜겅을 오래도록 지났다. 풍경의 모랭이 하나하나에는 진한 가난과 때 절은 아픔들이 뭉텅뭉텅 녹아있다.


환갑이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한쪽 구석에 바래어져가는 사진 같은 단어이다. 나의 생도 희멀건 색깔로 변해있는 시점을 일컫는 말인 것도 같다. 그래서 나는 환갑(還甲)이 아니라 화갑(華甲)이라고 하고 싶다. 화려한 갑()의 해, 우중충함이 아닌 화려함으로 색칠한 나의 마음을 가을날 눈을 찌를 것 같은 푸른 하늘이라면 남들은 믿어줄까? 남들이 믿든, 믿지 아니하든 나는 지금도 열심히 날개 짓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날 까지 펄럭거릴 것이다.


어린 날 수없이 넘어졌던 아픈 기억들. 초등학교 4학년 때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버린 무책임한 아버지. 그 아버지의 자리를 채우신다고 동분서주 하셨던 하얀 치자꽃 같이 가녀린 엄마. 그리고 단단한 자전거 두 바퀴를 닮은 생활력 강한 언니. 아무것도 모르는 천방지축 진창이었던(어린 날 친척아저씨가 나에게 진창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었음) . 그런 여자 셋이서 한 가정을 채우고 있었던 어린 시절 이었다. 남들은 곧잘 맞춰 입는 멋진 교복을 난 한 번도 맞춰 입어보질 못했다. 늘 언니가 만들어주는 교복을 고등학교까지 입었다. 내 마음에는 정말 들지 않는 교복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처럼 때깔나게 입어보고 싶었던 교복과 1년에 몇 번씩 내야하는 학자금에 항상 동동거렸기 때문이다. 청소년기는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지나듯 흘러가며 꼭 가고 싶었던 대학도 진학을 하지 못했다. 성적이 되질 않아 가지를 못했다면 억울함은 덜 하였으리라.

진학을 할 수 없다는 서글픈 현실에 집 뒤의 작은 산에 올라가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다정다감하신 장ㅇㅇ선생님처럼 나도 그 선생님 닮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마냥 울기만 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십 번 나를 넘어지게 한 사연들이 나를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더욱 힘 있게 날아 보려고 생각했다. 의식주 해결이 원활치 못했던 시절이었기에 배움에 대한 갈망 하나만으로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질 않았다.

작은 사무실에 취직을 하고 통신대학을 입학했다. 통신대학에서 편입을 해 교육대학을 갈 계산이었다. 2학년 초에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러다 조금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하였다. 하지만 떨쳐버리고 싶었던 가난과 배움의 그리움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았다. 장남인 남편에게는 노모와 결혼하지 않은 두 명의 시누이와 한명의 시동생이 있었다. 변변치 못한 나는 결혼하자마자 연년생으로 아이를 출산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며느리에게는 시어머니의 존재가 너무 큰 바위처럼 다가왔다. 늘 시어머니 눈치 살피기에만 급급한 생활이었다.

남편 한 사람의 수입으로 좁은 공간에서 8명의 식구들이 복작거렸다. 많이도 울었고 아팠던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굶주림을 채소와 물로 채우기도 했다. 단돈 몇 푼이 없어 아이의 예방주사를 놓치기도 했다. 아이에게 준 고통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목이 탄다. 무능한 엄마를 탓하며 자신에게 아무 소용도 없는 회초리를 든 날도 많았다. 남편의 전근으로 단 1년 시댁식구랑 떨어져 있을 때 시댁에 제사가 있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7살과 6, 2살배기 아이들 셋을 데리고 차멀미를 하며 시댁에 도착했다. 대문에 들어서는데 물이 담긴 냄비가 나를 향해 날아왔다. 장남며느리이면서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다. 아이들 셋이랑 새벽부터 부산을 떨며 최대한 빠른 차를 탄 것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시어머니는 거리를 생각지 않고 시간만 생각하신 것 같다. 내게는 늘 호랑이만큼 무서운 시어머니셨다.

얼룩진 시간들이 이제는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의 생채기들은 딱지가 되어 말끔히 떨어졌다. 이젠 작은 나의 꿈을 향해서 한번 날아 보려고 하는 중이다. 나의 보석들, 잘 성장해 반듯한 직장들을 가진 생사리 같은 아들 둘과 딸 하나이다. 그리고 무뚝뚝하긴 하지만 아주 든든한 지원군인 서방님이랑 함께 한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서 그 꿈의 디딤돌을 위한 단계중의 하나로 재작년 후반기에 서울디지털대학 문예창작학과에 입학을 하였다. 지금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졸업을 하려면 아직 1년이 더 남아 있다. 남들은 늦은 나이에 공부와 씨름한다고 힘들겠다고 말들을 하지만 정작 난 하나도 힘이 들지 않는다. 다만 시간이 좀 모자랄 때가 있기는 하지만. 전액 장학은 아니어도 가끔 장학금을 받을 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

시를 쓴다는 일. 늘 두근두근 이다. 나의 꿈에 날개를 달아주는 과정이다. 물론 시를 쓴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느낀다. 어느 친구는많이 아파야 글이 나온다.’고 까지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꼭 맞는 정답도 아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어느 지역에서 백일장이라도 있다면 참여를 해보려고 노력을 한다. 거리가 멀면 버스를 타든지, 가끔은 서방님이 대동해주어 편하게 다녀 올 때도 있다. 어쩌다 상을 하나 받기를 하면 금상첨화이기도 하지만 그냥 작품을 하나 순산한다는 생각으로 참여를 해 본다. 그러다보니 상장도 더러 받았고 작품도 제법 많이 소장하고 있다. 요즘은 서서히 나의 꿈이 가까워지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지금 하나씩 하나씩 축적해가는 새로운 앎이 행복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것들은 한번 치면 수 백 겹의 파랑을 이루는 깊은 징소리 같은 울림으로 가슴에 차곡차곡 담겨지기도 한다. 이 뿌듯함이라니...젊은 날 배움의 갈증으로 목말라 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너무도 즐거운 시간들로 채워지는 것 같다.


간혹 눈을 감고 졸업을 한 1년 후를 상상해 보곤 한다. 그때는 나의 날개가 거의 펼쳐지리라고 생각 해 보고 싶다. 소박하지만 진실된 작은 시집 한 권을 출판하고 싶다. 교보문고나 영광문고 한 켠에서 펄럭거리고 있을 것이라고 꿈도 꾸어 본다. 단 몇 사람들이라도 그 시집 앞에서 나의 시를 읽고 있다는 생각도 곁들이면서.


또 하나,내게 묻은 먼지 훌훌 털어내고 가벼이 떠날 때를 생각해 본다. 미숙한 엄마를 기억할 수 있는 무게감 있는 한 권의 책이 내 보석들 곁에 당당히 남아 있게 하고 싶다. 항상하는 넋두리가 아닌 어느 정도의 수준에서의 글들을 남겨야 덜 부끄러운 엄마가 될 것이니까. , 욕심내어 작은 꿈 하나 더 말하라 한다면 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나의 건강과 다른 조건들이 가능하게 만든다면 동네 주민자치센타 같은 작은 규모의 사회에서 여력을 발산하고 싶다. 나와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을 위하여 글쓰기강사를 하는 것이다.

서울디지털대학을 입학을 할 때부터 인디언 속담에 만 번을 이야기하면 그 이야기한 것이 현실로 나타난다.’라는 말을 항상 머리에 주입을 시키고 있다. 하루에 열 번씩 4년을 속삭인다면 14600번이다. 열 번을 속삭인다는 것은 아마 하루 중에 3분의 2는 오롯이 투자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나의 속삭임이 아기의 옹알거림처럼 힘이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우렁찬 큰 소리로 키워질 때까지 열심히 한번 해 볼 요량이다.


아무도 없는 넓은 거실에 덩그마니 놓여있는 징에게 다가간다. 열심히 할 것이라는 무언의 다짐이다. 어깨 들썩이며 크게 한번 징채를 휘둘러본다. 지이잉~하며 웅장하고 긴 여운으로 휘감기는 아름다운 징소리의 울림이다. 저 수많은 파장들에게 나는 오늘 약속해 본다. 아직은 덜 펼쳐진 익지 않은 날개지만 푸르른 날만 기억하기를. [글=박지니]


전명희 기자


 

 

 

 


전명희 기자
작성 2020.09.30 09:13 수정 2020.09.3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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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