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봉의 삶의 향기] 다랭이와 독일인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 이문재 농담전문

      

지난 봄, 바다 정원 같은 다도해의 그윽한 풍경 앞에서 나는 이 시를 떠올렸다. 왜 이토록 멋진 시의 제목이 농담일까? 가벼운 유머라는 농담(弄談)일까, 아니면 깊고 심장한 말이라는 농담(濃談)일까?

 

사실 사랑과 외로움에 떨며 심각했던 젊은 날의 인생살이가 이젠 가벼운 농담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종소리를 한치라도 더 멀리 보내려고 몸과 마음을 혹사했던 옛 추억도 이젠 미소를 머금고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휘파람 불며 남해섬 길을 따라간다. 놀랍게도 섬 산들이 강원도 오지의 산들 만큼 높고 골이 깊다. 섬사람 기가 센 게 해풍보다 산세 때문일까? 한국의 명승지로 알려진 다랭이마을에 닿았다. 다랭이란 손바닥만 한 밭뙈기를 일컫는다.

 

마을을 병풍처럼 둘러싼 쌍둥이 석산들이 급경사를 타고 쪽빛 바다로 내달았다. 그 비탈에 100층도 넘는 계단식 논들이 열린 설합들처럼 겹겹이 매달려있다. 한 뼘만 한 논들의 수면이 망망대해의 그것과 수평을 이루며 하늘을 받들고 있다.

 

다랭이 마을은 분명 어촌이지만 수심이 깊고 밀려오는 파도를 막을 길 없어 항구가 되지못했다. 그런데 섬사람들은 굴하지 않고 바다와 직각으로 돌을 쌓아 올렸다. 코딱지만 한 논과 밭뙈기들을 일구었다. 그렇게 마을엔 수많은 수직과 수평선들이 교차되었고, 보랏빛 허브들과 마늘쫑들이 자라면서 미려한 곡선들이 생겨났다. 그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갈매기들이 날았다.

 

나는 그 마을에서 생명력을 보았다. 가난에 찌들었던 옛 섬사람들의 강인함과 억척스러움이 땅 끝에서 새 농토를 열었다. 물고기 대신 곡물을 거뒀다. 그 당돌한 발상과 끈질긴 생명력이 400여 개 삿갓배미 다랭이 논밭들을 호미 끝으로 만들었다. 이제는 세계각지에서 가장 한국스런 자연미를 보러 섬 끝 마을로 온다. 와서는 섬사람들의 생명력에 기운을 얻고 간다.


근처 독일인 마을에 들렀다. 1960년대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로 파견되었던 동포들이 조국에 다시 정착한 곳이라고 했다. 그들은 근 20년 전부터 3만여 평의 부지에 독일식 전통 주택을 짓고 이주했다.

 

이국적인 언덕배기 동네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함부르크의 어느 해안마을 같았다. 독일 왕실 문장들이 벽에 걸린 호프집에선 생맥주와 갓 구운 소시지를 내 왔다. ‘황태자의 첫사랑선율이 흘렀다. 통영 어시장에서 만났던 투박하고 불친절하던 상인들과는 달리 이곳 주민들은 잘 웃고 여유롭고 친절했다.

 

여기서 느낀 것도 생명력이었다. 우리가 가장 가난했던 시절, 그들은 이국의 칠흑 같은 막장 속에서 석탄을 캐고, 열악한 병동에서 시신을 닦으면서도 불굴의 생명력으로 살아남았다. 그들은 투지와 희생으로 꺼져가던 대한민국에 회생의 숨길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한 세대가 지난 후 고국으로 금의환향했다.

 

누군가 말했다. 삶을 사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하나는 모든 것을 기적이라고 믿는 것, 다른 하나는 기적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남해 언덕에 서서, 지금 대한민국의 풍요의 역사는 기적을 믿는 사람들이 일으킨 기적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 동력은 우리 선대들의 강인한 생명력임을 믿는다. 이는 아무리 세월 흘러도 결코 가벼운 농이 될 수 없는 깊고 의미심장한 농담(濃談)임이 틀림없다.

 

쪽빛 바다를 보며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선대들의 얼굴이 있다. 나는 틀림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

 

 

[김희봉]

서울대 공대, 미네소타 대학원 졸업

Enviro 엔지니어링 대표

캘리포니아 GF Natural Health(한의학 박사)

수필가, 버클리 문학협회장



 


편집부 기자
작성 2018.10.01 16:02 수정 2018.12.18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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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