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수 칼럼] 김환기와 김광섭의 추억,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홍영수

작년, 수화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 화백이 태어난 생가(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마을)을 다녀왔다. 수화가 태어나서 자랐던 집이다. 신안군의 퍼플교와 퍼플섬들로 인해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정작 고택에 갔을 때는 필자가 유일한 방문객이어서 한편으로는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곳을 돌아 나와 필자의 모교가 있는 목포 유달산 자락을 지나 시골집에 도착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다. 잠들기 전, 적막한 시골의 밤하늘에 유난히 반짝이는 별빛을 바라보니 낮에 다녀왔던 김환기 화백이 떠오르며 그의 그림, <전면점묘화(全面點描畵)>와 더불어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라는 시가 함께 머리를 스쳤다.

 

이산(怡山) 김광섭(1904∼1977)과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는 각자 다른 시와 회화 장르에 활동하면서도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사이이다. 그들은 1960년대 초 서울 성북동에서 이웃으로 살았다고 한다. 몇 년 전 성북동 김광섭이 살았던 집터와 뒤편 산 능선에 비둘기가 그려진 벽에 <성북동 비둘기>의 시기 쓰여있는 것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예로부터 문학과 미술은 서로 영감을 주고받는 공생 공존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또한 시인과 화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가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 호라티우스가“ 시는 그림처럼”이라 표현했고 또한 시인 시모니데스는 “그림은 말 없는 시,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두 예술은 유사성이 있음은 사실이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문구가 있다. 동파 소식이 왕유의 시와 그림을 비평하면서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畫 畫中有詩)”,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얘기다. 이처럼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와 그림의 경계를 허물어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가들의 사유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림이 글을 쓰는데 많은 상상력을 제공하고 글 또한 그림을 그리는데 영감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말은 그림과 시 사이의 긴밀한 유대 관계가 있음을 고전 시대 인문주의 학자들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시와 그림이 서로 같은 관계임을 인식한 것은 근대 회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져 왔다.

 

수화 김환기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시산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의 시구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의 뉴욕 시절 정서적 기원이 담긴 작품이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 시, <저녁에> 마지막 연

 

시에서 저렇게 많은 별과 많은 사람 중 서로를 바라보는 ‘너’ 하나 나 하나’ 의미는 수화의 화폭에 수 없는 푸른 점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그는 화면 가득히 점을 찍고 그 둘레에 사각형 테두리를 둘렀다. 화폭의 점 하나하나는 고국산천이고, 그의 일기 속 기록의 “서울을 생각하며, 이산(怡山) 시를 읊으며 점을 찍어 간다. 내가 찍은 점, 날아간 것 같기도 하고, 서성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하며 만들며 되풀이하는 동안 내 맘은 한없이 정화된다.”처럼 그리운 친구와 가족, 수없는 인연을 상징하고 있다. 어쩜 그의 고향인 신안군 안좌면의 생가에서 어릴 적 노닐던 고향일 수도, 밤이면 보았던 바닷물 위에 반짝이는 별들일 수도 있다.

 

수화의 그림 세계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그의 작품 하나하나마다 반짝이는 영롱함이 숨 쉬고 있다. 뉴욕의 밤하늘에 별처럼 반짝이는 네온사인, 그 속에서 밤은 깊어 가고 고독과 더불어 삶의 의미가 빛났을 것이다. 비록 서로가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아닐지라도 그가 즐겨 그렸던 달과 학, 그리고 자연에 화답하는 ‘너’와 ‘나’는 바로 그렇게 다시 만날 것이다. 인간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물음 이전에 우린 우주적 섭리에 따라 거듭 다른 삶으로 옮겨 가는 존재가 아닐까. 

 

프랑스 출신 스탕달은 호라티우스의 “시는 그림처럼”의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그림과 시는 닮은꼴이면서도 아니며 서로 다른 예술 장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림이 글을 쓰는 데 수많은 영감을 제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스탕달에게는 “모든 회화는 문학 안에 있고, 모든 문학은 회화 속에 있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쩜, 수화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이산 김광섭 시인의 <저녁에> 안에 있고, <저녁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안에 있는 것은 아닐까.

 

 

[홍영수] 

시인. 문학평론가

제7회 매일신문 시니어 문학상 

제3회 코스미안상 대상(칼럼)

제4회 한탄강문학상 대상

제7회 보령해변시인학교 금상 

제6회 아산문학상 금상 

제5회 순암 안정복 문학상 

제6회 최충 문학상 

시집 『흔적의 꽃』,『지구의 유언장』

이메일 jisrak@hanmail.net

 

작성 2026.08.10 11:02 수정 2026.08.10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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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