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헌식의 역사칼럼] 녹도만호 정운의 전기 『증병조참판정공전』 - ③ 제2차 출전 시기 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 기록 검토

운헌식

저번 글에서는 『증병조참판정공전』과 충무공 이순신의 장계 「옥포파왜병장」 두 기록을 비교하면서 조선 수군의 제1차 출전 시기 전투인 옥포해전·적진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증병조참판정공전』과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 두 기록을 비교하면서 조선 수군의 제2차 출전 시기에 벌어진 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살펴본다.

조선 수군의 제2차 출전 시기에는 순서대로 사천해전, 당포해전, 당항포해전, 율포해전 총 4번의 전투가 벌어졌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사천해전 기록은 검토될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여 많은 지면이 필요하므로 이번 글에서는 사천해전에 관해 살펴보지 않는다.

제1차 출전을 마친 전라좌수사 이순신 휘하 전라좌수영 수군은 여수로 돌아와 다시 전력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얼마 후 일본군 함대가 부산에서 다시 서쪽으로 침범해온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전라좌수영 수군과 전라우수영 수군은 여수 전라좌수영에 모여 함께 출전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군 함대가 벌써 사천과 곤양에 이르렀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전라좌수영 수군은 전라우수영 수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황에서 5월 29일 제2차 출전을 개시하였다. 조선 수군의 제2차 출전 시기에 벌어진 총 4번의 전투 경과는 충무공의 장계 「당포파왜병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 당포해전 전투 개시 상황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제2차 출전 첫 전투인 사천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조선 수군은 이틀 뒤인 1592년 6월 2일에 고성 당포에서 전투를 치렀다. 당포는 지금의 경남 통영시 산양읍 당포리에 있던 경상우수영 소속 진포(鎭浦)이다. 통영시 당포리는 얼마 전까지 삼덕리라는 지명으로 불렸는데, 마을 주민들이 지역의 역사적 의미를 되살려 2025년 10월에 기존 지명 삼덕리가 당포리로 변경되었다.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당포해전의 전투 개시 상황을 살펴보자.

 

「당포파왜병장」

(6월) 2일 진시(7~9시)에 “적선이 당포 선창에 정박해 있다.”라는 말을 듣고 사시경(9~11시)에 곧바로 그곳에 이르니 무려 왜적 300여 명이 반은 성에 들어가 노략질을 하고 또한 많은 무리가 성밖의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함께 철환을 쏘았습니다. 왜선은 판옥선처럼 큰 것 9척과 중선·소선을 합한 12척이 선창에 나뉘어 정박해 있었습니다. 《중략》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곧장 층루선 아래로 나아가 용의 입에서 현자 철환을 위쪽으로 쏘게 하고 또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대장군전을 쏘아 그 배를 부수자 뒤에 있던 여러 배도 철환과 화살을 함께 쏘았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다음날 날이 밝을 무렵 좌·우척후를 보내어 당포로 들어가 적을 유인하니 과연 매우 급히 쫓아왔다. 미처 바다까지 나오지 않았을 때 여러 배가 월명포에서 기를 들고 북을 치며 나가자 적이 크게 놀라 당포로 되돌아 들어갔다. 수사(전라좌수사)가 좌·우척후, 좌부, 전부 6~7척의 배에 명령을 내려 그들을 추격하여 적이 많이 패하여 죽고 육지로 내려 달아났다.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당포해전의 전투 개시 상황을 살펴보면 곧바로 차이점이 발견된다. 위 두 기록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이 전투 개시 상황에 관한 내용이다. 「당포파왜병장」은 먼저 거북선을 당포에 보내어 정박해 있던 왜선을 공격했다고 서술하였지만, 이에 비해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우선 왜선을 바다로 유인했다고 서술하였다.

위 두 기록만을 비교해보면, 전투 개시 상황을 훨씬 자세하게 서술한 「당포파왜병장」의 기록이 더 사실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위 두 기록과 전투 개시 상황을 비교해볼 수 있는 또 다른 기록이 충무공의 『난중일기』에 존재한다.

『난중일기』, 「당포파왜병장」 초안

(6월) 2일 꼭두새벽에 경쾌선으로 하여금 적이 정박한 곳을 찾아내도록 하였더니 “당포에 왜대선 12척, 소선 20여 척이 정박하고 천천히 육지에 내려 그 포의 관사를 노략질하고 나머지는 배 위에 그대로 남아있다.”라고 와서 보고하므로 다시 여러 장수를 독려하여 한꺼번에 재빨리 쫓아가 소선 2척으로 유인하였더니 층루가 있는 대선과 여러 배가 노를 저어 쫓아오면서 소리를 지르고 날뛰었습니다. 다시 나각을 불고 여러 장수를 지휘하여 한꺼번에 에워싸고, 먼저 거북선으로 하여금 곧바로 나아가 천자총통과 지자총통을 잇달아 쏘게 하여 그 층루대선을 부수었습니다. 적의 무리가 스스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당포 선창으로 되돌아 들어가 육지에 내리려 하므로 탄환과 화살을 비바람처럼 쏘아 거의 다 중상을 입혔으며 죽은 자들도 많았습니다.

 

자료 출처: 『이순신의 일기초』(박혜일·최희동·배영덕·김명섭 역주, 2016, 시와진실)에 수록된 원문을 번역

위 글은 『난중일기』 1593년 3월 일기 뒤에 편지 등의 다른 자료와 함께 비망록처럼 수록된 기록이다(『난중일기』에서 일기에 해당되는 내용만을 다룬 대부분의 『난중일기』 번역서는 위 글을 수록하고 있지 않다). 위 글에 나타나는 날짜(6월 2일)와 지명(당포) 그리고 전투 상황 등을 살펴보면 충무공이 「당포파왜병장」의 초안으로 작성한 글이 틀림없다.

위 「당포파왜병장」 초안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한 부분은 전투 개시 상황을 서술한 내용으로서, 『증병조참판정공전』과 마찬가지로 조선 수군이 당포에 정박해 있던 왜선을 바다로 유인했다고 서술하였다. 게다가 왜선 유인을 위해 동원된 선박에 관해 「당포파왜병장」 초안은 ‘소선 2척’으로,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좌·우척후’로 그 규모를 거의 똑같이 서술하였다.

충무공이 왜선을 유인한 내용을 임의로 지어내어 「당포파왜병장」 초안에 적어 넣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당포파왜병장」과 출처가 다른 사료인 『증병조참판정공전』에도 왜선을 유인한 내용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마도 충무공은 「당포파왜병장」을 최종적으로 작성할 때 조정에 보고할 내용을 보다 명료하게 작성할 목적으로 왜선을 유인한 내용을 삭제한 것 같다.

「당포파왜병장」 초안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서술된 당포해전 전투 개시 상황은 기존의 당포해전 연구 결과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당포파왜병장」은 당포에 정박한 왜선 규모를 21척으로, 「당포파왜병장」 초안은 약 32척으로 서술한 기록이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조선 수군이 왜선을 유인하는 과정에서 21척을 격침하고 나머지는 도주하는 바람에 「당포파왜병장」에 격침된 왜선 21척만 언급된 듯하다.

통영시 삼덕리 신 당포진성 유적 - 자료 출처: 『조선시대수군진조사3 - 경상우수영편』

 

(2) 당포해전 전투 개시 이후 경과

이번에는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당포해전의 전투 개시 이후 경과를 살펴보자.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당포해전의 전투 경과를 서로 비교해보면 서로 일치하는 내용이 발견된다. 다음은 두 기록에서 서로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을 각각 원 숫자와 굵은 글씨로 표시한 것이다.

「당포파왜병장」

철환과 화살을 맞은 자가 여기저기 쓰러져 적의 머리 6급을 베고 그 배들을 다 불태운 뒤 ①여러 배의 용사들이 육지에 내려 끝까지 쫓아가 찾아내 목을 베려고 할 때 다시 ②“왜대선 20여 척이 소선을 많이 거느리고 거제로부터 온다.”라고 탐망선이 보고하였습니다. 그 포(당포)는 지형이 비좁고 교전하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외양에서 요격하기 위해 노를 재촉하여 바다로 나가니 그 적선들이 5리쯤되는 거리에서 우리 수군을 바라보고는 달아나기에 바빴습니다. 여러 배가 외해까지 쫓아갔으나 날이 이미 저물어 싸울 수 없었으므로 ③진주땅 창신도에 정박하고 밤을 보냈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수사(전라좌수사)가 좌·우척후, 좌부, 전부 6~7척의 배에 명령을 내려 그들을 추격하여 ①적이 많이 패하여 죽고 육지로 내려 달아났다. 이때 아침 해가 막 떠오르고 바다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았는데, ②적선이 전알도(고성과 거제 사이 해협인 견내량)의 구름과 안개 사이로 무수히 나왔다. 녹도만호의 배가 바다 가운데 있다가 그들이 오는 것을 먼저 보고는 기를 휘둘러 변고를 알리자 당포에 들어가 있던 여러 배가 급히 저들이 버린 배를 불태우고 노를 재촉하여 나왔다. 수사는 적이 이미 많이 왔으므로 잠시 물러나 천천히 그 형세를 살피는 것이 옳다고 여겨 마침내 기를 휘둘러 배를 물러나게 하여 사량과 솔비포 사이로 향하였다. 《중략》 날이 저물어 적이 조수를 타고 한산도를 향해 물러갔다. 《중략》 ③그날 밤 배를 이동하여 진주 적량도로 물러나 머물렀다.

①번은, 조선 수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일본군은 그 일부가 왜선에서 내려 육지로 달아났다고 서술하였다. ②번은, 당포해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외부에서 또 다른 왜선 함대가 다가오자 조선 수군은 서둘러 당포에서 바다로 나왔다고 서술하였다. ③번은, 당포해전이 끝난 뒤 조선 수군이 진주 창신도(지금의 경남 남해군 창선면 창선도)로 물러나 밤을 보냈다고 서술하였다.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진주 적량도에 머물렀다고 서술하였는데, 적량만호가 관할하는 적량진이 창선도에 있었기 때문에 창선도를 적량도라고 칭한 듯하다.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당포해전 전투 경과는 그 전반적인 상황이 대체로 일치한다. 단, 외부에서 다가온 왜선 함대에 대해 조선 수군이 취한 조치는 서로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당포파왜병장」은 거제에서 다가오던 왜선 함대가 조선 수군을 바라보고는 곧바로 달아나기에 조선 수군이 쫓아갔다고 서술하였지만, 이에 비해 『증병조참판정공전』은 왜선 함대의 규모가 커서 조선 수군이 잠시 물러났다고 서술하였다.

(3) 당항포해전 전투 경과

이번에는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기록된 당항포해전 전투 경과를 살펴보자. 당항포해전은 1592년 6월 5~6일에 고성 당항포에서 벌어졌다. 조선시대 당항포는 지금의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에 있었다. 하지만 「당포파왜병장」에 서술된 지명 당항포는 당항리가 아닌 당항리 주변 바다인 당항만을 말한다. 왜냐하면 「당포파왜병장」 기록을 살펴보면 충무공은 당항만 입구를 ‘당항포 해구(唐項浦海口)’·‘당항포 외구(唐項浦外口)’로, 당항만 바깥 바다를 ‘당항포 전양(唐項浦前洋)’·‘당항포 외양(唐項浦外洋)’으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 두 기록에서 조선 수군이 왜선을 상대로 펼친 전술을 묘사한 내용을 굵은 글씨로 표시한 것이다. 참고로 당항포해전은 1594년에 벌어진 제2차 당항포해전과 구분하기 위해 제1차 당항포해전으로도 불린다.

「당포파왜병장」

여러 배가 서로 번갈아 드나들며 총통, 화살, 탄환을 바람과 우레처럼 쏘면서 한참 동안 접전하여 더욱 위무를 떨쳤습니다. 그런데 신의 생각에 저들이 만약 형세가 곤궁하여 배를 버리고 육지에 오른다면 모두 섬멸하지 못하게 될 것이 염려되어 “우리가 거짓으로 퇴군하는 척하여 포위를 풀고 진을 물리면 저들이 반드시 틈을 타 배를 움직일 것이니 좌우에서 뒤를 공격하면(左右尾擊) 거의 다 섬멸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전령한 뒤 물러나 한쪽 면을 개방하니 층각선이 과연 열린 길을 경유하여 나왔습니다. 검은색으로 물들인 돛을 두 돛대에 달고 다른 배가 층각선을 날개처럼 호위하여 바다 가운데로 노를 재촉할 때 여러 배가 4면으로 에워싸고 재빨리 협공하였습니다. 돌격장이 탄 거북선이 다시 층각선 아래로 나아가 총통을 위쪽으로 쏘아 그 층각을 부수었으며, 여러 배가 다시 불화살을 쏘아 그 비단 장막과 돛을 맞추었습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그 배를 지키던 왜인이 재빨리 달려가 보고하자 적의 무리가 금방 되돌아와 모여 각자 자기 배에 탔다. 수사(전라좌수사)가 여러 장수와 서로 의논하기를 “저들이 이미 배에 탔으니 우리가 만약 가로막고 급히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배를 버리고 도로 달아날 것이다. 비록 배는 불태울 수 있지만, 왜인의 머리 하나도 얻지 못할 것이다. 배를 돌려 길을 열어주어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 그 뒤를 쫓아 공격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尾其後擊之).”라고 하고, 곧바로 여러 배에 명령하여 포(족슬포-소소포로 추정됨) 서쪽으로 조금 물러나게 하였더니 적이 마침내 포를 쏘며 닻을 올리고 잇달아 나왔다. 이에 수사가 여러 군사에게 명령하여 그 뒤를 마구 공격하여 그 두 배를 불태워 죽이거나 사로잡은 적이 많았다.

​위 두 기록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한 내용은 모두 ‘조선 수군이 공격하면 일본군이 왜선에서 내려 육지로 도주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빠져나갈 길을 열어주는 척하다가 다시 에워싸고 공격하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두 굵은 글씨로 표시한 내용은 서로 그 의미가 일치할 뿐만 아니라 당시 조선 수군의 전술을 밝혀줄 수 있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 있다.

「당포파왜병장」은 조선 수군이 왜선을 공격한 전술을 ‘左右尾擊’으로 표현하고, 『증병조참판정공전』은 ‘尾其後擊之’로 표현하였다. 이 두 표현의 유사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두 표현과 비슷한 ‘미격(尾擊)’이라는 용어가 조선의 주요 전술인 ‘오위진법(五緯陣法)’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위진법은 『문종실록』(권8, 문종1년-1451년 6월 19일 병술 4번째 기사)에 ‘신진법(新陣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조선 육군과 수군의 주요 전술이다. 충무공의 장계에 기록된 조선 수군의 전술 편제가 오위진법의 체제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학 논문(정진술, 「조선수군의 전술신호 체계」, 『학예지』 15, 2008, 육군박물관)을 통해 이미 밝혀진 바가 있다. 이러한 오위진법 전술 편제 이외에 ‘미격(尾擊)’이라는 오위진법 전술이 조선 수군에 의해 사용된 사례가 위 두 기록에 나타난 것이다.

『문종실록』에 수록된 오위진법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그 내용 가운데 ‘용겁지세3(勇怯之勢三)’에 ‘미격(尾擊)’이라는 전술 용어가 3차례 나온다. 최근 오위진법에 규정된 군사훈련 절차를 자세히 고찰한 『조선 초기 군사훈련의례와 병학』(허대영, 2021, 서울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이라는 논문이 발간되었다. 이 논문에 설명된 오위진법의 ‘용겁지세3’를 간략히 정리하면 ‘전위·좌위·우위 3면이 공격을 받을 때 후위·중위 군사들이 각각 진영의 좌우로 나아가 좌익과 우익이 되어 적군의 뒤를 공격하는 전술’이다.

‘용겁지세3’의 전술 내용은 「당포파왜병장」과 『증병조참판정공전』에 묘사된 당항포해전 시기 조선 수군의 전술과 부합한다. 추가적인 연구가 진행된다면, 당항포해전 시기 조선 수군이 사용한 전술이 보다 구체적으로 재현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4) 율포해전 전투 경과

「당포파왜병장」에 따르면 조선 수군은 당항포해전 이후인 6월 7일 거제 율포에서 다시 전투를 치렀다. 율포는 지금의 경남 거제시 장목면 율천리에 있던 경상우수영 소속 진포이다. 「당포파왜병장」에는 율포해전 전투 상황이 두 차례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당포파왜병장」

오시경(11~1시) ①영등포 앞바다에 이르니 왜대선 5척, 중선 2척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을 향해 달아나므로 여러 배가 역풍을 따라 노를 재촉하여 서로 바라보는 거리가 5리쯤 될 만큼 쫓아가 율포 바깥 바다에 이르렀더니 왜적들이 배 안에 실었던 물건을 모두 물속으로 던졌습니다. 《중략》 율포 앞바다에서 접전할 때 녹도만호 정운이 사로잡은 천성수군 정달망은 올해 14세로서 심문하였더니 “《중략》 그날 ②영등포 근처 기슭에 배를 정박하고 왜인들이 약탈한 물건을 햇볕에 말리며 바람을 쏘이고 있을 때 우리나라 수군이 불의에 돌진하였습니다. 왜인들이 놀라 어쩔 줄 모르다가 곧 닻줄을 끊고 소리를 지르며 배를 타고 바깥 바다로 멀리 달아나다가 힘이 다해 붙잡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위 기록에서 굵은 글씨로 표시한 내용 가운데 ①번을 간략히 정리하면 ‘왜선이 율포에서 나와 부산으로 달아나는 것을 조선 수군이 발견하고 쫓아갔다’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②번을 간략히 정리하면 ‘조선 수군이 영등포 기슭에 정박하고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자 일본군이 배를 타고 바다로 달아나므로 조선 수군이 쫓아갔다’라는 의미이다. ①번과 ②번의 가장 큰 차이점은 ②번에 ‘기습’이라는 군사 전술이 묘사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율포해전의 전투 경과에 대해서는 위 기록에서 ①번이 널리 알려져 있으며, ②번은 지금까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①번에 묘사되어 있지 않은 ‘기습’이 ②번에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②번이 사실에 가까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만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근거 자료가 필요하다. 『증병조참판정공전』에도 율포해전 기록이 실려 있어서 위 기록의 ①·②번의 전투 상황과 비교해볼 수 있다.

​『증병조참판정공전』

수사(전라좌수사)가 반드시 한산의 나머지 적일 것이라고 여기고 이를 뒤쫓아 온내도와 영등포를 거쳐 문득 율포 앞에 나가자 과연 적선 4척이 포구 안에 정박해 있고, 왜적의 무리가 해안에 올라 쉬고 있었다. 또한 포구 위의 언덕에 망보는 자를 배치해 두었는데, 망보는 자가 곤히 잠들어서 우리 군사가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 군사가 포구 안으로 돌입하자 적이 크게 놀라 급히 그 배를 타고 나갔다. 마침내 앞뒤를 막고 공격하여 그 배를 모두 불태웠는데 《후략》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율포해전 기록은 제3차 출전 시기에 벌어진 한산도대첩 기록 뒤에 나타나는 큰 오류를 가지고 있다. 이는, 글의 저술 과정에서 오윤건이 율포해전이 벌어진 시기를 착각하였기 때문에 생긴 문제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 내용 안에 전투를 치른 지역의 지명(율포)이 명시되어 있으므로 율포해전에 해당하는 기록임을 파악할 수 있다.

위 『증병조참판정공전』 기록은 조선 수군이 율포에 정박해 있던 일본군을 ‘기습’하자 일본군이 왜선을 타고 바다로 달아났다고 서술하였다. 이를 「당포파왜병장」의 ①번과 ②번의 전투 상황과 비교해보면 ②번과 내용이 부합한다. 즉, 율포해전은 조선 수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로서 「당포파왜병장」의 ①번과 ②번 가운데 ②번이 사실에 가까운 기록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율포해전 기록은 큰 오류를 가지고 있지만, 「당포파왜병장」의 기록을 보완해 주는 사료로서 활용될 수 있다.

거제시 율천리 구 율포진 유적 - 자료 출처: 『조선시대수군진조사3 - 경상우수영편』

 

- 본 글은 역사문화학회에서 출간된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27권 2호(2024)에 수록된 논문 「『증병조참판정공전』의 임진왜란 초기해전 기록 고찰」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이다. 

 

 

[윤헌식]

칼럼니스트

이순신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저서 : 역사 자료로 보는 난중일기

이메일 : thehand8@hanmail.net

 

작성 2026.08.14 10:37 수정 2026.08.1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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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