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를 아는 자는 민족과 국가의 소중함을 알고 역사를 모르는 자에겐 나라가 없고 민족도 없다. 말과 글자가 없으며 나라가 없어지고 역사와 문화 기록이 없으면 민족과 국가도 사라진다.’
홍범도 장군의 항일투쟁 루트를 따라가는 대장정
지난, 8월 2일~8월 8일(7박 8일) 범도 루트 기행 17기 여행단을 따라서 동만주. 시베리아철도, 연해주 항일투쟁 전적지를 둘러보고 항일투쟁 역사를 체험하며 홍범도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을 되새기는 대장정을 하였다.
제1일 (8/2) :홍범도 장군과 안중근 의사가 넘나들었던 전적지 탐사
인천에서 연길까지 1,000km 직항 길을 돌아서 2,000km의 동북 3성의 요녕성(대련), 흑룡강성(장춘) 길림성(연변)상공을 거쳐 2시간 만에 연변에 도착하였다.
연길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동북 삼성 중에서 연길은 한국의 영향을 받아 부유한 도시지만, 인구의 70%가 한국에 나와 있단다. 곧장 대기한 버스를 타고 첫 탐사지로 연길 감옥(1930년 항일투사 2,000명 수용)터에서 독립군 탈옥 사건을 회상하였다.
다시 연길 대교를 지나 김학철 문학관에 도착하여 독립운동가이며 소설가인 김학철 선생의 삶과 항일투쟁 민족수난사를 그린 ‘격정시대’ 등 작가의 작품을 둘러보는데 날은 어두워지고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봉오동 전투의 현장으로 이동하여 입구에서 어둠의 저쪽의 격전지를 바라보았다.
북한과의 국경 도시 도문에서 어둠에 깊이 잠든 두만강 넘어 북한을 바라본다. 두만강은 그지없이 적막하였다. 버스는 두만강 철교를 지나 한참 달려 중국, 러시아, 북한의 국경 도시 훈춘에 도착하였다. 훈춘은 3국 무역의 중심도시다. 장차 북한이 허락하면 중국의 동해 진출의 거점이 될 것이다.
제2일 (8/3) 훈춘에서 크라스키노로 가다
훈춘은 중, 러, 북 3국의 국경이 맞닿은 곳으로 황병길 독립군 대장이 활동하던 주 무대였다. 훈춘 넘어 러시아 땅은 기름진 옥토였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다 보면 크라스키노에 도착한다. 크라스키노는 연추라는 곳인데 조선의 의병 활동의 중심지였다. 안중근 의사 등 11명이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 동맹을 맺은 곳이다. 이곳의 유베라 농장에 안의사의 단지 동맹비가 서 있다. 석판의 단지 지문에 손을 얹고 장군의 항일투쟁을 되새겨 본다. 크라스키노는 옛 발해 (염주) 성터가 있는 곳이다. 발해성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 광활한 농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저쪽에 북한 땅이 바로 보일 정도로 전망이 아름다웠다. 발해는 이곳에서 일본과 교역을 하였다. 조선인이 최초로 이주하였던 기회의 땅이었다. 지신호 마을에서 조선인이 일군 기름지고 방대한 농지가 무성한 잡초 속에 묻혀 있음을 본다. 한인들은 수확한 곡식을 팔아 독립군 자금을 조달해 주곤 하였다.
제3일 (8/4) :독립투사의 기회의 땅, 블라디보스톡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의 태평양 함대 사령부가 있는 부동항이다. 러시아는 3곳의 함대를 가지고 있다. 북해함대, 흑해 함대, 태평양 함대이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동방의 나폴리라고 부르는 미항이다. 금각만은 이스탄불의 금각만과 흡사한 바다라서 부른 이름이다. 금각만은 소의 두 뿔에 갇힌 바다를 가로질러 쇠뿔 다리가 놓여 천혜의 요새를 상징하는 항구이다. 산굽이, 바다굽이 따라 건물이 배치되어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이곳을 발판으로 일제는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았다.
또한, 연해주 독립투사가 활거하던 곳이다. 1911년에 한인 집성촌(신한촌)을 만들어 독립운동 단체들이 모여 독립운동의 기반을 폈던 요충지다. 이동휘 선생. 최재형 선생, 이볌윤, 조명희 선생이 이곳 한인촌에서 권업회, 한민학교,(고려인 사범학교), 해조신문사, 대동공보사 등 한인 관계시설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특히 최재형 선생은 자신이 모은 재력으로 독립운동을 도왔다. 1920년 일본은 연해주 독립운동을 탄압하면서 신한촌에서 한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였다. 이를 기르기 위한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이 1990년에 세웠다.
이곳은 시베리아철도 시발역으로(9,288km 6박7일, 90개도시, 16개강, 57개 역) 1891년 세르게이 비터가 건설하여 1916년에 완공하였다. 이 철도 때문에 러시아는동방 진출의 부동항을 갖게 되었다. 시베리아 철도 설립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붉은 군대가 극동에서 볼셰비키 혁명을 완성하였다. 혁명의 광장엔 볼셰비키 혁명을 완성하여 모스크바를 점령한 공적을 기린 기념비와 영원한 불꽃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1937년 조선인이 일본의 간첩이란 이유로 신한촌과 연해주 일원에 사는 조선인 17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던 슬픈 역사가 있었다. 그런데 엉뚱하게 소련 체제에 반기를 든 죄로 혹독한 시베리아 감옥에서 능멸을 당했던 소설가 솔제니친의 동상이 관객의 집중을 받고 있었다. 그는 시베리아 형무소의 처참한 참상을 소설로 고백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제4일 (8/5)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하바롭스크로 가다
하바롭스크는 볼셰비키 혁명군이 극동을 지배한 중심도시이다. 우리나라 독립군이 해산되었던 슬픈 자유시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 야간열차를 타고 880km의 하바롭스크로 이동하다. 시베리아 특급 야간열차는 4인 1실 침대 열차로 가장 시설이 잘된 열차이다. 보통의 시베리아 열차는 낙후한 3등 열차로 여행을 하는데 우리가 탄 열차는 최 특급열차였다. 시베리아 야간열차는 어둠의 지평선을 뚫고 달린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하얀 자작나무 숲이 이색적이고 아늑한 지평선 평야가 드넓다. 옛날이 평원이 다 농토였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풀과 나무가 무성할 뿐이다. 저 넓은 대지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다니 안타깝다. 불 켜진 마을에서 이곳 사람들의 열약한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었다. 밤으로 긴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에 하바롭스크역에 도착하였다.
하바롭스크는 극동에서 가장 큰 도시로 볼셰비키 혁명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엄청난 크기의 넓은 레닌 광장에서 극동 공산당의 옛 성취를 엿볼 수 있었다. 농사 외엔 산업이란 전혀 없는 곳이다. 조선인으로 극동 공산당 간부이며 조선 독립군을 적극적으로 도왔던 김 알렉산드리아의 집과 집무실을 찾아보고 그분의 한인 사랑을 새겨본다. 그녀는 극동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볼셰비키 혁명의 간부로 조선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곳은 붉은 군대의 전적지지만 우리 독립군에겐 애환이 서린 곳이었다.
아초크 전망대에서 붉은 군대 영웅 아무르스키 동상과 죽음이 계곡에서 빨치산 희생자 추모비, 시립 공동묘지, 영웅광장에서 조선 독립군의 한을 새겨본다. 금색 지붕의 화려한 러시아 정교회 성당의 광장에서 드넓은 아무르강을 바라보고 천사의 계단으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아무르강 유람을 하였다. 아무르강은 몽고에서 발원한 헤이륭 장성을 지나 흑룡강으로 흐르다가 러시아 국경을 넘으면서 아무르강으로 바뀐다. 아무르강은 오쿠츠크 해로 빠지는 세계 7대 강이다. 이 강변 언덕의 무덤에 이곳 자유시 사건으로 죽은 독립군의 묘역에서 그 한을 되새겨 본다.
자유시 사건(흑하사건)
하바롭스크의 자유시(흑하시)에서 조선의 항일 독립군과 고려공산당 무장대가 서로 싸워 처참하게 희생당한 슬픈 역사가 있었다. ‘자유시사건’ 이다. 일본이 극동 자치국을 만들려고 하자 스탈린은 조선의 의용대와 독립군 무장대를 하바롭스크로 불러들여 독립군을 재창설하여 일본과 맞서 싸울 것을 요청한다. 이동휘와 김 알렉산드리아, 이범윤, 신채호가 고려인 자치령을 만들려고 노력하던 차에 부름을 받은 것이다. 이범진의 아들 이위청 공산당 준장과 최재형의 아들 파벨 최와 이동휘 선생이 앞장서서 조선 독립군을 재편성하여 고려인 자치구를 만들려고 스노보보시(자유시)에 전 조선 12개 독립군대를 집합시켰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12개 군단의 3,600명이 모였다. 조선 독립군을 재편성하는 과정에서 패권을 놓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대한 국민회의 상해파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두 패로 갈린 독립군 중 이르쿠츠크 소련 공산당이 지지하는 고려공산당이 무력으로 상해파 조선 독립군단을 무차별 공격하였다. 아무르강의 죽음의 계곡에서 처참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이르쿠츠크 공산당이 지지한 고려공산당의 음모였다. 이 전투에서 3,000여 명의 항일 독립군이 죽었다.
이를 본 중립파였던 김경천. 홍범도. 지청천 등은 대원을 이끌고 도망쳐서 수분하를 통해 만주로 돌아와 버렸다. 스탈린은 조선독립군에게 극동 자치구를 주려고 기획했는데 독립군 간에 전투가 벌어짐에 화가 나서 오히려 조선 독립군 해산 명령 법안을 만들어 내렸다. 다시는 러시아에서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중지시켰다. 아무튼 3,000여 명 독립군이 아무르강변 계곡에 죽어 묻혔다. 음모였던 그 결과는 엄청났다.
연해주 조선인을 일본의 앞잡이라는 명목을 붙여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시켰다. 이에 반대하는 김경천 이하 독립군 장교 200명을 처형하고 홍범도 등은 중앙아시아로 강제로 이주당했다. 이위청 붉은 군대 중장은 고려인 자치구가 와해 됨을 통탄하였다. 만약에 뜻이 이루어졌다면 일본군이 구상한 연해주 극동국은 한인 자치구가 되었을 것이다.
하바롭스크는 극동 공산당의 주무대지만 조선인 독립군에겐 무기 지원의 구원처였다. 그러나 붉은 군대의 농간으로 독립군이 치욕적인 죽임을 당했다. 그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아무르강에서 울분을 씻은 다음 날 저녁에 다시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11시간 장고로 우수리스크에 도착하였다.
제5일(8/6)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정착촌에서 최재형 선생의 공적을 보다
우스리스크는 고려인의 집단 거주한 기회의 땅이었다.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지로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다. 이곳은 시베리아 평원이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에 고려인들이 농토를 일구어 자리를 잡은 별천지였다. 발해의 동경이 있었던 곳이다. 최재형 선생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뿌질로프카 마을) 고려인 촌락과 학교를 세우고 구원 사업을 폈다. 이위종 김경천 등이 주 활동무대이며 조명희 선생이 청년 육성 학교를 만들어 지도자를 육성하였다. 이곳에 조선인 학교가 10여 곳 있었다.
최재형 선생의 고택과 박물관. 전로 한족 중앙총회 결성 장소와 고려인 역사관이 관람했다. 이곳은 또 이상설 선생이 연해주 임시정부를 결성한 곳이며 그 유허지와 기념비가 남아 있었다. 기념비 앞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스이픈강을 바라본다. 이 강 건너엔 발해의 동경 유적지(솔빈국)가 광활한 벌판으로 펼쳐져 있었다. 발해의 솔빈국은 전투 말을 주 생산 하였던 말의 고장이었다.
고려인 촌에서 아리랑 무용단이 고려인의 삶과 강제 이주의 슬픈 역사를 극화하여 공연하였다. 이 공연을 보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공연은 그렇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보여주었다.
제6일(8/7) :중·러 국경 도시 수분하(綏芬河)를 넘어 하얼빈으로 가다
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 국경 도시 빠그라니치로 가서 중국 수분하 국경을 넘었다. 이 길은 홍범도와 안중근 및 항일 독립투사들이 목숨을 걸고 동청철도를 이용하여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던 길이다. 수분하는 중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로 가는 철도와 도로가 잘 갖춰진 곳으로 역사엔 물동량이 많았다. 무단 시를 거쳐 하얼빈에 이른다.
수분하는 차가운 강물이 송곳같이 파고드는 강이란 뜻으로 강물이 사납고 차고 거칠다. 국경 무역의 특구로 지정되어 러.중 상인들이 활발하게 교역하는데 러시아 쪽은 너무나 빈한하였고 중국은 부유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두 도시 역사엔 러시아의 풍부한 가스 차량이 즐비하게 통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얼빈은 수분하에서 몽고로 이어지는 동청철도와 하얼빈에서 대련으로 이어지는 남만 철도의 교차점이다. 항일독립 투사들이 러시아로 오가는 중요 길목이었다.
제7일 (8/8): 하얼빈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한 현장에 서다
우수리스크에서 러시아 빠그라니치 국경 역으로 가서 중국의 수분하(綏芬河)역에서 동청철도를 타고 2시간여 만에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하얼빈은 헤이룽장성의 성도로 봉천과 더불어 만주벌의 대도였다. 구한말 러시아가 조차했던 도시라서 유럽풍의 건물로 도시계획이 잘 되어 있었다.
하얼빈 역사(驛舍)에서 안중근 열사가 제국주의의 맹수인 이등박문을 저격한 역사적인 현장에 서다. 이곳 역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25m 전방의 사각에서 이등박문을 향하여 권총 6발을 발사했는데 3발이 이등박문을 저격하였다. 저격 후 안중근은 크게 외쳤다.
‘대한독립군 중장 안중근은 세계평화를 위하여 일본제국의 맹수를 살해하였다. 대한 독립만세!’
크게 외치고 하얼빈 일본 헌병에 체포되어 러시아 법정이 아닌 대련으로 이송되어 일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 역사의 현장에 고개를 숙여 의사의 거사를 칭송하며 죽음에 애도하였다. 그밖에 하얼빈은 간도 사건 등 수많은 독립군이 잡혀 와서 고문받던 곳이었다.
한여름인데 하얼빈은 17c의 차가움을 느낄 정도로 서늘했다. 하얼빈의 중앙대로는 서울의 명동이나 홍대 거리 같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넓은 가로의 장장 2km의 거리에 가득 오가고 있는데 종잡아 10만 정도의 인파였다. 찬란한 불빛의 가로엔 식문화 가게로 붐볐다. 이곳 소피아 성당은 1,900대 지어진 건축물로 당시의 명작 건축임을 볼 수 있었다.
중앙대로 끝에 송화강이 흐르고 있었다. 송화강은 백두산에서 출현하는 두만강, 압록강, 송화강인데 백두산에서 북쪽으로 흘러 하얼빈까지 와서 흑룡강과 합류하여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아무르강으로 흘러간다. 송화강 가변에 앉아 피서를 즐기며 옛 시인의 송화강 뱃놀이를 회상하며 잠시 풍류에 젖는다.
제8일 (8/9) :안중근 기념관과 악명의 731부대(마르타)
하얼빈역엔 안중근 의사의 기념관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 들려 의사의 충정을 되새긴다. 일찍이 손정도 목사는 하얼빈에서 독립운동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인물로 그 아들 역시 안중근의 거사를 치르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던 인물이었다. 기념관에서 안중근 의사의 성장 과정과 항일투쟁의 기록물이 전시되었다. 선생은 학식이 높고 뛰어나 명필이며 문장력도 뛰어난 분이었다. 전시된 작품에서 평소에 말하고 적은 글씨가 큰 귀감이 되었다.
731부대(마르타)에서 악명높은 생화학세균 살상 무기를 탐사하였다. 관동군방역급수부대라는 명칭으로 일본이 중국을 세균전으로 지배하려는 야욕으로 설치한 부대이다. 관동군 이시이시로 중장이 생화학전과 세균전을 목적으로 설치한 연구소이다. 이곳에서 한국, 중국, 러시아, 몽고인을 실험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했었다. 페스트, 탄저균, 콜레라, 장티푸스 병균을 피실험자에서 주입하여 3,000여 명이 희생당했다. 동상 치료, 생체해부, 유독가스 실험 등으로 만여 명이 희생당했다. 해방 후 일본은 연구시설을 폭파하여 흔적을 없앴으나 지하에 그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의 행적을 눈감아주고 관계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하얼빈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면서 동만주, 시베리아철도, 연해주에서 홍범도 장군의 항일투쟁 루트 대장정 기행을 마친다.
[김용필]
KBS 교육방송극작가
한국소설가협회 감사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문인협회 마포지부 회장
문공부 우수도서선정(화엄경)
한국소설작가상(대하소설-연해주 전5권)
이메일 :danmo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