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전에 불어닥친 태풍 ‘매미’의 위력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순간 최대 풍속이 초속 60미터에 달하는 바람을 동반한 초특급 태풍이었다. 게다가 양동이로 퍼붓듯 엄청난 양의 빗물이 쏟아졌다. 수십 년생 아름드리 소나무가 뿌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지고, 흘러가던 물길이 바뀌면서 마을 전체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이재민들은 처참하게 일그러진 눈앞의 상황에 넋을 놓았다.
비단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공간만이 아니었다. 온 천지가 어디 한 곳도 성한 데가 없었다. 태풍이 지나가고서 며칠 뒤에 찾아본 산의 형상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든 처참한 몰골이었다. 비탈진 자락 여기저기 토사가 씻겨 내려가 볼썽사납게 벌건 속살을 드러내고, 집채만 한 바윗덩이가 거센 물살에 쓸려가다 간신히 나무둥치에 걸린 채 위태롭게 몸을 의지하고 있는가 하면, 계곡은 깊이 파여 군데군데 크고 작은 웅덩이를 이루었다. 곳곳마다 수마水魔에 할퀸 상처투성이였다. 자연의 위력 앞에 인간의 알량한 힘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절감케 하는 순간이었다. 자연은 이처럼 말없이, 그러나 준열하게 행동으로 인간의 오만을 꾸짖어 놓았다.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나름대로 한 가지 특이점을 발견한다. 그것은 등산로가 나 있던 곳을 중심으로 해서 예외 없이 물길이 새로이 생겨났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하나같이 멀쩡하건만, 유독 등산객들이 밟고 지나다닌 곳이면 어김없이 수마가 휩쓸고 간 흔적이 역력했다.
바로 우리들 사람 탓이었다. 세상에 사람만큼 모질고 독한 존재가 또 있을까 싶다. 제삼자적 입장에서 살피면 인간이야말로 이 아름다운 세상을 거덜내고 말 치명적인 독소임이 분명해 보인다.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마구잡이로 산천을 망가뜨려 놓는 것도 사람이고, 발전이란 명목으로 분별없이 하늘 공간을 흐려 놓는 것도 다름 아닌 사람 아닌가. 게다가 묘지를 만들고 골프장을 조성하느라 울창한 산림을 황폐화시키는 것은 또 누구이던고. 그런 까닭에 나 또한 같은 인간이면서도 우리들 인간이란 종족에 대해 그다지 후한 점수를 매기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아시다시피, 연전에 어느 학자가 나서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생뚱맞은 주장을 펼쳐 세인의 주목을 받았던 적이 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런 주장을 펼치고 싶다. 사람이 죽어야 지구가 산다고. 물론 좀은 지나친 표현이란 감이 없진 않지만, 이 세상에 사람이란 종족만 없어진다면 그 아름다운 질서가 영원무궁할 것이라는 극단적인 생각마저 든다.
산만 해도 그렇다. 산이란 곳이 본래 짐승들의 삶의 터전이 아니던가.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고, 염치없게도 그들의 생활공간까지 인간들이 차지해 버린 지 하마 오래다. 그로 인해 지금 산짐승들은 보금자리에서 밀려나 최소한의 생존마저 위협받고 있다.
짐승들은 아무리 밟으며 지나다녔어도 산에다 크게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이러한 산에 일단 사람들의 발길이 닿기 시작하면 여지없이 길이 나 버린다. 처음엔 오솔길이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폭이 넓어져 신작로처럼 훤해지고, 토사가 유실된 자리에는 얽히고설킨 나무뿌리들이 정맥처럼 드러난다. 게다가 겨울철에 눈이라도 올라치면 미끄럼을 방비한답시고 아이젠까지 착용한 채 산을 오르내리다 보니 바위에다 콕콕 수도 없는 곰보 자국을 내어놓는다. 이것은 산의 편에 서서 보면 쉴 새 없이 얻어맞는 잽이다. 일단 망가뜨리기는 쉬워도 원래대로 되돌려놓기는 불가능한 것이 바로 자연 아니던가.
이따금 산을 오르내리면서 생각한다, 나 자신이 이 아름다운 자연을 망가뜨리는 가해자이며 동시에 그로 인한 피해자가 아닐까 하고. 펄벅의 ‘메뚜기들’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곡식이란 곡식이 죄 남아나지 않듯, 사람들이 한번 거쳐 간 곳이면 뭣 하나 남아나는 것이 없다. 어쩌다 조물주가 인간이란 종족을 만들었을까. 인간이야말로 대자연의 질서를 교란시키는 장본인이며 지구별의 숨통을 옥죄는 악성종양이다. 말 못 하는 짐승들과 식물들은 지금 인간에 대한 저주의 마음을 속 깊이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역사 이래 수천 년간 조상들이 고이 간직해 온 우리의 삶터를, 불과 지난 한 세기 만에 회복 불능일 정도로 망가뜨려 놓았다. 집을 짓고 길을 내느라 무차별적으로 산허리를 잘라내고 농토를 메웠다. 그러기 위해 처바른 시멘트며 아스팔트로 인해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지 못해서 지하수 수위는 갈수록 낮아지고, 그마저 심하게 오염되고 말았다.
사회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윤리에는 다음의 네 가지 갈래가 있다고 한다. 곧 개인 대 개인의 도리인 개인 윤리, 개인 대 집단의 도리인 공공 윤리, 집단 대 집단의 도리인 사회 윤리,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먼 뒷날의 후손을 위해 지켜야 할 도리인 미래 윤리가 그것이다. 내 무지의 탓이려나. 다른 부분은 모르겠으되, 이 가운데 미래 윤리에 대해선 대다수가 거의 마음을 쓰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당장 그것이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냐.”라며 일쑤 무책임하게 외면해 버린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과오가 미래세대에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재앙이다. 훗날의 세대는 우리의 불찰로 인해 당하게 될 대재앙을, 입이 없어 항의조차 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다. 기득권을 가졌다고 함부로 행사하는 건 결코 떳떳한 행위가 못 된다. 왜 조상들로부터는 건강한 자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면서도 후손들한테는 원래 그대로 물려주지를 못하는가. 오늘의 시각에서 바라본 진보가, 먼 미래로 따져 볼 때는 오히려 퇴보일 수도 있다는 윤리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누가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발전이란, 우리 입장 혹은 우리 관점에서 우리 편한 대로 얽어 짜낸 자기합리화이며 아전인수식 해석일 따름이다.
절대자가 부여해 준 이 대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지 않으면, 자연만이 아니라 궁극엔 인간들 자신마저 끝장나고 말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래 윤리에 대한 절실한 자각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하겠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 부끄러운 오늘의 세상이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
김규련수필문학상 수상
유혜자수필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