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헤어진다. 그 한번은 오지 않는다. 아이에게 "이번 주말엔 꼭"이라고 한다. 주말은 그냥 지나간다. 부모님께 "이번 달엔 내려갈게"라고 한다. 달이 바뀐다.
장면은 제각각인데 공통점이 하나 있다. 어겨도 당장 청구되는 게 없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약속이 아니라 인사말이라고들 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데 인사말로 넘기는 목록이 자꾸 길어지는 게 문제다. 아이에게 한 "이번 주말엔 꼭"까지 그 목록에 들어가 있다면 어떤가. 그건 이미 인사말이 아니다.
거래처와 맺은 계약은 웬만해선 어기지 않는다. 위약금이 붙으니까. 상사와 잡은 회의에도 웬만하면 빠지지 않는다. 평가가 깎이니까. 카드 대금은 날짜를 넘기지 않는다. 연체가 기록되니까. 값이 붙은 약속을 먼저 지키는 건 생계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건 누구나 하니까.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일까? 오래 그렇게 여겼다. 아니었다. 나는 약속을 지킨 게 아니라 지킬 약속을 고르고 있었다. 기준은 대개 하나로 모인다. 안 지키면 당장 나에게 무엇이 청구되는가.
왜 그쪽부터 밀릴까? 게을러서가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다. 안 지켜도 아무 일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바쁘면 순서를 정하는 게 당연하다. 문제는 그 순서가 대개 같다는 데 있다.
동물병원을 열고 처음 몇 해, 나는 병원 전화를 내 휴대폰으로 돌려놓고 살았다. 밤이든 새벽이든 전화가 오면 받았고 받으면 병원으로 달려갔다. 안 받으면 값이 돌아왔다. 보호자의 실망, 다음 날의 말들.
그 몇 해 동안 뒤로 밀린 쪽은 늘 같았다. 가족과 잡아둔 주말이었다. 휴가다운 휴가 한 번 가지 못했다. 가족은 나에게 아무것도 청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밀 수 있었다.
그러면 무엇이 남는가. 신용이다. 신용은 큰 약속에서만 쌓이지 않는다. 어겨도 아무 일 없는 약속에서도 쌓인다. 돈을 좇지 말고 신용을 좇으라는 말을 나는 오래 믿어 왔다. 신용을 얻으면 나머지는 대개 따라온다.
상대가 먼저 어겼다면 어떻게 하나. 나도 어기면 된다. 다만 그때 깎이는 신용은 상대 것이 아니라 내 것이다. 사람들은 누가 먼저였는지까지 기억해 주지 않는다. 완벽하게 지키라는 뜻은 아니다. 지킬 수 없는 것까지 지키겠다고 말해두는 습관을 그만두자는 쪽에 가깝다. 애초에 하지 않은 약속이 어겨진 약속보다 낫다.
사정이 바뀌면 고쳐 말하면 된다. 다만 조건이 하나 붙는다. 상대가 아직 계획을 바꿀 수 있을 때 말해야 한다. 당일에 꺼낸 "못 하겠다"는 통보에 가깝다. 고쳐 말하기도 반복되면 같은 값을 치른다. 두 번까지는 사정이지만 세 번째부터는 사람으로 읽힌다.
덴마크의 심리학자 스벤 브링크만은 『쓸모를 증명하지 않는 삶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썼다. "약속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습니다. 설령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일에는 존엄한 면이 있습니다."
이득이 없어서 지키지 않는 게 아니다. 이득이 없는데도 지키니까 그게 나인 것이다. 아무도 청구하지 않는 자리에서 내가 무엇을 하는지, 남는 건 그것뿐이다.
지금 미뤄둔 약속을 하나 떠올려 보자. 떠올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 상대는 내게 아무것도 청구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미룰 수 있었다.
오늘 연락하자. 못 하겠으면 못 하겠다고 말하자. 말없이 넘기지는 말자.
결국 나를 말해주는 건 내가 어기지 않은 계약이 아니다. 아무 값도 걸려 있지 않던 그 주말이다. 아이에게 "이번 주말엔 꼭"이라고 한 그 주말은, 지금까지 몇 번이나 미뤄졌는가.
[박근필]
그로쓰 퍼실리테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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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필성장연구소장, 수의사, 작가, 칼럼니스트,
강연가, 커리어 스토리텔러
저서 : <할퀴고 물려도 나는 수의사니까>
<나는 매일 두 번 출근합니다>
<마흔 더 늦기 전에 생각의 틀을 리셋하라>
<방구석에서 혼자 읽는 직업 토크쇼>(공저)
<당신의 원고는 왜 계약되지 않는가>
독저팅, 필레터 운영
부산시청 공무원 200여 명 특강,
부산시교육청영재교육진흥원 교원 직무연수 외 다수 출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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