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 제주 차귀도

입력시간 : 2019-09-26 11:10:26 , 최종수정 : 2019-09-26 12:33:21, 편집부 기자

가을을 배달하는 제주의 9월 햇살은 까칠하다. 코발트 빛 하늘의 흰 구름 사이로 퍼지는 맑은 햇살이 포구에 부는 산들바람에 실려 부드럽게 얼굴을 어루만진다.

 

제주 서부 해역에 있는 차귀도는 면적 0.16로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딸린 작은 무인도다. 자구내 포구에서 약 2km 떨어진 섬인데 포구에서 배를 타면 10분 만에 도착할 수 있다.


자구내 포구 근처의 수월봉 지질 트레일 입구에서 바라본 차귀도



차귀도는 죽도, 지실이섬(매바위), 와도의 작은 3개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수려한 자연경관과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룬다. 오랫동안 낚시꾼들의 천국으로 잘 알려진 섬으로,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출입이 금지돼 있다가 섬 내부를 대대적으로 정비하여 2011년 말, 거의 30년 만에 일반 대중에게 개방되었다.


포구의 덕장에서 해풍으로 말려지는 자구내 포구 오징어는 맛좋기로 유명하다.

 


자구내 포구에서 유람선을 타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와도를 지나 10분 정도 달려가면 차귀도에 도착한다. 해안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면서 내는 파도 소리는 갈매기 우는 소리와 묘한 앙상블을 이루는 가운데 선착장 왼쪽 해안에 우뚝 버티고 선 이 섬의 수호신 장군바위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차귀도 장군바위.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 할망이 500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그중 막내가 차귀도 장군바위란다.

 



차귀도 선착장에 도착하면서 섬 트레킹이 시작된다. 얕은 목재 계단을 올라서면 억새풀이 가득 찬 넓은 평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억새풀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돌로 만든 집 하나가 우리를 맞이한다.

 

차귀도는 예로부터 대나무가 많아 대섬 또는 죽도(竹島)라고 불리어왔다. 1911년부터 고산에 사는 강씨 집안이 뗏목을 타고 차귀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흙과 돌로 벽을 만들고 대와 띠를 잘라서 묶어 지붕을 씌웠다. 고기가 잘 잡히고, 물질을 하면서 미역과 톳을 채취하고, 대나무를 파낸 땅에 보리, 고구마를 심었다. 땅이 기름져서 농사가 잘 된다는 소문을 듣고 자구내 마을에서 한 집, 두 집 건너오다 보니 1970년대에는 모두 7가구로 늘었단다. 그러나 1974년 봄, 추자도에 간첩단이 들어오면서 이 섬에 퇴거령이 내려 모두 뭍으로 떠나자 졸지에 무인도 신세가 되었다.



 

차귀도 집터. 문명의 이기를 벗어나 욕심 없이 살다가 뭍으로 떠난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발목에 스치는 이름 모를 풀포기들의 느낌 좋은 애무,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바람의 속삭임, 아무 여과 없이 내려쬐는 강력한 햇살의 짜릿함을 실감한다. 억새풀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니 이윽고 전망대가 나온다. 죽도와 와도, 그리고 지실이섬 세 섬이 어우려져 펼치는 해넘이는 이곳 전망대에서만 볼 수 있는 최고의 장관이라고 한다.

 

전망대에 서니 장군바위, 지실이섬, 쌍둥이 바위 등이 다 내려다보인다.

 

 


차귀도는 이름에 얽힌 전설이 있다. 옛날 중국 송나라 푸저우(福州) 사람 호종단(胡宗旦)이 이 섬에서 중국에 대항할 큰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하여 섬의 지맥과 수맥을 모조리 끊은 뒤 고산 앞바다로 돌아가다가 날쌘 매를 만났는데 매가 돛대 위에 앉자 별안간 돌풍이 일어 배가 가라앉았다. 이 매가 바로 한라산의 지맥을 끊은 호종단이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하여 지실이섬과 와도를 합쳐서 차귀도라 불렀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매처럼 생긴 바위 지실이섬이 있다. 한쪽 끝을 보면 매의 얼굴을 닮았으며, 옆에서 매가 날개를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날아가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섬의 형태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각양각색인 지실이섬. 낚시꾼들이 포인트 낚시를 즐기고 있다.


바람의 희롱으로 평원의 억새는 산발처럼 너울거리고 해안의 파도는 밀려 왔다 밀려 갔다를 반복한다. 켄 폴릿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바늘 구멍에 나오는 스코틀랜드 해안의 여러 장면들이 이 섬과 오버랩 되다가 잠시 후 하나의 화면으로 합쳐진다.

 

현인(賢人)이 아름다운 풍경에 대하여 말하길,

더 이상 찬탄하지 말라, 도취하지 말라, 열광하지 말라.

어떤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면 더 이상 멀리 가지 못함이니.

 

그래도 오늘 만큼은 눈이 시리도록 이 순간들을 망막 속에 각인시키고 싶다.



등대 가는 길. 오늘 따라 찾는 이 많아 등대는 덜 외롭다.

 


북쪽 봉우리 볼레기 언덕에는 하얀 무인등대가 서 있다. ‘볼레기는 제주 사투리로 헐떡인다는 뜻의 볼렉볼렉’(헐떡헐떡)에서 따온 이름인데, 당시 섬 주민들이 숨을 헐떡이며 돌과 흙을 날라 등대를 만들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볼레기 언덕의 하얀 등대. 사람들은 다 떠나갔어도 홀로 남아 차귀도 밤바다를 밝힌다.




등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다시 오르막길로 이어져 이 섬의 가장 높은 언덕으로 올라간다. 수월봉에서 보면 한 폭의 그림 같은 차귀도지만 막상 와서 보면 온통 억새밭이며 깎아지른 절벽이다.

 

 

차귀도 정상. 검은 갯바위 절벽에 파도가 부딪쳐 만들어내는 하얀 포말과 파도 소리에 아찔하다.



영화 외인구단에서 발목에 족쇄를 차고 절벽을 기어 오르내리는 등의 지옥 훈련하는 모습을 여기서 촬영했다고 한다. 자구내 포구와 차귀도 일대는 1970년대 영화 이어도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유람선이 기다리는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 억새풀은 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을 받아 살랑살랑 춤을 춘다.

 


 

산 아래로 넓게 펼쳐진 억새평원과 그 너머로 너른 제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오래 전 이곳에서 땅을 일구어 밭농사 짓고 살았던 농가들의 안온한 정경들이 실루엣처럼 떠오르다 이내 사라진다.

 

포구로 돌아오는 유람선 뱃머리에서 서니 흰색 꼬리를 달고 달리는 작은 배들은 생동감 넘치는 풍경화 속의 작은 소품처럼 보인다.

 

포구로 돌아와 붉은 태양이 제주 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앉는 장중한 자연의 교향악을 기다린다. 방금 다녀온 차귀도와 그 섬에 살았던 잊혀진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그리고 우리는 늘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계봉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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