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의 사랑방 이야기] 그 숲속에는 분명 영감이 살고 있다

입력시간 : 2020-01-24 11:05:59 , 최종수정 : 2020-01-24 11:07:05, 편집부 기자

 


의사는 당뇨 환자인 내게 일주일에 네 번 이상, 한 번에 한 시간 이상 걸으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동네공원 산책이었죠. 걸어가서 두 바퀴 돌고 다시 집에 오면 딱 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렇게 몇 년을 하고 나니 건강 말고도 좋은 일이 생각지도 않게 생겼습니다. 숲속에서 영감을 만나게 되었던 거죠. 영감 말고도 공원에는 참으로 많은 생명체가 살고 있더라고요. 다람쥐, 토끼는 나와 뜀박질 경주하고, 나무들은 그늘을 만들어 주고, 들풀의 노래는 바람과 어울려 속을 후련히 해 줍니다.

 

그뿐인가요, 땅속에서 지렁이 두더지가 나와서 일광욕하는 것도 가끔 봅니다. 이들과 정답게 놀다 돌아오면 영감은 내게 여러 가지 지혜를 담아주곤 합니다. 주로 글쓰기에 대한 영감 같은 것. 내 생각에는 이 영감이 숲의 주인인 듯싶습니다. 나이가 몇백 살인지 어떻게 생기셨는지 아는 바 없지만 그저 숲을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순해지고 누군가가 같이 걷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합니다.

 

집에 돌아와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으면, 실타래 풀어지듯 이야기가 술술 풀려나오는 게 아주 신기하거든요. 영감의 선물이 틀림없어요. 여기 그분의 선물 두 편을 소개합니다.

 

1

 

짓궂은 친구 하나가 넉 줄짜리 시구(詩句)를 주며 이것으로 시() 한 수 지어보라고 말했습니다. 좋은 시가 나오면 점심 한 끼 잘 사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았죠.

 

 

개미는 구멍 찾기 어렵고

새는 둥지 찾기 쉽네

복도에 가득해도 스님들은 싫어 않고

하나만 있어도 손님들은 싫어하네.

 

이리저리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각 행()의 내용이 따로따로 놀고 도무지 연결되지를 않네요. 첫 행부터 끝 행까지 한 줄도 짝귀를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가고 날이 가며 내 흥미도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그런 어느 날, 그날도 점심 후 동네공원에 산책하러 나갔습니다. 공원엘 들어가면 거긴 전혀 다른 세상이 전개됩니다. 돌돌돌 개울물 속을 들여다보면 작은 붕어들이 떼 지어 놀고 있고, 초록의 나무들, 머리 가르마 같이 난 산책길을 가득 채운 매미 소리....

 

문득 뺨을 스치는 바람이 스산하고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니 조금 전까지의 파란 하늘은 사라지고 검은 구름이 급행열차처럼 달리고 있었습니다. 금방 사방이 캄캄해지며 천둥 번개를 동반한 무서운 바람이 나를 덮쳤습니다.

 

겨우 조그만 쉼터를 찾아 몸을 피했습니다만 머리에서 발까지 이미 다 젖어 옷은 내 몸에 피부처럼 찰싹 붙었습니다. 신발 바닥의 누런 흙은 이제 운동화에서 하얀 양말로까지 밀고 올라왔습니다. '에라 그냥 가자' 나는 소나기 속을 동화 속 아이처럼 뛰었습니다, 우리 집을 향해서.

집에 와, 샤워하고 새 옷 산뜻하게 입고 창 밖을 내다보니 어느새 하늘은 파란 평화를 되찾았습니다.

 

! 그런데, 내 마음속에 시()가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지체없이 노트북을 꺼내 휘갈겼습니다. 물론 나중에 수정은 했지만....

 

한 소나기 천둥번개 세상을 쓸고 간 후

진창길의 개미는 제집 찾아 헤매고

나무 위의 새 둥지는 의연히 남았구나

불도(佛徒)들의 흙 발자국, 절 복도에 가득해도

걸레든 스님 얼굴 환한 미소 그치잖네

 

절 아래 냉면집, 손님으로 그득한데

그 많은 면가락 중 머리칼 하나

손님은 화가 나서 소리쳐 쥔 부른다

마음속 천둥번개 계속 치고 있구나

 

친구에게 이 시를 읽어주고 점심 한 그릇 잘 얻어먹었습니다.

 

 

2

 

아침이슬 담뿍한 풀밭을 맨발로 걸어본 적이 있나요? 나는 아침 일곱 시에 동네공원에 가서 산책하기로 결심을 했었습니다. 한 열흘을 계속하고 나니 제법 재미도 나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특별한 경험을 했답니다.

 

공원의 풀밭 길에 들어서니 풀들이 밤새 이슬을 맞아 함빡 젖어 있었습니다. 한 바퀴를 돌고 나니 이슬이 운동화 속으로 배어 들어와 양말과 발이 함께 푹 젖어버렸습니다. 문득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괴테의 동시(童詩)가 떠오르더군요. 제목도 시구도 잊었지만 주제는 아직도 기억의 샘 밑바닥에 남아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른 아침 어린 괴테는 마당에 나가 밤새 이슬 머금은 풀들을 바라보았습니다. 빗겨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이슬방울들은 제각각 칠색 무지개를 뿜으며 빛의 향연을 연출하고 있었겠죠. 그때, 그의 마음으로 어떤 느낌이 번쩍 빛을 발했습니다. 그는 즉시 신을 벗고 맨발로 풀밭에 들어섰습니다.

 

하나님의 천지창조

 

셋째 날, 땅을 풀밭으로 옷 입히시고

여섯째 날 아담을 만드셨느니라.

안식 후 새날이 시작되자 하나님은

풀밭에 이슬 담뿍 뿌리며

아담이 이슬밭 걸을 때를 생각하고

미소 지으셨으리라.

 

우주 속 지구 한 귀퉁이 이슬 풀밭에 아담이 첫발을 내디딜 때, 첫 인간과 첫 풀의 첫 접촉, 그 감격을 맨발의 괴테는 온몸으로 느꼈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감격을 동시(童詩)로 썼대요. (, 그 시가 생각났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그 감동을 맛보고자 벤치에 앉아 운동화 끈을 풀고 양말도 벗었습니다. 용감하게 맨발로 풀밭에 섰습니다.

 

!, 발에 느껴지는 원시적인 선뜻함, 그 시원함. 나는 걸음걸음을 의식하면서 이슬 풀길을 걸었습니다. 푹신푹신하게 푹 젖은 풀잎들이 발을 포근하게 안아주었습니다. 내가 느꼈던 그 감격은, 아담이 발을 처음 이슬 풀밭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 시원해"와 그리고 소년 괴테가 느꼈던, ", 놀라워(O, Wunderval)"의 그 "!"가 아니었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걸었습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

 

그때 진정 나는 듣고 보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천사였으며, 그 지저귐은 천상의 합창이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내일 새벽을 기다립니다. 이 감격을 어서 빨리 다시 느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몇몇 친구들에게 e-mail로 보냈더니 범신론자 의사 친구 한 명이 즉답을 보내주었습니다.

 

괴테가 밟았던 풀밭엔 틱(tick,진드기)이 없었지만, 선배님이 밟은 풀밭엔 라임병(Lyme disease)을 일으키는 틱이 새까맣게 깔려있으니 대문호 기분 내시다가 날벼락 맞으실까 걱정됩니다.’

 

나는 당장 답장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음미하는데 쪼끄맣고 까만 라임으로 흥취를 깬 데 대해 분노해야 하나? 아니면 감사해야 하나? 내가 찔끔한 건 사실이지만 라임, 그 존재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즐거움에 잠깐 참여했다고 라임병으로 벌주실까?’

 

다시 답장이 왔습니다.

 

조물주는 피조물 전체의 균형적 번성을 원하십니다. 노루도, 틱도, 라임병을 일으키는 보렐리아 부르그도르페리 (Borrelia burgdorferi)라는 균도 모두 인간처럼 당당하고 동등한 조물주의 피조물인걸요

 

나는 다음 날부터 눈물을 머금고 <맨발 걷기>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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