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택의 사랑방 이야기]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카뮈의 <이방인>을 읽다

정홍택

편집부 기자

작성 2020.06.18 12:28 수정 2020.06.18 12:39

 

카뮈의 <이방인>은 한여름, 그것도 땀이 뻘뻘 나는 태양 아래서 읽어야 제맛이 난다. 50년 전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그 시절, 실존주의 철학이 열병처럼 대학가를 휩쓸었고 소설 <에뜨랑제> <이방인>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프랑스 문화원이 주최하는 동아리에서 혹은 친구들과의 대폿집에서 우리는 많이 듣고 또 열심히 떠들었다. 실존주의가 정말 뭔지도 잘 모르면서도 우리는 싸르트르, 카뮈 등을 막걸리 안주 삼아 씹으며 열을 올렸다. 그게 아마도 설익은 나이에 성숙하여 가는 개똥철학이었겠지.

 

그 후 50년이 흘러 나는 은퇴한 70대의 노인이 되었다. 그동안에도 소설<이방인>은 잊을 만하면 신문이나 잡지의 문화면을 장식해 내 기억의 쓰레기통을 뒤집어 되살리곤 하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 소설을 ‘2차 대전 후 최대의 걸작이라고 했고, 다른 비평가는 이 짧은 소설을 20세기 건전지의 발명과 맞먹는다고 함축했다.

 

1940년대 전후 프랑스령 알지에의 한 도시가 소설의 무대이다. 뫼르소는 앞길이 창창한 30전후의 대학 졸업생인데도 하루하루를 베짱이처럼 살아간다. 소설을 읽을 당시 나는 고민생이었다. 별것도 아닌 문제들을 가지고…… 예를 들면 결혼과 연애는 별개인가? 어떤 회사에 입사해야 남보다 앞서 출세할 수 있는가 등등이다.

 

이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뫼르소는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친구들과 술 먹고 밤이 되면 집에 와 잔다. 말단 사원 박봉으로 슬럼가 아파트에 살면서도 해처럼 밝게 살아간다. 하루는 직장 사장이 불러 파리 지점으로의 승진 제안을 받았는데도 이를 거절한다. 여기 이대로가 좋다는 것이다. 인생의 기나긴 경주를 열심히 준비하는 20대의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인물이 우상이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세월이 50년 흘러갔다. 이제 나는 산전수전 다 겪고 은퇴하여 뭇사람들 속에서 갑남을녀 무명인으로 살아가는데, 뫼르소는 아직도 세계 지성인들의 우상으로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죽기 전에 이 수수께끼를 한번 풀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먹고 근래에 발간된 최신 번역판 <이방인>을 주문하여 펴들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소설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런 후레아들 같으니라고’. 엄마가 돌아가셨다는데 사돈 남 말하듯 하네. 나는 혀를 끌끌 찼다. (50년 전에도 똑같았다.) 모친 사망 전보를 받은 뫼르소는 80Km 떨어져 있는 양로원으로 오후 2시 버스를 타고 가서 장례를 지내고 바로 다음 날 돌아올 계획을 세운다. 양로원에 도착해서 수위의 인도를 받아 원장을 만나고 간호원, 어머니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 생전에 약혼자라 불리던 노인도 만난다.

 

이들 모두가 하나같이 아들인 뫼르소를 대면하여 슬픈 표정을 지으며 애도를 표시한다. 그러나 정작 뫼르소는 덤덤한 표정으로 눈물조차 짓지 않는다. 무표정하게 그들이 짜놓은 장례식 순서에 따라 수동적으로 행동할 뿐이다. 이미 못 박은 관을 열어 마지막으로 어머니 얼굴을 보여주겠다는 원장의 호의조차 괞챦아요한 마디로 사양했다.

 

장례식 치르고 다음 날 돌아온 그는 애인과 바닷가에 놀러 가서 같이 수영하고 집에 가서 섹스하고 잠이 든다. 옛 생활로 돌아간 것이다. 며칠 후 해가 쨍쨍 쪼이는 몹시 더운 날 애인을 데리고 친구들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간다. 모래사장에서 현지인(알지에) 깡패들과 싸움이 벌어져 싸우고 헤어졌다.

 

그 후 뫼르소는 혼자 산책하러 나갔다가 일광욕을 하고 있는 깡패 한 명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깡패가 먼저 단도를 빼서 그를 위협하는데 지중해의 강렬한 햇볕이 먼저 칼에 반사되어 뫼르소의 눈 속으로 아프게 파고들며 그를 자극한다. 자기도 모르게 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이것이 전편의 이야기이고 후편은 법원과 감옥에서 사형집행 전날까지의 기록이다. 전 후편 모두 뫼르소 개인의 일기 형식으로 쓰여졌다.

 

 

소설 줄거리는 50년 전에 읽은 것과 변함이 없다. 나는 그다음으로 해설서를 읽었다. (그때에는 문고판으로 작품해설이 없었다고 기억된다) 꼼꼼하게 저자의 이야기와 여러 학자들의 해설을 읽어 나가니 이제서야 마음속에서 뭔가 짙은 안개가 조금씩 벗겨지고 뫼르소가 서서히 제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다.

 

더 이상 병신같은 뫼르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영웅 뫼르소가 될 수는 없었다. 그도 일기에서 한 번도 자신을 멋있게 생각하거나 자기 미화하는 식으로 묘사한 적이 없다. 그저 생긴 일, 느낀 점들을 담담하게 써나갈 뿐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태양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걸 무심히 지나치면 안 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뫼르소가 아니고 태양이라고 말해도 과히 틀리지는 않으리라. 태양도 바로 <지중해의 태양> 말이다. <지중해의 햇볕>은 참으로 유별나다고 나는 다른 책에서도 여러 번 읽은 적이 있다. 지구상 그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 빛 속에서 그리스 문화가 발흥했고 트로이의 목마, 아틀란티스의 전설이 배태되었다. 근세에 들어오면 거기 고흐가 있다. 고흐는 그 빛에 미쳐 그걸 그리다 죽었고 카쟌차키스는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 >에서 지중해가 낳은 세계 최고의 낙천적 인물을 묘사하기도 했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자. <밝은 태양>이 있으려면 그 반대편에 어두운 그림자가 나와야만 균형이 잡히고 안정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태양 빛이 워낙 강해서 그늘 즉 어두운 음지는 안 보이는 듯 하지만 정작 캄캄함은 소설 곳곳에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음지를 찾는 것도 책을 읽는 재미 중 하나이다.

 

음지는 슬픔, 추함, 검정색 또는 비정상적 행동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1) 뫼르소가 장례 행렬의 뒤를 따라 묘지로 향해 갈 때 머리 위의 햇볕이 견딜 수 없게 쏟아져서 길의 까만 아스팔트가 녹아서 갈라 터진다. “콜타르의 번쩍거리는 살”, “검은 반죽으로 이겨서 만든 것 같은 마부의 모자”, “사람들이 걸친 상복의 흐릿한 검은빛”, "니스 칠한 영구차의 검은빛”, 이 모든 사물들은 다 검은 계통의 색이고 이 검정색 때문에 뫼르소의 눈에 비친 장례식은 마치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환각을 일으킨다.

 

(2) 어머니의 시신을 지키며 밤샘을 하는 영안실의 노인들 모습은 악몽 속의 장면을 연상시킨다.

 

아무 말 없이 들어온 노인들은 악몽이나 환각 속의 인물들인 양”,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 “그 노인들의 눈은 보이지도 않고 다만 온통 주름살투성이인 얼굴 한가운데 광채 없는 빛만 보였다.”, “그들은 모두 문지기를 둘러싸고 나와 마주 앉아서 고개를 꾸벅거리고만있다. 또 엄마가 살아계실 때 애인이었다는 페레스 영감에 대한 묘사는 무섭기까지 하다. “검은 점들이 박힌 코 밑에서 입술이 떨리고 상당히 가느다란 흰 머리털 밑으로 축 처지고 귓바퀴가 야릇하게 말린 흉한 귀

 

가족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들 한다. 뫼르소가 장례식에서 느낀 이 모든 부정적인 인상들은 어린 시절부터 뫼르소가 얼마나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나 하는 그림자가 아닐까?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오는 버스에 그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몽땅 남겨놓았고 그 후는 아예 잊은듯하다. 드디어 음지에서 환한 양지의 태양 아래로 돌아온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슬픈 표정을 꾸며서 짓거나 세상 관례에 따라 행동거지를 억지로 삼가는 행동은 뫼르소 스타일이 아니다.

 

(3) 전편이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이루어지는 외부적 사건이었다면 후편은 인간의 제도라는 음습한 내부적 그늘의 이야기이다.

 

장례식을 끝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뫼르소는 세상의 관습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다시 밝은 태양 아래서의 젊음을 불태우며 하루하루를 이어간다. 바닷가에서 본의 아니게 깡패들과 싸우게 되고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그는 즉시 체포되어 구금되었고 재판을 위한 변호사, 검사, 예비 판사의 심문이 시작된다. 예비 판사는 신실한 크리스천으로서 어떻게 하든지 뫼르소를 살려내 크리스천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는 법을 집행하는 사법관으로서 이 사건을 피고에 유리하게 모든 정황을 짜 맞추어 서류를 만들고 뫼르소에게 서명하라고 요구한다. 진실과 진실 사이의 빈 공간에 허구를 살짝 짜 맞추면 배심원들의 동정을 사게 되고 그러면 살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뫼르소는 단연 (No)”로 대답한다. 허구가 섞인 진실은 더 이상 진실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에 판사는 대단히 화가 났다. 거짓말을 조금 섞어 살인범을 살려내어 기독교 신자를 만들고 싶어하는 판사, 그리고 한 치의 거짓말도 용납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한 불신자 뫼르소, 그 사이에서 독자인 나는 정신적으로 방황했다.

 

드디어 재판이 시작되었다.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소환되어 증인석에 선다. 살인사건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이들이 왜 증인이 된다는 것인지 뫼르소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증인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어머니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피도 눈물도 없는 불효자 냉혈한이라고 증언(?)한다. 장례와 살인사건이 왜 연관이 되는지 따져 묻고도 싶었지만 귀찮아서 그만둔다.

 

재판 도중 잘못된 사실을 바로 잡아주고 진실을 얘기하려고 손을 들면 변호사가 얼른 제지한다. 자기가 짜논 변론대로 해야 유리하단다. 유리(有利)>를 위해 <진실(眞實)>을 얘기 못 하게 하는 재판 진행을 보며 뫼르소는 '이 모두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거야' 이상하고 우습기까지 하다.

 

또 법관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빨간 법복, 까만 법복을 입고 엄숙한 표정으로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이야기하는 것이 꼭 희극이나 인형극 같다는 생각을 하며 웃음을 짓기도 한다. 그날 왜 살인을 했느냐는 질문에 태양 때문에라고 한마디 대답하고 그만이다. 자기 생명이 걸려있는 결정적 질문인데도 말이다.

 

그는 순하게 사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한 가지 원칙만은 칼같이 지키는 사람이다. 저자 카뮈는 <이방인>의 미국 번역판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뫼르소는 거짓말하는 것을 거부한다. 거짓말한다는 것은 단순히 있지도 않은 것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히 실제로 있는 것 이상을 말하는 것, 자신이 느끼는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우리는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자그만 거짓말도 하고 말에 과장하는 버릇을 가지고 산다.

 

이것은 우리들이 누구나 매일같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뫼르소는 겉보기와는 달리 삶을 그렇게 쉽게 살고자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뫼르소라는 인간은 전통적인 이 사회의 규범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이단아(이방인)인 것이다.

 

이렇게 조금씩 서로서로 속고 속이며 편리하게 사는 우리들 사회에 뫼르소 같은 고집불통의 일직선 인간이 섞여 있으면 구성원들은 불편해하고 못 견디어 하며 어떻게 해서든지 몰아내려고 힘을 합친다. 장례식 참석자들도, 판사도, 검사도, 변호사도, 취재하는 기자들도 결국은 다 한통속이 되어 그를 파렴치한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한다.

 

외톨이 뫼르소, 그래도 그는 후회하거나 물러서지 않는다. 사형 전날 천주교 사제가 찾아와서 간곡하게 권유한다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시오그때 그는 평소 그 답지 않게 고성으로 대든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오게 마련이야. 30년 후에 찾아올 죽음이 30년 일찍 찾아왔다고 그게 뭐 대수이냐? 어차피 죽을 인생인데.”

 

뫼르소에게 비치는 종교인이란 그 피치 못할 죽음이라는 새까만 어두움을 공포로 포장하여 대중을 위협하고, 대신 미래의 천국을 위해 현재의 해(태양)를 등져 그늘에 살라고 설득한다. 뫼르소는 그 알량한 신앙과 구원이라는 미끼로 자기의 귀한 <이 순간>을 채 가지 말라고 소리친다. 뫼르소에게는 살아가는 이 순간만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전 재산인 것이다.

 

사제가 눈물을 흘리며 가버리자 그는 다시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별이 보이고 멀리 들판에서 들려오는 소리, 밤의 달콤한 냄새, 흙냄새 그리고 소금 냄새가 그의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해 주었다. 저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그에게는 새 세계로 가는 출발의 신호로 들렸다. 그는 중얼거린다. “저 순간을, 내가 정당하다는 것이 증명될 저 새로운 새벽을 여태껏 기다리며 살아온 것만 같아.”

 

[그렇다. 인간은 반드시 죽을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사형수는 죽음과 정대면 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가치를 깨닫는다. 죽음이란 삶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어두운 배경이다. 삶과 죽음은 표리관계를 맺고 있다. 필연적인 죽음의 운명 때문에 (삶은 의미가 없고 자살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한정된 삶을 더욱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이 소설의 참다운 주제는 삶의 찬가, 행복의 찬가이다.] (김화영 역자의 결론)

 

, 그래서 젊은 베르테르는 죽었고 늙은 괴테는 살았으며 젊은 뫼르소는 죽었고 중년의 카뮈는 살아났나 보다.

 

     

 

   

[정홍택]

서울대학교 졸업

KOCHAM(Korea Chamber of Commerce in U.S.A.) 회장

MoreBank 초대 이사장

Philadelphia 한인문인협회 창설 및 회장

 

정홍택 hongtaek.ch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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