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사랑할 수밖에 없는 터키 7부

문명의 충돌인가 융합인가, 이스탄불의 사원들

여계봉 선임기자


이스탄불 역사지구에서 서로 마주 보고 서 있는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는 동로마제국과 오스만제국, 두 제국의 충돌과 공존의 현장이다. 이스탄불 여행은 이 두 건물 사이에서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이곳에서 전개된 천년의 역사여행을 통해 인류의 미래를 위한 공존의 지혜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의 영혼, 성 소피아 성당


1453년 오스만제국의 해군이 성 소피아 성당 부근에 있는 골든혼 진입을 시도했으나 콘스탄티누스 11세의 비잔틴군이 입구를 쇠사슬로 가로막고 완강히 저항하자 오스만의 메흐메트 2세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세운다. 육상에 기름칠한 둥근 목재를 깔아 72척의 배를 육로로 골든혼 안쪽까지 이동시켜 상대적으로 두께가 얇은 골든혼 쪽 성벽을 포격함으로써 마침내 난공불락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시절을 포함해 이천 년 만에 기독교 문명의 막을 내리고 이슬람의 이스탄불이 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 413년 건설된 이후 천 년 동안 비잔틴을 지킨 철옹성이었다.


'하나님의 지혜'를 의미하는 성 소피아 성당은 유스티아누스 1세가 537년 완공하여 숱한 지진에도 불구하고 1,500년 이상을 유지해 온 기념비적 건축물이다. 정복자 메흐메트 2세는 성 소피아 사원의 웅장한 규모와 완벽한 예술미에 감탄한 나머지 차마 이 건물을 허물지도 못하고 그냥 방치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진다. 고심 끝에 술탄은 대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라는 명령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성당 내부의 기독교 성화는 회칠을 하여 가린 후 자신들의 모스크로 사용해 오다가 오스만제국이 멸망하면서 터키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결정에 따라 최근까지 정교분리의 상징으로서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왔다.

 

성당 내부에 창이 많은 것은 자연광을 이용해 벽화를 아름답게 보이기 위함이다.


그러나 20207월 터키의 에드로안 대통령은 이슬람 보수 세력의 결집을 위한 정치적 결정으로 그동안 박물관으로 사용되던 성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회귀시키기로 결정하여 그리스뿐 아니라 주로 기독교 국가들로 구성된 EU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있다. 성당은 예전처럼 관광객들에게 무료 개방되지만, 하루 다섯 차례 기도 시간에는 이슬람 신자 외에는 입장할 수 없고, 기도 시간에는 당시 그려진 성화와 모자이크를 천으로 가린 후 관광객 입장 시간에는 다시 천을 떼어내는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어 이전보다 관람 가능 시간이 크게 줄어들 전망이다.

 

옴팔리온. 황제들이 대관식을 거행한 곳으로 세계의 중심을 상징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기독교적 우주관이 성당 건축에 적용되어 정사각형 몸체에 하늘과 영혼을 의미하는 돔을 설치했는데, 높이 56m, 지름 31m의 돔 지붕은 가장자리 24개의 대리석 기둥이 지지하고 있다. 중앙 돔 무게를 분산시키기 위해 몸체 벽과 돔이 만나는 곳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다.


천장의 돔 덕분으로 실내 공간이 확보되어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오스만제국은 사원 바깥은 미나레라고 불리는 이슬람식 첨탑을 4개나 세워 이슬람 종교 건축물 분위기가 물씬 풍기게 하였고, 내부 공간은 알라와 예언자 무함마드를 찬양하는 아랍어 서예로 장식하였다. 사원 내부에는 대형 방패 2개가 걸려있는데 오른쪽 곡선 모양의 글자는 알라, 왼쪽 직선 모양은 선지자 무하마드를 가리킨다. 이슬람은 식물의 꽃, 줄기, 기하학에 기초한 아라베스크문양으로 모든 건물을 장식한다.

 

대성당 내부의 대형 방패에 적힌 글자는 이슬람의 선지자를 나타낸다.


중앙 제단에 설치된 미흐랍은 약간 오른쪽으로 지우쳐서 이슬람 성지인 메카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슬람 설교대인 만바르가 그 옆에 있고, 그 사이 천장의 돔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 모습이 보인다. 알라와 무하마드 사이에 예수와 마리아가 있는 셈이다. 가장 적대적인 두 종교의 공존 현장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앙 제단 미흐랍. 이슬람 성지인 메카를 향하고 있다.


비잔틴제국은 12044차 십자군 원정 때 우군인 십자군에 의해 크게 훼손, 약탈당한다. 그 결과 가톨릭과 정교회로 나누어진 동·서교회는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고 비잔틴제국은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무엇보다 큰 불행은 숱한 문화재와 예술작품이 불타거나 약탈되어 밀반출됐다는 사실이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주도한 베네치아 상인 단돌로는 도시를 점령한 다음 해 97세로 죽었는데, 죽을 때까지 권력을 쥐고 있던 그는 자신의 소망대로 성 소피아 성당 안에 묻혔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1261년 그리스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면서 그의 무덤은 파헤쳐지고 뼈는 개들에게 던져졌다. 그리고 그의 만행을 기억하도록 성당 안에 있던 무덤 자리에 그의 이름을 새기고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하였다.

 

그 빈 무덤 앞에 서면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허무한지, 권력이 얼마나 무상한지 깨우칠 수 있다. 죽어서까지 영화를 누리려 했던 한 사람의 끝은 뼈 하나도 챙기지 못하는 비극으로 끝나고 만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라는 성 소피아 성당이 후세에게 던져주는 메세지이기도 하다.

 

성당 대리석 바닥에 새겨진 'ENRICO DANDOLO'


이슬람은 그리스도교와 달리 성화를 엄격히 금한다. 초월적인 신()의 세계를 화폭에 담아 표현하는 것은 일종의 신성모독이라는 교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당 안의 모자이크 성화는 석회를 발라서 보이지 않게 처리했다. 그때 회칠 덕분으로 오히려 천 년 이상 작품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덮이고 가려지는 바람에 귀한 유물을 좀 더 오래 보존할 수 있었다니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회칠과 세월에 가려진 벽화들은 20세기 들어와 미국의 고고학 팀이 성당의 벽을 청소하던 중 차례로 드러나면서 드디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성당 내부의 모자이크 제작에는 9톤의 금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1층 출구 쪽 가운데 모자이크는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에게 오른쪽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소피아성당을, 왼쪽 콘스탄티누스 1세는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는 모습으로, 비잔틴제국을 상징하는 두 황제가 예수에게 자신들이 만든 걸작을 봉헌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성화 속의 MP는 어머니, OY는 하나님, 즉 성모 마리아임을 의미한다.


성당 2층 회랑의 오른쪽 천국의 문안에 심판의 날모자이크가 있다. 사원에 있는 모자이크 중 가장 아름답고 예술성이 높은 성화인데, 1/3 정도는 유실되어 지금도 복원 중이다. 매년 이곳을 찾는 수백만 명의 관광객들은 하나의 건축물 공간 안에서 최고 수준의 기독교와 이슬람 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져 절정의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고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 박물관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간의 종교를 초월한 관용과 공존의 상징으로 찬사받아왔다.


성당에서 가장 예술성이 높은 성화로 평가받는 ‘심판의 날’ 모자이크


남편이 자주 바뀌는 바람에 화가가 애를 먹었다고 전해지는 황후 조에의 모자이크


성 소피아 성당과 400년 이상을 마주 보고 있는 사원이 블루모스크다. 보통 블루모스크라고 알려진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는 벽과 돔에 사용된 타일이 푸른색과 녹색 위주여서 블루모스크라는 별칭이 붙게 되었다.

 

착공 당시 술탄 아흐메드 1세는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모스크를 짓도록 명령했지만 이 모스크의 중앙 돔은 직경이 23.5m에 그쳐 성 소피아 성당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성 소피아 성당을 능가한 점이 있다면 예배 시간을 알리는 첨탑의 수를 4개에서 6개로 늘렸다는 것 정도뿐이다.



400년 이상을 성 소피아 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블루모스크


1609년 공사를 시작해서 8년 만인 1616년에 준공된 블루모스크는 35개 작은 돔이 중앙 큰 돔을 받치는 공법으로 지었는데, 성 소피아 사원을 그대로 모방했다. 21천 장의 푸른색 이즈닉 타일을 사용하고, 아라베스크문양으로 천장과 벽을 장식했으며, 푸른색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200개가 넘었다.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 6개의 미나레에는 사연이 있다. 황금 미나레를 지으라고 했는데 6개의 미나레로 잘못 알아들은 신하 때문에 메카 성전의 6개 미나레와 숫자가 같아서 할 수 없이 메카 성전의 미나레를 하나 더 짓도록 비용을 따로 지불했다고 한다. 현재 이스탄불에는 3,000개의 모스크가 존재한다.

 

 

블루모스크는 푸른색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이 200개가 넘는다.


기독교 성당에서 이슬람 모스크로 바뀐 성 소피아 성당은 후대의 오스만제국 건축가들이 터키 고유의 모스크 양식을 발전시키는데 이상적인 모델이 되었다. 그들은 이 건축물처럼 완벽한 균형미를 지닌 모스크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세우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늘 품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이슬람 세계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는 미마르 시난은 1557년 시내 가장 높은 곳에 술탄 술레이만 대제를 위한 술레이마니예 자미를 짓게 된다.


술레이마니예 자미. 이슬람 모스크 중 최고의 걸작품이다.

 

고등어 낚시로 유명한 갈라타교의 카페에서 에페소 생맥주를 마시며 석양에 물들어가는 보스포러스와 골든혼의 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이윽고 고개마루의 술레이마니에 자미부터 예니자미, 이즈믹 타일로 유명한 류스템 파샤 자미가 어둠 속에 잠기면서 해변 카페와 갈라타탑, 유람선에서 조명을 밝히자 도시는 금새 생기를 되찾는다.


 

갈라타교는 석양에 물들어가는 골든혼을 감상할 수 있는 세계적인 일몰 명소다.


인류문명의 발상지이지만 수천 년 동안 인류 최대의 고난과 시련을 겪었고 현재도 어려운 상황이 진행 중인 아나톨리아 반도.

 

최근 이슬람주의를 표방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이슬람 모스크로 회귀하면서 야기된 종교 분쟁으로 서방 세계와 긴장이 고조되고 있고, 중동에서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무력 분쟁으로 인명 피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성당과 블루모스크는 손 닿을 듯 가까운 거리다.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세기말적인 충돌은 과거 두 제국의 충돌과 공존의 현장인 이곳 이스탄불에서부터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류의 공생공존과 종교 간 화합을 위해서 역사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곰곰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돌아오는 비행기 창을 통해 동양과 서양을 잇는 보스포러스대교와 최근 개통된 제3보스포러스대교를 내려다보면서 동서양은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닫는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여계봉 기자
작성 2021.06.11 12:27 수정 2021.06.1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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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