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뒤 일상의 삶 속에서 가장 힘들게 하는 일은 원치 않는 회상을 갖게 되는 일인가 보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난 반세기 동안에 쌓였던 기억들이 오버랩 되어 돌려지던 흑백필름 영화 속 나로부터 화려한 천연색 영화의 현실 속까지 나를 위해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다.
하루의 첫 장을 여는 아침 햇살의 조명을 받으며 사람들이 저마다의 배역을 위해 세상 무대에 나서듯 나도 인생이라는 세상 무대에서 알려지지 않은 배우로 연기를 했다. 평생을 화려한 조명 없이 무명으로 산 배역들로 깊은 회상의 호흡을 할 때마다 회한의 시나리오로 남는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기억 속 사람들조차 불쑥 만나는 무대 위에서 나는 내가 나를 고문하며 살아온 용납하기 싫은 분노로 힘들어했던 기억도 있다. 세월이라는 용해제에 모두 퇴색되고 또 다른 배역의 배우를 반기는 아침 무대에는 늘 맥도널드 레스토랑이 있었다.
이제는 그 뒷배경 영상 속 기억들을 양식으로 연명하는 무명의 노배우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저렴한 가격의 식사로 유명배우들이 찾는 화려한 레스토랑의 고급식사를 하는 곳이다. 미국 땅에 발을 내디딘 다음 날 처음 찾았던 맥도널드 레스토랑의 기억은 평생 지닌 신분증 같은 기억으로 간직되어 있다.
도착한 다음 날 자동차 물결 속에 스쳐 지나가는 숱한 대상들이 지금까지도 돌멩이 하나 변함이 없다. 이국의 의아함으로 뛰어야 할 가슴보다는 겉옷 하나라도 걸치고 싶은 을씨년스러움이 전부였던 그 모습도 변함없이 똑같다. 몇 사람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썰렁한 이런 도시에서 언제 정을 붙이고 살 것인가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운 생각을 했던 것도 지금과 같다.
변한것이 있다면 그때가 아닌 그때를 바라보는 지금의 내 모습이다. 실망스러웠던 그 빈 거리, 빈 하늘이 지금은 모두가 내 가슴에 공간예술로 이루어 놓은 세월의 무대이다.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불안하기만 했던 시간들이 지금은 경이로운 기억으로 남았다. 사막의 불바람이 불어대던 여름날 길을 달리던 수많은 차량들의 소음은 무언의 공간을 꽉 채운다. 그때 재빠르게 스쳐 간 도마뱀 한 마리도 기억의 작품 속에 꼭 등장한다.
모두가 세상 무대에 놓인 귀중한 소품들이었다. 목이 마르거나 볼일이 있을 때는 사막땅에서 어떻게 해결을 해야 하는가는 바로 내 앞에 놓인 인생의 난감함 그대로였다. 앞에 펼쳐진 길이 끝나기 전에 또 뒤를 잇는 끝이 없는 사막처럼 꼬리를 무는 나의 시련들이다. 풀 한 포기의 생명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사막에서 나도 내던져졌다.
그런 내게 불쑥 나타나 준 맥도널드 레스토랑은 불같은 숨을 내뱉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그 무대는 배고픔도 목마름도 모두 해결해 주었다. 여행길을 찾아 떠나는 다음 세대의 나그네들을 쉬어 가게 하는 사막의 오아시스이었다.
기계로 찍어 낸 공간 속 정갈함이 나그네의 외로움을 함께 해주는 그곳은 지금 다시 가보아도 냉정하게 틀에서 찍어 논 젊은 아이들마저 똑같은 느낌으로 테이블 위에 메뉴를 날라준다. 다녀본 유명 관광지에서 가져온 별별 기억들이 보따리로 있다 해도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우리의 속담처럼 먹는 일 만큼 소중한 기억을 감히 따르랴.
칠십년대 한국의 길거리에서 버터를 바른 토스트 빵에다 계란 하나를 얹어 먹던 간단한 식사를 생각케 했다. 왠지 먹으면서도 완전한 식사 꺼리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먹거리가 이곳에서는 정식 밥상이었다. 빈과 부의 사람들 가리지 않고 세계 최대 갑부나 일상 속 가난한 사람들이나 모두 편하게 찾아와 식사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식사 자리이다.
갑자기 찾아온 난세에도 믿을만한 먹거리로 손색이 없다. 전 세계 곳곳에 같은 간판과 식단을 걸어놓고 똑같은 방법으로 식사 꺼리를 제공하는 맥도널드 레스토랑은 틀림없이 생존을 위한 사막의 오아시스이다. 한국에서 보고 배운 식생활 문화처럼 몇 첩씩이나 되는 반상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밥상이다.
낯선 나그네에게 음식 대접하기를 좋아하던 우리 조상의 미덕을 알고 있는 나에게는 재미있는 식사 문화이다. 우리의 산해진미의 밥상은 아니지만 그와 버금가는 건강에 필요한 탄수화물과 지방 그리고 단백질의 삼대 영양소를 고루 갖춘 한 끼면 만족하다. 나는 그곳의 밥상머리 앞에서 만찬의 메뉴를 즐긴다.
식사의 감사기도를 하면 서늘한 에어콘 바람과 흐르는 음악은 깊은 산골에서 명상하는 배우가 되게 한다. 한국에 있었을 때나, 미국에 살 때나 인생이란 아무도 모르는 일이라는 영감 하나로 쉽고도 어렵기만 한 명상을 했다. 떠들어 대며 먹는 아이들이나 늙어진 나이로 차분하게 먹는 나도 하나님의 귀중한 자녀라는 것도 알게 하는 명당이 바로 맥도널드 레스토랑이다.
열 사람이든 스무 사람이든 각자의 느낌으로 한 끼를 거뜬하게 마칠 수 있는 밥상이다. 입에 풀칠해야 하는 인생의 가장 큰 화두를 각자의 손으로 말끔하게 해탈 할 수 있는 최상의 식사 무대가 맥도널드 레스토랑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작품보다 빛나는 일이다.
이 땅에서 그 만찬을 즐기면서 내 몫의 배역을 해내기 위하여 얼마나 발버둥 치며 살고자 했었던가. 확실한 희망일 것 같아 품었던 꿈들조차 나의 오만함으로 지켜내지 못했던 기억들을 버리고 나니 남은 것은 홀가분뿐이다. 이 순간에도 하늘빛은 오아시스 레스토랑 무대를 밝게 비추며 나의 배역을 위해 기다리고 있다.
이민 생활이라는 하루하루의 절박함도 미래에 대한 간절함도 영화 속으로 돌려보내야 했던 그 길모퉁이에 있다. 바로 그곳에 반백의 흰머리로 서 있는 나는 다시 다음 세상으로 이민을 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수천 년을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의 숨구멍을 내듯 나도 그런 인고의 마음으로 작품을 이루어 내는 예술가로 살아야 하는 걸까.
다음 세상에서는 그렇게 모진 배역은 맡고 싶지 않다. 어떤 배우로 살 것인가. 그 어느 것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오늘 이 자리에 서서 무심코 바라보는 하늘이라는 무대는 그때처럼 사막의 도마뱀이 석양빛에 부지런히 움직인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