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명량해전 직전 조정의 수군 폐지 명령은 없었다

이종화 건양대 교수 ‘명량해전 직전 조선수군의 폐지 문제에 대한 재검토’ 논문 발표

‘한국군사학논집’(77권 3집)에 게재

이종화 건양대 교수

지금부터 424년 전인 1597년 9월 16일(이하 음력),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불과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 함대를 격파, 세계 해전사에 남을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의 복잡한 지형과 조류를 정확하게 읽어내고 탁월한 지략으로 승리를 이뤄냈지만, 필사즉생의 정신자세가 가장 중요한 승리의 비결이었다.

이순신이 명량해전을 앞두고 조정의 수군 폐지 명령에 반대하여 ‘지금 신에게 전선이 아직 12척이 있사오니(今臣戰船尙有十二)’라는 글을 써서 선조에게 장계로 올렸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글이 적힌 장계가 보성의 열선루에서 작성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선조 임금과 조정 신료들의 핍박 속에서 이뤄낸 명량해전을 이순신 장군의 기적과 같은 업적으로 선양하는 데 널리 인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미흡할 뿐만 아니라 정확한 사료로 존재하지 않는다. 건양대 이종화 교수(예비역 육군 소장)가 명량해전 직전에 있었던 조선 조정의 수군 운용 전략(명 수군의 파병에 대비한 준비 포함)과 ‘상유십이’에 대해 언급한 여러 기록과 관련 자료들을 검토하여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고찰한 논문을 발표했다.


2021년 10월 30일 ‘한국군사학논집’(77권 3집)에 게재된 ‘명량해전 직전 조선수군의 폐지 문제에 대한 재검토’에 따르면,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수군 폐지에 대한 논의를 한 바가 없었으며, 이순신 장군이 ‘상유십이’라는 주장을 하거나 조정에 장계를 올리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그 주요 내용과 논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상유십이(尙有十二)’나 이와 유사한 글을 이순신 본인이나 관찬 사료에서 언급한 바가 전혀 없다. 그리고 수군 폐지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기록들은 대체로 통제사 이순신이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회령포에서 배를 인수한 1597년 8월 19일 이후 또는 1597년 8월 28일의 어란도해전(일명 어란포해전) 이후에 조정으로부터 수군 폐지 명령을 받은 것이다. 이는 보성 열선루에서 1597년 8월 15일 수군 폐지를 반대하는 ‘상유십이’ 장계를 올렸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와 시기적으로 모순이 된다.


둘째, 「난중일기」1597년 8월 15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선전관 박천봉이 보성 열선루로 가져온 유지의 내용과 이순신이 이에 대하여 회신한 장계의 내용에 대해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보성 열선루에서 ‘상유십이’ 장계를 올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명확한 근거도 없이 ‘상유십이’ 관련 기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을 연결하여 그 유지와 장계의 내용을 임의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선조실록」의 8월 5일 기사와 「사대문궤」의 8월 5일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 조정은 해로가 비게 될 것을 염려하여 남아 있는 수군 병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결정을 내렸다. 선전관 박천봉이 보성 열선루로 가져온 8월 7일자 유지에는 이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조정이 8월 5일의 논의에서 해로가 비게 되는 사태를 피하려는 결정을 내린 이상 선전관이 가져온 8월 7일자 유지에 수군을 폐지하고 육지에서 싸우도록 하는 명령이 실려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셋째, 『선조실록』의 기사에 따르면 수군 폐지에 대한 논의는 전혀 조정에서 언급된 적이 없다. 오히려 조정은, 전황이 점점 불리해져 가는 와중에도 수군 병력을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임진왜란 초기부터 시행한 수군 전략과 명나라의 수군 파병 계획까지 함께 고려해 보면, 양국 합동작전을 수행하야 하는 조정이 수군 폐지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고 당시 병조판서를 지낸 이항복이 저술한 ‘고통제 사이 공유사’의 경우 다른 기록들과 달리 조정이 아닌 “경상우수사 배설이 육지에서 싸우자는 말을 했다"라고 서술한 점은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이러한 사항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저자인 이종화 교수는  "당시 조선 조정에서 수군 폐지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은 전혀 없으므로 이순신이 ‘상유십이’의 글을 장계에 썼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라면서 “단순히 「행록」에 있다는 것만으로 정확한 고증 없이 사실로 단정할 경우,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위험성이 있고 이순신 연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상유십이’의 글이 실려 있는 「행록」 등과 같은 행장류의 기록은 인물의 업적을 윤색하거나 과장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조정의 명령과 관련된 사건까지도 사실과 다르게 서술하는 일은 흔치 않다. 특히 그 기록이 해당 사건이 발생한 당대 또는 그와 가까운 시기에 작성되었다면 더욱 그러하다.


“비록 추정이지만, 경상우수사 배설이 육지에서 싸우자고 말했던 것 또는 한산도 진영의 차선책으로서 안흥량이나 강화도가 고려되었던 것이 수군 폐지 명령이 내려왔다고 와전되어 「행록」 등의 기록에 실린 듯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향후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라고 이종화 교수는 밝혔다.

육군 제1보병사단장과 육군학생군사학교 학교장을 지낸 이종화 교수는 39년간의 군 생활을 통해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체득하였고 이를 부대 지휘에 실천하려 노력하였다. 전역 후에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학술연구를 통해 이순신 정신을 체계화하려 노력하고 있으며, 이번 논문은 그 첫 작품이다.


이 교수는 “앞으로 조선시대 군사사와 연계된 이순신의 승리 노하우를 실증 연구하여 우리 사회 제반 분야에서 위기 극복을 위한 지침서가 되도록 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편집자 주) ‘상유십이’ 기록(이분(李芬), 「행록(行錄)」,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

18일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 단지 10척이 있었다. (중략) 이때 조정에서는 수군이 매우 취약하므로 적을 막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고 공에게 육지에서 싸우라고 명하였다. 공이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중략) 지금 신에게 전선이 아직 12척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지한다면 적이 이를 다행으로 여기고 호남을 경유하여 한강까지 도달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신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더라도 소신이 죽지 않은 이상 적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정민 기자 jhlbsl@naver.com

이정민 기자
작성 2021.11.05 10:38 수정 2021.11.0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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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