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의자·35
-물난리
홍수가 났습니다. 시인의 의자가 있는 마을이 물에 잠겼습니다. 집집마다 홍수물이 방안으로 들어와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를 모두 동동 물에 띄어 쓸어갔습니다.
다행이 당국에서 신속하게 주민들을 대피시켜 희생된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들을 옷가지며, 침구류 등 살림도구를 모두 잃어버리거나 못 쓰게 되어버렸습니다. 물에 떠내려가지 않았던 가마솥에는 진흙더미가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시인의 의자도, 쓰레기장의 비닐조각들도 라면, 과자 봉지도 멀리멀리 떠내려갔습니다.
시인의 의자는 거센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가 강의 하류 부근의 강변 모래밭에 떠밀려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강물은 다시 언제 그랬느냐 듯이 잠잠해졌습니다.
시인의 의자는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의 배경 속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하루아침에 집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은 초등학교 강당을 임시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상수도의 물보급은 물론 화장실 사용도 불편하고 또 생활필수품도 모두 부족했습니다. 앞으로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전국에서 이재민 돕기 생필품이 도착했습니다. 라면, 생수, 화장지, 비누, 치약, 칫솔 등과 귤, 사과, 딸기 등을 섭섭잖게 이재민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이재민들은 그때서야 우물 안 개구리 같이 마을 사람끼리만 끼리끼리 즐기는 시를 쓰면서 희희덕 거렸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인의 의자가 있던 마을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아낌없이 내어주는 시를 읽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인의 의자에 서로 앉겠다고 싸우다가 망가져서 쓰레기장에 내버렸던 기억을 떠올리며, 시인의 의자를 찾으려 갔습니다. 그러나 시인의 의자는 지난여름 홍수 때 떠내려가고 없었습니다.
시인의 의자는 쓰레기장에서 멀리 떨어진 강의 하류 강변 모래밭에서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모래밭에서 높은 가을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깔려 있었습니다.
시인의 의자는 홍수 때 모서리에 걸렸던 비닐조각을 가을 바람에 펄럭거리며 장석남의 시 「긴 의자」를 읽고 있었습니다.
긴 의자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오전엔 새가 한 마리 모퉁이에 앉아 고개를 갸우뚱대다 간
새가 혼자 앉기에는 너무 큰 긴 의자
종일 햇빛만 앉아 있는
긴 의자
새가 그 맑은 눈으로 곰곰 궁금해했던 것이
이별에 대해서였다는 이별에 대해서였다는 것을 나는
밤이 다 늦어서야 알고
다시 내다보는
긴 의자
오세요
앉았다 가세요
가끔은 누웠다가 가세요
얼룩무늬 그늘도 가지고 와서 같이 있다 가세요
오세요
오랜 동안 비어 있는
긴 의자 하나
오랜만에 시인의 의자는 시다운 시를 감상하고 참다운 시인이 편히 앉았다갈 수 있도록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