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구 칼럼] 기억될 수 없는 얼굴

문경구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다 보면 수많은 얼굴들과의 만남이 있기 마련이다. 모두 다른 타인들에게서 때로는 생각지도 않게 호감을 느끼며 자꾸만 바라보게 되기도 하고 한번 스쳐 지나간 얼굴이 평생 기억되는 느낌도 있다. 깨알같이 많은 사람들의 모습 중에 단 한 알의 깨알도 같을 수 없다는 모습들이 늘 신비롭다.

 

그래서 신은 천지창조 작품 뒤에 내놓은 작품이 바로 인간을 빚어낸 일이 아닐까. 내가 그 속에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신의 속내를 자꾸 알아내려 하는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을 만나보는 일은 신을 만나는 일이라고 믿으니 나는 매일 신을 만나는 것이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서 얼굴을 보면 저마다의 독특한 관상을 지닌 것을 알 수 있다. 화장기 없는 여인일수록 더욱 아름답기에 나는 그들을 보면서 신이라도 만날 것 같은 애틋한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어진다. 광장에 모여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는 사람들은 신바람이 나기에 충분한 모습들이다.

 

내일은 아직 오직 않았으니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기에 오늘을 한껏 즐기라는 그들에게만 아름다운 순수를 주신 것도 신의 작품이다. 세련되게 잘 차려입은 유럽인들을 만나는 것보다 어느 가난한 남미 사람들의 얼굴에서 흐르는 눈빛은 더욱 아름답다.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소박하게 살아간다. 얼굴만큼 주름이 가득한 손으로 야채를 파는 멕시칸 노인의 얼굴에 쓰여진 세월의 시간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 모습이 바로 신의 완성작이라고 생각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신께서 자연스럽게 늙은 것도 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이제까지 암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일만이 신의 축복이라고 여겼다. 그들의 아름다운 모습 속에 신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나에게도 축복을 함께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게는 아주 귀중한 모습들의 사진이 있다. 조선시대 말 왕가의 사진이니 백 년은 족히 넘은 사진이다. 어린 시절부터 벽에 걸린 그 사진 속 왕가의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왕족만큼 고귀한 꿈으로 성장을 했을지 모른다. 일곱 분의 사진 중에 부모님께서 알려주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한두 분이 전부다.

 

대한제국의 비운을 맞은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와 이방자 여사의 기억이 아무래도 제일 가까운 역사의 인물이었기에 아직까지 기억한다. 그 윗대로 고종, 윤비 등을 알려주셨건만 가버린 세월만큼 기억에서 아물거린다. 아무래도 역사학자를 만나야 하는데 또다시 얼마만큼의 세월이 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역사 속 인물을 매일 만나게 되니 소중하기만 하다. 그들의 사진 속에는 흥망성쇠로 탈색된 모습이 아무런 꾸밈없이 순수하다. 그 역사를 매일 지켜보는 지금의 나의 모습만이 오히려 화려하다. 흑백사진의 예술성을 지닌 왕족다운 모습이 화려한 왕가였다면 베적삼으로 살았던 민초들의 얼굴은 또 얼마나 순수와 소박함을 지니고 살았을까.

 

역사 속 인물인 그들이 살았던 세월을 모두 담고 있는 사진이 국보급 보물이라면 우리 모두의 삶도 연극 속의 주인공으로 보물이다. 요즘 한국 드라마의 인물들은 환상을 마구 깨어 놓는다.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손녀와 할머니의 얼굴을 구분할 수가 없이 똑같다. 세월을 지켜본 할머니의 얼굴이 아니다.

 

부스스 생각에서 깨어나 세상을 두리번거리는 드라마 속 얼굴이 전혀 아니다. 그 할머니와 손녀가 조금도 다름이 없이 모두가 똑같이 희고 맑게 빛나는 백자 항아리에 눈코 입을 오려 붙여놓은 얼굴이다. 눈꼬리가 올라간 얼굴로 내려다보는 그만큼의 인생을 그려낼 수 없는 모습으로 할머니 흉내를 내고 어린 손녀의 목소리를 꾸며낸다.

 

눈이 부시도록 티 한 점 없는 맑고 고운 얼굴들이 나는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세월에 찌든 할머니의 역을 해내야 할 사람이 요즘의 무리한 피부관리로 모두가 한 장의 백지 같은 얼굴이었다. 할머니다움도 손녀다움도 없는 얼굴은 최첨단 기술이 만들어낸 얼굴이다. 모두 똑같은 피부 시술의 미인이라고 한다. 모두가 똑같은 얼굴들이다. 신은 그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궁금하다. 늙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고 억지로 꾸며 낸 지나친 얼굴을 갖는 일은 신을 우습게 여기는 인간들의 실수가 아닐까. 아마 신도 깜빡 속았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기억으로 찾아보는 서울역 뒤 만리동 언덕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의 신년운수 생기복덕을 점쳐주던 만리동 만신의 얼굴이 무서워 몰래 숨어서 본 기억이 있다. 모진 세월을 하나의 신기로 점쳐주던 모습이 정말 잘 어울렸던 기억을 지금도 갖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누추함조차도 삶의 조화를 이루어주던 보살들의 얼굴이 전혀 아니다. 그 드라마 속의 손녀와 할머니처럼 똑같은 얼굴로 인터넷 세상에서 점집 광고를 한다. 애절했던 그리움도 환희도 모두 섞인 인생의 희로애락을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하고 탱탱한 얼굴로 점을 치겠다는 것이다. 인터넷이라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만신들의 얼굴은 드라마에 나오는 손녀와 할머니의 소품 같아 그저 경박하기만 하여 실망스럽다.

 

제아무리 신출귀몰한 관상쟁이도 그런 얼굴을 보면서 어떻게 신을 부를 수 있을까. 감쪽같이 신의 눈을 속이는 보살이 어떻게 영험한 신점을 기대할 수 있을까. 각기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이제 더 이상 아닌가 보다. 모두가 다리미로 잘 다려진 기억될 수 없는 얼굴들이다.

 

[문경구]

화가

수필가

코스미안뉴스 칼럼니스트

문경구 kimurgin@hotmail.com

 

작성 2022.01.25 12:35 수정 2022.01.25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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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