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계봉의 인문기행] 2022 경기권 DMZ 통일걷기

제1부 임진강은 말없이 흐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여행을 뜻하는 영어 ‘travel’은 라틴어 ‘고통, 고난’을 뜻하는 ‘travail’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의 여행은 ‘즐거움과 기쁨’으로 표현되지만, 고대인들은 힘들고 괴로운 여행을 통하여 한층 더 성숙된 삶을 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마간산(走馬看山)격 현대적 의미의 여행을 지양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과정을 체험하여 자아성숙을 꾀하는 고대적 의미의 여행에 도전해 보기로 한다. 

 

통일부에서 주최하고 DMZ 생태연구소(소장 김승호)에서 주관하는 2022 DMZ 통일걷기가 3박 4일 일정(2022.10.3~10.6)으로 진행되었다. 경기권의 DMZ를 따라 걸으면서 분단국의 평화통일을 위한 의지를 되새기고 임진강 일대인 파주와 연천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태계를 알아보는 체험프로그램으로 10대부터 70대까지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국민 40명이 참가하였는데, 그중에는 가족 4명과 미국과 인도에서 온 교포가 있어 눈길을 끌었다.

 

2022 DMZ 통일걷기에 참가한 40명의 참가자들

 

이번 행사는 연천지역에서 출발하여 임진강을 따라 파주지역으로 내려오는 약 100km 정도의코스를 이동하게 되는데, 개인적으로 출입이 불가능한 민통선 지역 내에서 주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이동할 때 지켜야 할 준수사항과 안전수칙 등을 충분히 숙지한 후 진행되었다. 

 

 

2022 DMZ 통일걷기 이동 코스

 

첫날, 비가 오는 가운데에서도 대원들은 10명씩 4개 조로 편성하여 DMZ생태연구소 김승호소장의 인솔로 연천군 중면 합수리를 출발한다. 산으로 들어가는 아스라한 들길은 이미 억새의 흔들리는 이삭 무리로 사람의 마음을 다분히 감상적으로 만들면서 들뜬 마음을 가라앉힌다. 어느새 물기를 잃고 말라가는 풀들이 발길에 제법 사그락거리면 가을의 한복판에 들어섰음을 느낄 수 있다. 이윽고 임진강과 북한 지역이 잘 내려 보이는 옥녀봉 정상에 도착하니 높이 10m의 그리팅맨(greeting man)이 4km 떨어진 북녘땅을 바라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는데, 이 조형물은 지구촌의 소통과 화합을 추구하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옥녀봉 정상의 그리팅맨. 남북 화합을 상징하는 거대한 조형물이다.

 

연강(漣江)은 물의 고장 연천에 흐르는 임진강을 일컫는 말이다. 연강나루길은 연천군 선곡리 두루미마을에서 태풍전망대에 이르는 16km 구간에 조성된 둘레길이다. 북에서 흘러내린 임진강의 유려한 물줄기가 휴전선을 넘어 처음 남쪽 땅과 만나는 이 길을 걸으면서 천혜의 자연경관과 다양한 자생 동식물들의 보금자리, 특히 두루미와 재두루미의 서식지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다. 

 

연강나루길에서 바라본 연강. 겸재 정선이 그린 『연강임술첩』에 비경이 담겨 있다.

 

가랑비를 뚫고 길을 재촉하여 태풍전망대에 오른다. 휴전선까지 800m, 북한초소까지 1,600m로 155마일 휴전선에서 북한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전망대로 유명하다. 그러나 사방에 운무가 가득하여 오리무중(五里霧中)이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남과 북의 현재 상황을 보는 것 같아 아쉬움만 남긴 채 발걸음을 돌린다. 

 

태풍전망대의 소년전차병 기념비

 

태풍전망대에서 내려오면 민통선 내에 설립된 최초의 예술 공간인 연강갤러리를 만난다. 여기서 걸음을 재촉하여 망제여울이 있는 연천 중면 황산리로 이동한다. 숲길을 걸다 보니 아스라한 감상의 풀 속에서 가장 먼저 들국화 무리를 만난다. 우윳빛 노랑의 고들빼기가 줄기 마디마디에 가을 햇살 같은 꽃을 달고 있고, 바위 엉성한 양지에서는 연보랏빛 쑥부쟁이가 하늘거리며 가을 공기를 흔들고 있다. 가을 정취의 으뜸은 바로 야생의 들국화 무리이다. 진정으로 숲의 가을을 만드는 것은 보석처럼 빛나는 들국화들이다. 

 

망제여울 가는 길가의 들국화 무리

 

망제여울은 겨울철에 강가의 자갈과 여울에서 월동하는 두루미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주변 농경지에서 두루미가 좋아하는 율무를 많이 재배하고 있어 휴식지, 잠자리, 먹이터의 조건을 모두 갖춘 덕분에 우리나라에서 단위면적당 두루미의 개체 수가 가장 많은 장소라고 한다. 

 

두루미의 천국, 임진강 망제여울

 

걷는 동안 참가자들은 10명씩 한 조에 편성되어 다양한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면서 자연을 체험하게 되는데, DMZ생태연구소에 소속된 생태전문가들이 조장을 맡아 해당 지역의 생태계 전반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연천 임진강 주변의 율무밭

 

두루미는 세계자연보존연맹(IUCN)의 멸종위기종(EN)으로, 전 세계 생존 개체 수의 약 8~10% 이상이 연천 임진강 두루미류 도래지여서 여기는 국제적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다. 아울러는 임진강 일대는 고유어종서식지여서 생물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두루미의 활동을 관측할 수 있는 두루미 탐조대가 설치되어 있고 근처에 두루미 테마파크도 있다. 

 

탐조대 창을 통해 본 임진강 두루미 서식지

 

연천군 무등리에는 고구려 보루성이 있다. 무등리 장대봉은 해발은 높지 않지만 임진강 쪽으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고 주변 일대와 강 건너까지 조망이 되어 적을 방어하기 용이하여 2개의 보루를 산정에 설치하여 운용했는데 산 아래에 나루가 있어 해상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갖춘 곳이다.

 

신라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고구려의 무등리 보루

 

무등리 보루를 내려오면 임진강이 나온다. 강가를 따라 걷다가 임진교를 지나면 강가로 내려서게 되고 강 반대쪽에 동이리 적벽이 시작된다. 미산면 동이리 일대의 임진강은 수 km에 걸쳐 아름다운 수직의 주상절리가 발달 되어있다. 화산 활동이 끝난 후 용암대지가 강의 침식을 받게 되자 강을 따라 기하학적 형태의 현무암 주상절리가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런 주상절리의 절벽에 붙어사는 담쟁이와 돌단풍은 석양빛에 붉게 보여 이곳을 적벽이라고 부르는데, 임진강 주상절리 적벽은 임진강의 최고명소로 알려져 있다.

 

임진강 주상절리 적벽

 

절리는 암석 표면에 발달하는 좁은 틈을 말하는데 침식을 받게 되면 이 틈이 벌어지면서 암석이 쪼개지게 된다. 주상절리는 긴 통 모양의 절리를 일컫는 말로 대개 현무암 지역에서 가장 잘 발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리를 빨갛게 물들인 담쟁이

 

이슬비를 맞으며 임진강과 한탄강의 합수부를 지나 당포성에 도착한다.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에 있는 당포성은 임진강과 당개나루터로 흘러드는 하천이 형성한 삼각형 모양의 절벽 위에 만들어진 고구려 성이다. 고구려는 임진강을 남쪽 국경으로 삼았는데, 적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하류에서부터 상류 쪽으로 덕진산성, 호로고루, 당포성, 무등리보루 등 10개의 성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당포성은 쏟아지는 듯한 별을 볼 수 있는 별 보기 명소이기도 하다.

 

마침 임진강에서 바람이 부니 성안의 황량한 평원에 누워있던 나뭇잎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에 질세라 하늘에 수백 마리의 쇠기러기들이 장엄하게 군무를 그려내는 풍경은 참으로 한 폭의 그림이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 함경남도 마식령 고원에서 시작되어 한강으로 흐르는 강. 이틀간 걸었던 임진강의 도도한 물줄기가 수억 년에 걸친 시간의 굴곡을 품고 당포성 아래를 유유히 흘러간다. 

 

길 위에 선 나그네는 객수(客愁)만 가득한데

 

임진강은 말없이 흐른다.

 

 

여계봉 선임기자

yeogb@naver.com

 

작성 2022.10.09 10:30 수정 2022.10.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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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