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의 한살이란 간단없이 되풀이되는 만남의 연속이다. 처음 이승에 모습 나투어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느 한시인들 실로 만남 아닌 때가 있으랴.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면서부터 한 생명의, 불안하면서도 설레는 만남은 그 서막이 오른다. 코흘리개 시절엔 또래를 만나고, 학창 시절엔 교우와 스승을 만난다. 홀로서야 할 시기가 되면 직장을 만나고, 동료를 만나고, 연인을 만나고, 그리고 학문을 만나고, 예술을 만나고…….
그 수다한 만남들 가운데는 물론 필연적인 만남도 있을 것이며 우연한 만남도 있을 것이다. 아니다. 우연인 듯 보이는 만남조차도 따져 보면 기실 필연적인 만남일 때가 많다.
하고많은 만남 가운데 무엇보다 의미 깊은 만남은 아마도 부부간의 조우遭遇가 아닐까 한다. 이십여 년 혹은 삼십여 년을, 각자 다른 환경에서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에 길들어져 온 두 사람이 우연한, 너무도 우연한 기회로 만나 가정이란 하나의 울타리를 이룬다는 것은 결코 작은 인연이 아니다.
불가에서는 길거리를 지나치다 서로 옷자락만 스쳐도 전생에 오만 번 이상의 인연이 있었다고 하거늘, 하물며 모래알보다 많고 많은 사람들 가운데, 그것도 하필이면 같은 시대에 세상에 나와 부부의 연으로 맺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이 어찌 작은 인연이랄 수 있겠는가.
그 만남은 진실로 소중하다. 아니, 소중하다 못해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어느 청춘남녀가 서로 마음을 터서 한 쌍의 부부로 맺어질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될까. 몇억만 분의 일, 몇조만 분의 일, 아니면 그보다 한층 더 극적일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인연법 말고는 이를 달리 풀어낼 길이 없을 것만 같다.
정말이지 부부간의 만남은 특별한 연분이다. 그건 다른 어떠한 만남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진실로 소중하고 값지다. 그래서 우주의 무게에 견줄 만한 무게를 지녔다 해도 그리 지나친 표현은 아닐 성싶다. 이처럼 소중하고 소중한 것이 부부간의 만남이다.
하지만 그 소중한 인연을 오래오래 간직하지 아니하고 그저 헌신짝처럼 미련 없이 내팽개쳐 버리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급증하고 있다. 참을성은 남의 집 개한테 죄 주어 버렸는가. “내 인생은 나의 것”, 이렇게 외치며 너무도 당당하게, 아니 비굴하게 홀로서기를 감행하는 젊은 남녀들의 행태行態가 우리를 우울하고 서글프게 만든다.
가정법원의 재판정을 나서면서 자신들의 분신인 자식마저 서로 떠맡지 않으려고 악다구니까지 벌인다는 소식을 들을 때는 차라리 귀를 막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더러는 행복한 새 출발에 한갓 거추장스러운 장애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고 변해하기도 한다니, 더 이상의 할 말을 잃고 만다. 그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한 족속이다. 제 새끼 사랑은 동물들조차도 품 안에 지닌 본성이 아니던가.
요사이 세상에는 값싼 ‘사랑’이란 단어가 어디를 가든 허섭스레기처럼 널브러져 뒹군다. 우리가 언제 사랑하지 않고 살았던 적이 있었던가. 사랑은 유독 이 시대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데도 말끝마다 “사랑이 어쩌고저쩌고”하며 타령을 늘어놓는다.
흐느적거리도록 끈적끈적한 유행가 가사는 온통 사랑 하나로 도배되어 있다시피 하다. 마치 ‘사랑’이란 낱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노래가 되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심지어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도 “사랑해요 000”, 늘 이런 식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떻게 사랑의 대상인가. 그분들은 어디까지나 존경의 대상일 따름이다.
이처럼 사랑이 봇물을 이루는 세상인데도 어째서 정작 사랑은 겨울 못물처럼 메말라 버렸는가. 어째서 사랑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장마철 강물 불듯 날이 갈수록 불어만 가는 것일까. 무엇이든 귀해야 값어치가 나가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사는 세상의 이치다.
몇 해 전의 일로 기억된다. ‘아침마당’이라는 한 텔레비전 오락프로에 출연한 어느 새내기 부부의 이야기가 그저 단순한 우스갯감을 넘어 우리를 무척 서글프게 만들었던 적이 있다. 사회자가 남자 출연자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하루에 아내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씩이나 하느냐고. 모르긴 해도 한 스무 번 정도는 될 거라고 그는 스스럼없이 대답했었다.
아침에 이부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하고, 세수하고 하고, 밥 먹고 나서 하고, 양치질하고 하고, 출근할 때 하고, 오전 일과 마치고 하고, 전화통에다 대고. 그리고 또……. 나는 그들 부부가 그 후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제각기 다른 집에서 살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어 주었을 뿐이다.
세상의 많은 여자들은 남자로부터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받으려 애쓴다. 마치 시시때때로 확인해 두지 않으면 저 하늘 아득히 달아나 버리고 말 파랑새라도 되는 양. 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해 줘요~” 운운하는 유행가 가사까지 생겨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사랑’이라는 말이 불나방처럼 어지럽게 부유浮游하는 세상, 그것의 값어치가 발걸음에 차이는 십 원짜리 동전같이 흔해 빠져 버린 지 오래다. 서양 사람들은 ‘아이 러브 유’를 입에 달고 산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잠시라도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천벌이 내릴 것이란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그들의 삶은 ‘사랑’이 태반이다. 그러나 그렇게 밥 먹듯 사랑을 노래 부르면서도 정작 갈라서기는 또 어찌 그리 식은 죽 먹듯 쉽사리 결행해 버리는가. 이것이 나에겐 도무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여서, 아마 내가 오랜 세월 안고 씨름해야 할 숙제일 것도 같다.
새는 울어 뜻을 만들지 않고
지어서 교태로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이렇게 노래한 시인이 있다. 새가 그렇지 않다면 무엇이 울어 뜻을 만들고 사랑을 가식할까. 스무고개 놀이에서라면 굳이 스무고개까지 갈 필요도 없다. 그 답은 삼척동자라도 단 몇 고개 만에 금방 알아맞힐 수 있을 것이기에.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우리 인간이 한갓 미물인 새보다 못하대서야 어디 가당키나 할 말인가. 인간의 가식적인 사랑놀음에 대한 은근한 꼬집음, 입에 발린 사랑의 밀어는 삼류극장의 멜로드라마처럼 참 천박스러워 보인다.
말로 하는 사랑보다는 눈빛으로 주고받는 사랑이 더 아름답고, 눈빛으로 주고받는 사랑보다는 가슴으로 나누는 사랑이 더 지고至高하다고 생각한다. 진실한 사랑은 말을 앞세우지 않는 법이다. 그런 사랑은 목석같이 덤덤하여 겉멋은 없을지라도 가슴은 더없이 깊고 따뜻하다. 그러기에 그들은 한 번 맺은 사랑을 세상 다하는 날까지 지키려고 자신의 목숨마저 담보할는지 모른다.
진실한 부부관계란 말없이 마주 보고 서서 가슴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는 암수 두 그루의 은행나무 같은 것. 살아가면서 자주 그런 생각에 젖어 보곤 한다.
[곽흥렬]
1991년 《수필문학》, 1999년《대구문학》으로 등단
수필집 『우시장의 오후』를 비롯하여 총 12권 펴냄
교원문학상, 중봉 조헌문학상, 성호문학상,
흑구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등을 수상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받음
제4회 코스미안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