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칼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허석

수채화다. 강렬한 원색으로 호사스럽게 덧칠한 유화가 아니다. 만신창이로 터지는 피 묻은 색소나 불붙은 화염의 유혹과도 거리가 멀다. 눈물겹도록 하얗고, 아리도록 떨려오는 연보라는 자연이 선물한 신비의 색이다. 구름 한 자밤, 바람 한 움큼, 여름날 별빛 한 모숨으로 그려낸 영감 있는 화가의 솜씨다.

 

그들이 춤을 춘다. 맵시 고운 한복의 자태로 원형으로 모여 화심(花心)을 이루고, 한지 같은 꽃잎 부채를 밖으로 활짝 펼쳐 도란형의 통꽃을 만든다. 꽃잎이 따로 떨어지지 않은 화합이고 통합이다. 오이씨 같은 버선, 어여쁜 까치발이 화맥(花脈)으로 모였다. 나비들 열두 폭 치맛자락으로 날갯짓하고 바람 물결 따라 꽃잎들 나울나울 춤사위를 시작한다. 하늘은 파랗고 부채춤의 군무는 눈부시다.

 

우아하지만 결코 귀족적인 행세는 아니다. 당당하지만 오만하지 않고 빛나지만 뽐내지 않는다. 어떤 독이나 가시도 품지 않았다. 잔털 하나 없는 줄기, 굽히지 않는 가지의 심성은 지(智)와 정(正)과 의(義)를 품었다. 겸허하고 소쇄하고 순결하여 군자의 꽃답게 그 결곡한 자태를 흩트리지 않는다. 저렇게 고운 꽃을 그 들풀 같은 나무에서 어떻게 피워냈을까. 질그릇처럼 소박하고 베적삼처럼 수수하다.

 

마법사가 따로 없다. 새벽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바닥에 떨어져 생을 마감하였는데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제 본 그대로다. 그루마다 3천여 송이나 되는 꽃봉오리들이 연이어 새로운 꽃들로 백여 일 동안 끊임없이 피어난다. 한꺼번에 피었다 지는 한번만의 영화가 아니다. 버려야 산다는 듯이 오늘의 영광이 내일로, 일신우일신 하듯 성공을 뛰어넘어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일이다. 두 팔에 이마를 묻은 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외치고 눈을 꺼엄~뻑 감았다 뜨면 세상은 낯선 곳처럼 눈부시고 정지된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 지면 그만인 것이 국가 경영이나 민족의 역사가 아니다, 개인은 한순간일지라도 국가나 국토는 끝이 없이 영속성을 지녀야 한다. 하루의 시간은 꽃송이처럼 피고 지지만 한 그루의 나무는 영원히 꽃 피어있는 민족의 상징이다. 잘못이나 실수가 있었을지라도 뒷날의 무궁한 발전과 번영의 토대로 삼고 미련 없이 거름의 역할을 하면 되는 것이다.

 

인내와 끈기는 우리의 민족성이다. 아무리 험난하고 힘든 과정에도 끝내 굽히거나 포기하지 않는 자강불식의 기상을 가졌다. 어쩌면 무궁화는 의병의 꽃인지도 모른다. 나라가 위급할 때 끊임없이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애국충정으로 무장한 이름 모를 의병이나 독립군은 무궁화의 얼이고 혼이다. 이 땅 어디에도 그들의 영혼이 살아 숨 쉬지 않은 곳은 없다. 그들의 의롭고 거룩한 희생이 없었다면 이 강토가 어떻게 보존되었겠으며, 어떻게 지금처럼 자유 민주주의의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까.

 

단군 이래 오천 년 동안 한반도에 지천으로 피어 한 번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는 무궁화였다. 간도 지역에도, 땅끝마을 해남에도, 응회암 덩어리인 독도에도 터줏대감처럼 고고하게 피어있었다. 배달민족이 모두 흠모하는 꽃인데도 어떻게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없을까. 누가 이 강토의 무궁화를 뿌리째 뽑아버렸는가. 누가 이 민족을 싫어하고, 누가 이 나라가 축복받는 것을 시기하고 질투하는가.

 

세상에 꽃답지 않은 꽃이 어디 있다고 꽃을 탄압하는가. ‘보기만 해도 핏발이 선다.’라며 ‘눈에피꽃’이며, ‘보면 부스럼이 생긴다.’라고 ‘부스럼 꽃’이 말이 되는가. 배달국 치우천왕을 따라 순국한 근화 왕비의 무덤에서 피어나 사랑의 넋이 되어 나라 전체로 퍼뜨렸다는 무궁화가 그들의 눈에는 그런 염병할 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는가. 자신들의 과오를 속죄하기는커녕 우리 민족의 영혼을 짓밟고자 하는 야욕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무궁화 앞에 서면 설레듯 심장이 요동쳐 온다. 가슴으로 전해오는 먹먹한 결의, 그 속에 우리만의 언어와 정서와 시간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탄과 포한으로만 회억 될 일은 아니다. 잊지는 말되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과거의 치욕은 반성하고 승화하여 무궁화처럼 오늘은 오늘의 꽃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지나온 역사 교훈을 확고히 인식하되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동북아시아 시대를 열어가는 데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무궁화의 기상처럼 의연하고 담대하게 이 땅을 부지런히 개간하여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일이다. 우리가 무궁화를 이렇게 사랑하는 한, 누가 한 뼘의 땅인들 쉽게 넘볼 수 있을 것이며 누가 한 치의 망언인들 함부로 소리 낼 수 있을까.

 

뜰 안에 무궁화가 활짝 피었다. 한여름 폭염도, 매몰찬 태풍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고 또 피어오른다. 꽃마다 휘날리는 태극기다. 날마다 광복절이다. 

 

[허석]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저서 : [꿈틀, 삶이 지나간다]

[그 남편, 그 아내]

[시간 밖의 시간으로]

[삶, 그 의미 속으로]

천강문학상 수상

등대문학상 수상

흑구문학상 수상

선수필문학상 수상

원종린수필문학상 수상

이메일 :sukhur99@naver.com

 

작성 2023.09.12 09:54 수정 2023.09.12 09:58
Copyrights ⓒ 코스미안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한별기자 뉴스보기
댓글 0개 (1/1 페이지)
댓글등록- 개인정보를 유출하는 글의 게시를 삼가주세요.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Shorts 동영상 더보기
bts가 살던 그 집...이젠 김혜수의 빌라!! #김혜수 #한남리버힐 #..
2025년 6월 25일
2025년 6월 24일
2025년 6월 24일
2025년 6월 23일
음악학원 이렇게 운영하라 책 중에서 #음악학원이렇게운영하라#음악학원운영 ..
설렘이 끝날 때, 진정한 연애가 시작된다 [알쓸신톡 EP.03]
우정 VS 사랑 2 [알쓸신톡 EP.03]
음악학원 이렇게 운영하라 6월 25일 출간#음악학원운영 #음악학원운영서..
우정 VS 사랑 [알쓸신톡 EP.03]
내 X가 친구인 연인 VS 내 친구가 X인 연인 [알쓸신톡 EP.03]
까일 것 같은데요...? [알쓸신톡 EP.03]
2025년 6월 23일
2025년 6월 23일
2025년 6월 22일
2025년 6월 22일
2025년 6월 21일
2025년 6월 21일
2025년 6월 21일
2025년 6월 21일
2023-01-30 10:21:54 / 김종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