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식 칼럼] 어느 실습생의 편지

김태식

40여 년 전 내가 승선 근무하는 외항선이 부산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날도 오륙도 등대는 떠나는 길손을 안전하게 보내주기 위해 어김없이 깜빡거렸고 갈매기들만이 유일한 환송객이었다. 

 

여러 선원들 가운데 실습생 K군은 수산, 해양계 관련 대학의 졸업반이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해기사 국가고시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외항선에서 정해진 기간의 실습을 이수해야 한다. 

 

부산항을 떠난 지 이틀이 지났다. 해마다 8월이면 동남아시아를 관통하는 계절풍이 어김없이 불어오는 탓에 배는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물이랑이 깊어지고 하늘은 창백한 색깔로 변하고 있었다. 첫 승선실습을 나온 K군은 실습생에게 있어 가장 고통스러운 심한 배멀미로 안색이 좋지 않았다. 

 

첫 입항 예정지인 홍콩까지는 6일간의 항해를 해야 하는데 부산항을 떠난 지 이틀 만에 K군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4~5일이 지나도 K군의 배멀미는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초보 승선자들을 보면 2일 정도만 지나면 적응이 되는데 K군은 그렇지 못한 특이한 체질로 느껴졌다. 

 

“저 홍콩 입항과 동시에 귀국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K군의 괴로운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규정상 그럴 수 없다. 나도 초보 승선실습생 시절에는 그랬다. K군의 얼굴은 말이 아니다. 며칠 동안 물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라 영양실조에 걸린 얼굴이었다. 그에게 위로가 될 만한 말은 단 한 마디뿐이었다. 

 

“참고 이겨내야 한다”

 

홍콩에 입항하여 화물을 내리고 말레이시아를 거쳐 인도양으로 항해하는 동안에는 K군이 어느 정도 승선 생활에 적응되어 가고 있었다. 이때부터 승선근무에 관한 업무지침을 가르쳐 줄 수도 있게 되고 6일간을 꼬박 고생하던 일을 뒤로하고 빠른 속도로 업무를 수행해 나갔다. 

 

2개월의 항해를 마치고 부산항에 입항했을 때 그는 승선 생활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입항하자마자 그의 집에 다녀 올 수 있도록 2박 3일간의 휴가를 주었다. 

 

다시 부산을 떠나기 전 이번 항해는 지난번 보다 더 심한 계절풍이 불어 올 것이라고 여러 부원들에게 단단히 알렸다. 예상한 대로 떠난 지 몇 시간쯤 지나자 배는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숙달된 부원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일사불란하게 자신들의 일을 했다. 

 

그런데 실습생 K군이 자신의 근무 시간임에도 보이지 않았다. 침실로 가 보니 모든 물건들이 흐트러져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출항전의 가장 기본적인 라싱(모든 물건을 고정시키는 일)이 전혀 되어 있지 않다. 가방, 신발, 의자 등 구를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이 정신없이 흐트러져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K군의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극심한 배멀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 첫 승선 후 고생하던 모습 그대로다. 부산에 입항했을 때만 해도 이제는 배멀미를 완전히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어찌된 일인지 놀라웠다. 

 

그로부터 계속해서 약 한 달 동안 꼬박 배멀미를 하는가 하면 파도가 조금 잔잔해져야만 자신의 근무를 어렵게나마 수행했다. 하지만 그동안 가르쳐 주었던 업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것이다. 내가 지시하는 모든 일에 대해 제대로 해오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동안 일을 잘해왔던 K군이었지만 지난 시간의 모습이나 지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놀라운 것은 지난 2개월 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을 잘 몰라보고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다투는 일도 생겼다. 

 

남달리 고생을 심하게 했던 K군. 후반부 이상하던 2개월간의 실습이 끝나게 된 것은 두 번째 항해를 마치고 난 뒤였다. 워낙 고생을 많이 했던 실습생이었던지라 근무성적표에는 넉넉한 점수를 주었고 훗날 훌륭한 해기사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써 주었다. 

 

2개월 후 나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실습생 K군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존경하는 1등 기관사님! 저는 2개월 전 그 선박에서 승선실습을 마친 K입니다. 이제는 동생이 완쾌되어 해기사 국가고시에도 합격을 했습니다. 모 해운회사에 취업하여 승선근무를 잘하고 있습니다. 승선실습 2개월을 남겨두고 동생이 집에 왔다가 급작스런 맹장염 수술로 인하여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동생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이번에 실습을 마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이번 해기사시험을 놓치면 또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쌍둥이 형인 제가 대신 승선을 하게 되었습니다. (중략) 

 

본의 아니게 1등 기관사님을 속이게 된 점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몇 번에 걸쳐 실수를 했는데도 화 한 번 내지 않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업무를 가르쳐 주신 점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김태식]

한국해양대학교 대학원

선박기관시스템 공학과 졸업(공학석사)

미국해운회사 일본지사장(전)

울산신문 신춘문예(등대문학상) 단편소설 당선 등단

사실문학 시 당선 등단

제4회 코스미안상 수상

이메일 :wavekts@hanmail.net

 

작성 2023.11.21 10:38 수정 2023.11.21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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